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여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또 은혜를 베푸소서 심한 멸시가 우리에게 넘치나이다.
안일한 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가 우리 영혼에 넘치나이다. -Have mercy on us, LORD, have mercy, for we have had our fill of contempt. We have had our fill of the scoffing of the proud and the contempt of the arrogant.” (시편 123: 3-4)
시편 120편부터는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라는 제목의 시들이 134편까지 이어진다. 대부분의 시가 신실하신 하나님을 찬양하며 앞으로도 함께하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 대한 찬양의 고백을 담고 있는 밝고 소망적인 표현으로 쓰여 졌다. 그런데 성전에 올라가는 노래 중의 하나인 123편은 유일하게 다른 시와는 다른 분위기를 담고 있는 시이다. 심한 멸시와 조소를 받고 있는 현실을 하나님께 고하며 호소하고 있다. 그 호소의 간절함을 마치 상전의 손을 바라보는 종들의 눈처럼, 여 주인의 손을 바라보는 여종의 눈과 같다고 표현하고 있다. 상전의 은혜를 사모하는 종들의 눈과 같은 눈으로 여호와를 바라보며 은혜 주시기를 기다리고 있다고 표현하면서 지금 넘치도록 당하고 있는 안일한자의 조소와 교만한 자의 멸시에 대하여 하나님께서 간섭하여 주시기를 호소하고 있다. 상전의 손을 주시하면서 눈을 다른 데로 두지 못하는 종의 간절함은 어느 정도일가? 상전이 돈지갑을 만지작거리고 있는 중에 종들은 그 지갑에서 동전을 꺼내 던져주기를 고대하고 얼굴에는 은혜를 바라며 침을 꿀꺽 삼키는 표정의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해 볼 수 있다. 그처럼 우리도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를 사모하며 기도하고 시선을 하나님께 고정할 필요가 있다는 교훈으로 이해된다.
그렇다면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이 당하는 이 같은 멸시와 조소는 누구로부터 당한 어느 정도의 수모일까? 이 한편의 시로는 나로서는 짐작만 할뿐 정확히 역사에서 찾아내어 제시할 실력은 없지만 분명한 것은 성전을 올라가면서 함께 노래한 가사가 이 같이 무겁고 어두울 정도로 그들이 당면한 억울한 현실에 대하여 여호와께서 그 한을 풀어주시기를 호소하는 기도가 시급하고 간절하다는 것은 분명하다.
이 시를 읽으면서 생각 할 때 현재 나에게는, 내가 섬기고 있는 이 나라에는, 그리고 고국 대한민국에는 이같이 간절한 호소도 기도를 해야 할 상황은 아닌가 하는 것이다.
한국교회의 현실도 심히 답답하여 안 믿는 사람들은 물론 이미 교회 안에 들어온 사람들도 매우 큰 실망을 가지는 상황이다. 이것이 바로 멸시와 조소를 만들어내는 원인이 되는 지금의 교회 모습이어서 가슴을 치며 하나님께 호소하여 고쳐달라고 외쳐야 할 상황이기에 충분하다고 사료된다.
그리고 이곳 인니에서도 예수를 믿는 사람이 수도의 시장으로 있으면서 공명정대 깨끗한 시정을 펼쳐가노라니까 부패가 없는 맑은 시정경영이 싫고, 또한 예수 믿는자로서 고위지도자로 존재하는 것을 심히 시기하는 메조리티 계층들이 가만두지 않았다. 언젠가 그 시장이 말한바 있는 한마디를 종교적으로 시비를 걸어 더 이상 그가 국가 지도자로서 커가지 못하도록 누르고 앞길을 닫아버린 일이 있다. 수많은 이 나라의 크리스천들이 합심으로 기도하였는데 결과는 그랬다. 하지만 이것은 일시적으로 당하는 이 땅에서의 조소와 멸시와 차별 일뿐 결국에 가서는 결코 좌절이 아니며 패배가 아니라는 것을 하나님의 법정에서 모두가 분명히 목도하게 될 날이 오게 된다고 믿는다.
너무나 자주 당하는 고난이라면 어지간한 고난은 기도의 제목으로도 오르지 못하는 경우가 오늘날의 일반적 추세이다. 만성이 되어버렸다고 할까, 아니면 사태의 심각성에 대해 민감도가 무디어 졌다고 할까, 혹은 될 대로 되겠지 하고 마음을 놓아버린 상태에서 흘러가는 대로 함께 표류하는 양태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사역지도 한국도, 어디나 예수님을 믿는 믿음 때문에 당하는 조소와 멸시가 있다. 설사 조소와 멸시가 두려워 믿음을 버릴 만큼 믿음이 약하지는 않다하여도 중요한 교훈은 이런 상황을 대하며 믿는 자로서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느냐 이다. 믿음 때문에 성도가 당해야하는 조소와 멸시로 인한 억울함 같은 것을 하나님께 호소하는 것만이 아니라 뒤집어 생각해 보면 기도하고 하나님께 호소할 충분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아직 모르고 더구나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주님으로 믿지 않아서 성도들을 멸시하고 조롱한다면 그 불신과 그에 따른 행동 때문에 언젠가는 하나님 앞에서 받을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을 불쌍한 영혼들을 위하여도 또한 더욱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도의 목적과 구하는바 소원이 다만 믿는자 측과 나 자신을 위한 것이라면 그것 또한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하신 주님 앞에서 매우 부족하고 이기적인 기도가 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런 자기 점검 포인트를 가지고 나에게 적용하여 볼 때 나의기도는 아직도 심히 나에게 편중되어 있어 속히 고침 받아야 할 기도라는 것을 발견한다. 성령에 붙들린바 된 사람으로 살아가며 나의 한계를 뛰어넘어 하나님이 나를 보시고 바라시는 바 그 수준에 점점 근접해 가야하는 것이 나의 숙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