큰 기쁨의 좋은 소식
본문: 눅 2:8-14
할렐루야!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본문 10절). 더불어 허다한 천군이 천사와 함께 하나님을 찬송합니다 (본문 14절). 천사들로부터 찬송과 함께 전해진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내용은 무엇입니까?
본문 11절 “오늘날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무슨 좋은 일이 발생했는지? 또한 어디서 발생했는지? 언제 발생했는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씩 살펴 보겠습니다.
1.구주, 그리스도 주님이 나셨습니다 (본문 11절 후반)
이는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이미 기원전 8백여년 전에 예언되었었습니다.
(사 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
제사장 사가랴도 성령님의 감동으로 이를 예언했습니다 (눅 1:68-69). 가브리엘 천사도 이미 이 사실을 알렸습니다 (마 1:21).
구주는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크리오, 기름붓다”에서 나온 말로 "기름부음 받은 자"란 뜻입니다. 히브리어 메시야와 같은 뜻입니다. 왕, 제사장, 예언자를 구별하여 세우는 표였습니다 (출 29:7; 삼상 10:1; 왕상 19:16).
구주로 나신 예수님은 3년의 공생애 동안 본격적으로 구원 사역을 행하셨습니다. 나아가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그리스도의 모든 직무를 이루셨습니다(히 10:10-14). 때문에 그는 가상칠언중 6번째 “다 이루었다”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날 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 주님을 대환영하며 기뻐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영혼육 전인 구원을 받으시길 축원합니다.
2.구주는 “오늘날” 나셨습니다
본문 11절 전반 “오늘날 ...” Today
이사야 선지자를 통한 구약의 예언이 2천여 년전 예수님의 탄생의 날에 성취되었습니다.
(사 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할렐루야!
나아가 지금도 구주의 탄생 소식이 전해지고 있고, 구주로 말미암은 구원의 역사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왜요? 구주 그리스도가 지금도 하늘 보좌에 앉으셔서 통치하시기 때문입니다 (사 9:7).
아울러 오늘 본문에 사용된 “오늘today”(헬, 세메론)은 연대기적인 이 세상 시간의 흐름(크로노스) 인 “오늘” 만이 아닌, 하나님의 때(카이로스)로서의 “바로 그 날”this very day의 의미가 또한 적용되기 때문입니다.
“오늘” “바로 그 날”에 수많은 사람들이 구주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큰 기쁨의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그 놀라운 구원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습니다.
3.마지막으로, 구주는 “다윗의 동네”에 나셨습니다
본문 11절 전반 “... 다윗의 동네에 ...” In the town of David
다윗의 동네가 어디입니까? 베들레헴이었습니다.
(요 7:42) “성경에 이르기를 그리스도는 다윗의 씨로 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며”
다윗은 아버지 이새와 함께 온 식구가 베들레헴에서 살았습니다 (삼상 16:1 후반). 미가 선지자의 예언대로 구주는 다윗의 동네 베들레헴에서 나셨습니다 (미 5:2).
로마 황제의 호적령,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의 여행, 해산 기일이 임박한 마리아의 상태 등 일련의 사건들은 모두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언된 메시아의 탄생이 베들레헴에서 이루어지기 위한 하나님의 섭리이었음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베들레헴'은 '떡집'이란 뜻입니다. 즉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떡집'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리고 더우기 분명히 알 것은 예수님은 '생명의 떡'이었습니다 (요 6:35).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6:51) 말씀하셨습니다.
이 '떡'은 애굽에서 자유를 찾아 탈출하던 유월절로부터 상징화되었습니다. 히브리 백성들은 양의 피를 문설주에 바르고, 누룩을 넣지 아니한 떡을 준비했었습니다 (출 12:1-11). 이 떡과 피는 광야 40년 동안에는 만나와 생수로 현시되었습니다 (고전 10:3-4). 때문에 예수님은 자신을 광야에서 내린 '만나'와 비교하셨던 것입니다 (6:49).
예수님 때에 이르러 떡과 양의 피는 예수님의 살과 피로 표현되었습니다 (요 6:54-58). 최후의 만찬에서 떡과 포도주로 상징화 되었습니다. 그것은 모든 사람을 죄에서 해방하여 영원한 자유를 보장하는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으로 완성되었습니다.
이처럼 “생명의 떡”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와 떡집 베들레헴에 나셨던 예수 그리스도는 '참된 양식'(요 6:55)으로서의 그의 생애를 사셨던 것입니다. 할렐루야!
오늘날 은혜시대에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 “떡집”은 어디이겠습니까? 바로 “생명의 산 떡”이신 예수님이 계시는 교회입니다. 바로 “믿는 자들의 모임”인 교회에 우리의 죄를 구속하시고 생명을 주시는 구주 그리스도가 함께 거하시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구주가 함께 거하시는, 오늘날 다윗의 동네인 “떡집” 베들레헴인 교회를 가장 가까이 하시길 축원합니다. 그리하여 다윗처럼 베들레헴에 사심으로 구주를 체험하는 축복이 차고 넘치시길 축원합니다.
한편 이같은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의 표적은 무엇이었습니까? 구유에 누인 아기였습니다.
본문 12절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 하더니”
아기 예수님이 말구유에 누이신 것은 그의 '자기 비하,' '겸손과 고난'의 시작이었습니다 (빌 2:6-8 전반). 지존과 영광의 성자 예수님이 모든 인류를 죄악으로부터 구원하는 모든 사람의 구주가 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누가 예수 그리스도 구주의 영혼육 전인 구원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계속해서 주님의 구원의 은총을 덧입고 사실 수 있을까요?
오늘날 혹시 말먹이통에 누이신 갓난 아기가 보이십니까? 자신의 낮고 초라한 모습이 느껴지십니까? 거룩하고 전지전능하신 주님 앞에 부끄럽고 더럽고 교만하고 초췌한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십니까?
그렇다면 바로 그 것이 여러분에게 구주 예수 그리스도가 임하시는 은혜의 징조입니다. 또한 이미 은혜를 입어 축복 가운데 살고 있지만, 다시금 그리스도의 긍휼의 은총을 덧입는 신호입니다.
우리 모두 오늘 하늘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단지 육체의 귀로만이 아니라, 말구유에 누이셨던 예수님처럼 우리의 낮아진 심령이 듣게 되시길 축원합니다.
하나님의 오늘의 때를 맞이하시길 축원합니다.
다윗의 동네, “떡집 베들레헴”! 오늘날의 교회에서 “생명의 산 떡”이신 예수님, 구주 그리스도의 은혜와 은총을 보다 충만히 받으시길 메시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할렐루야! “구주 예수 그리스도 오늘 나셨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