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바벨론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구약시대의 은혜의 불완전함과 그 한계)
본문 : 에스라 9:8~9
이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에게 잠시 동안 은혜를 베푸시사 얼마를 남겨두어 피하게 하신 우리를 그 거룩한 처소에 박힌 못과 같게 하시고 우리 하나님이 우리 눈을 밝히사 우리가 종노릇 하는 중에서 조금 소생하게 하셨나이다. 우리가 비록 노예가 되었사오나 우리 하나님이 우리를 그 종살이하는 중에 버려두지 아니하시고 바사 왕들 앞에서 우리가 불쌍히 여김을 입고 소생하여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세우게 하시며 그 무너진 것을 수리하게 하시며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나이다.
70년간의 포로생활을 마치고 이스라엘 백성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지만, 이전의 모습(=다윗과 솔로몬 때의 왕성한 영적인 모습)을 되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자신들의 왕을 세울 수도 없었고 재건된 성전(스룹바벨)은 이전보다 초라하게 여겨졌고 더 더욱 그 땅(가나안=팔레스타인)에 대한 완전한 통치권을 회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페르시아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을 뿐만 아니라, 그 이후로 그리스 제국과 로마 제국에게 계속적으로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특별히 제사장이면서 율법학자인 에스라(Ezra)가 예루살렘으로 돌아와서 백성의 지도층 가운데 만연한 죄(unfaithfulness) 이방여인과의 통혼에 대하여 절규하고 통탄하는 고백에서, 우리는 바벨론에서 돌아온 자들이라고 할지라도, 구약시대에 경험한 은혜는 여전히 그 한계와 불완전함이 뚜렷하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쉽게 말하면 포로지에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까지도 경험하였던 그 은혜라는 것은 일시적이고 임시적인(=temporary) 것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을 잘 알려주고 있습니다.
1. 사로 잡혔던 자들의 후손들이 예루살렘으로 돌아온(returned) 일도 “잠시 동안의 은혜”에 불과하였다고 고백합니다(8덜). 예루살렘으로 돌아온 자들은 과거의 영광을 재현할 수 있기를 기대했을 겁니다. 그런데 왕, 성전, 통치권이 회복되지 못하였을 뿐만 아니라, 에스라의 처절한 고백은, 특히 지도층 사람들에게서 보았던 인간의 근본적인 죄 문제가 완전히 해결되지 않은 사실을 통해서, 이들이 경험한 은혜라는 것은 여전히 “잠시 동안의 은혜”에 불과하였다는 것을 잘 나타냅니다.
2.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은 “마치 거룩한 처소(=천막으로 만들었기에 이동해야 하는 성막)에 박힌 못(=peg, 말뚝)”에 불과하였다고 고백합니다(8절). 포로에서 돌아온 자들의 위치(status)가 마치 움직이는 성소(=이동용 성막)을 고정시키기 위해서 사용하였던 말뚝에 지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굳건하게 박혀서 결코 움직이지 않게 하는 영원한 은혜가 되지 못하였습니다. 한 마디로 영원하고 완전한 구원을 경험하지는 못하였다는 뜻입니다.
3. 우리로 종노릇 하는 중에 “조금 소생하게” 하셨다고 고백합니다(8절). 완전한 소생(=완전하게 살아남)이 아직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바벨론에서 돌아왔지만(=생존하였지만=살아났지만), 조금 밖에는 살아나지 아니하였다는 뜻입니다.
4. 유다와 예루살렘에서 우리에게 “울타리”를 주셨다고 고백합니다(9절). 아직은 느헤미야가 돌아와서 예루살렘에 성벽(wall)을 쌓는 일이 이루어지기 전의 어떤 형편을 말하고 있습니다. 완전하고 굳건한 성벽으로 성전과 백성들을 보호하는 장치가 세워지기 전에, 마치 “울타리”의 수준에서 예루살렘의 성전과 백성들을 보호하고 지켜야 하는 연약한 상태였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여전히 불완전하고 한계가 있었던 정도의 은혜이었다는 말입니다.
••• 이런 모든 것들은 완전하고 영원하며 불변하신 은혜는 아직도 바라보고 기다려야 할 미래의 일(=그리스도의 초림)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우리에게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불변하신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심이 역사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이러한 예수 그리스도를 오늘도 말씀에서 성령 하나님의 조명을 통하여 풍성하게 경험하시기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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