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 왕하 18:3-8
제 목 : 신앙의 야성을 키우세요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을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
저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하신 계명을 지켰더라.(왕하 18:5-6)
He trusted in the LORD god of Israel; so that
after him was none like him among all the kings
of Judah, nor any that were before him
For he clave to the LORD, and departed not from
following him, but kept his commandments,
which the LORD commanded Moses.(2kings 18:5-6)]
풍산개와 세퍼트가 싸우는 것을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습니다.
실제로 풍산개는 세퍼트보다 덩치 차이가 많이 나는데
처음에는 세퍼트가 공격을 계속하면 풍산개는 이리저리
피하다가 잠시 세퍼트가 집중력이 흐려진 틈을 타서
한 번에 목을 물고 늘어져서 이겼습니다.
덩치가 큰 세퍼트가 작은 풍산개를
이기지 못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을까요?
그것은 길들여짐이 달랐기 때문입니다.
세퍼트는 지키거나 혹은 수색견으로 사용되어집니다.
수색하는 세퍼트는 야성을 잃었고
탐색하는 견으로 쓰임을 받습니다.
그러나 풍산개는 사냥견입니다.
싸움을 위한 사냥견, 풍산개는
야성이 살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교육받고 훈련을 되었느냐에 따라
쓰임새가 다릅니다.
사람들은 겉만 보고 평가하기 때문에
실수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진실을 말해도 믿어주지 않을 때가 있고,
또 거짓을 말해도 진실로 받아들이는
실수를 범할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는 관점은 전혀 다릅니다.
영이신 하나님은 우리의 안과 밖을 다 보시기 때문에
정확한 기준이 되고 평가가 됩니다.
오늘날 크리스천의 모습은 어떤가요?
감성이 잘 발달되어 교회에서
예배도 잘 드리고 기도도 잘 합니다.
지성이 발달되어 말씀의 원리를
삶에 적용하기를 좋아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영성이 사라졌습니다.
바로 야성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왜 그런가요?
치열한 영적싸움의 현장이 없어졌기 때문입니다.
기독교 신앙이 처음에
우리나라에 들어올 때에는 핍박이 많았습니다.
그러다 보니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혹은 종교적 사회적 문화 차이로
오해, 또는 핍박도 많았습니다.
그러할 때는 오히려 신앙에 야성이 살아 있었습니다.
예수 믿는 것 때문에 매 맞는 것은 예사고,
때로 집에서 쫓겨날 각오를 하면서
죽어도 믿겠다는 고집과 당참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의 숫자가 늘어나고,
사회적으로 문화 수준이 높아지면서
신앙에 어느 정도의 보호막이 쳐졌습니다.
더 이상 싸우지 않아도 믿을 수 있는 상황이 왔습니다.
그러다 보니 야성을 잃었습니다.
혈통이 좋고 덩치도 크고 충성도 좋아서 애용되고 있지만
가장 중요한 영성이 사라졌습니다.
금과 은은 내게 없거니와 나사렛 예수 이름은 있던
초대교회와 다르게 금도 있고 은은 있지만
나사렛 예수 이름이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정작 세상과 마귀와의 싸움에서 이기지 못하고
아니 싸움에 나가는 것 자체를 두려워하는
그런 신앙인이 되어버렸습니다.
야성을 잃어버린 크리스천은 타협하고 타락하게 됩니다.
다윗은 야성을 잃지 않았던 사람입니다.
골리앗과의 싸움에서도 그의 야성을 유감없이 발휘했습니다.
전쟁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즉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능히 이길 수 있다는 믿음이 있었습니다.(삼상 17:48)
사람이 안일에 빠지게 되면
고난이 찾아 다가옵니다.
더 큰 문제가 되는 것은 배부르고 등 따숩고
아무 문제가 없는 것처럼 느낄 때가 가장 위험한 때입니다.
조지 바너가 지적한 것처럼 주전자 속의 개구리가
물이 점점 뜨거워지는 데도 알지 못하고
잠이 들어 있다가 죽어가는 것과 같습니다.
라오디게아 교회가 영적으로 병들어
죽어가면서도 병들은 줄 모르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세상에 어둠의 영과 싸워야 할
십자가의 군병들 입니다.
싸울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군인은
군인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적을 두려워하는 자는 결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영성에 야성을 키워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멘토가 중요합니다.
멘토 란 인생의 지혜와 신뢰로 이끌어 주는
조언자를 말합니다.
저의 목회 가운데 좋은 신앙의 멘토가 있습니다.
늘 4가지를 말씀하셨습니다.
(1) 철저한 사명감을 확인하라.
(2) 철저하게 성경말씀만 전해야 한다.
(3)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4) 설교를 할 때마다 마지막이라는 종말적 의식을 갖고
생명을 걸고 설교하라고 권면하시던
그 목사님이 목회의 멘토였습니다.
새벽기도 한번 빠지면 너 같은 게 무슨 목회를 하겠느냐며
무섭게 책망할 때는 눈물이 쑥 빠지게 호통하기도 했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저의 신앙과 사명을
불붙여 주신 멘토였음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가 인생을 살면서 좋은 멘토를 만나는 것이 중요합니다.
좋은 멘토를 만나면 좋은 사람이 만들어집니다.
그러나 좋지 않은 멘토를 만나면 실패한 인생이 됩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처음 믿을 때 믿음이 좋은 사람 만나면
좋은 신앙을 배웁니다.
그러나 처음부터 적당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
주일도 바쁘면 빠지고, 십일조도 적당하게 드리고,
그런 사람을 만나면 그런 신앙을 배우게 됩니다.
그래서 처음에 좋은 신앙의 멘토를
만나는 것은 큰 축복입니다.
오늘 본문에 좋은 멘토 한 사람,
히스기야를 소개합니다.
그는 25세에 왕이 되어서 29년 동안
통치를 잘 한 왕입니다.
젊은 나이에 왕이 되어 나라를 잘 섬기려고 고민하며
조상들 중에 어떤 왕이 정치를 잘했나를 알아보니
다윗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는 다윗 왕을 멘토로 삼았습니다.
특히, 하나님 편에서 종교개혁을 단행했고,
그 시대에 우상을 때려 부셨으며,
오직 하나님만 전적으로 의지한 왕이었습니다.
“히스기야가 그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였다”고 소개합니다. (3절)
다윗 왕이 걸어간 길을
히스기야도 걸어가려고 힘썼습니다.
히스기야는 영성과 야성이 강한 다윗을 신앙의 멘토로 삼았고
왕이 되자마자 산당을 부숴버리고 목상을 찍어내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그리고 철저하게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이런 히스기야와 하나님이 함께 하셨고,
가는 길을 형통하게 인도하셨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크게
두 가지를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사는 것과,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히스기야를 본받아
신앙의 멘토로 삼고자 합니다.
오늘 말씀은 하나님이 히스기야 왕을
칭찬하시면서 축복하는 내용입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한 사람이었고,
하나님을 의지하였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한 계명을
다 지킨 믿음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저와 함께 계시매
어디로 가든지 그 길이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하였습니다.(7절)
히스기야는 하나님 마음에 든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면 하나님 관점에서 볼 때
히스기야는 어떤 사람이었을까요?
1. 히스기야는 하나님이 보시기에
정직한 사람이었습니다. (3절)
히스기야가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행위와 같이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3)
1) 하나님은 완전한 사람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흠과 티가 없기 때문에 쓰신 것이 아닙니다.
허물과 실수와 부족한 것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 존귀하게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정직한 사람입니다.
다윗은 범죄 후에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 앞에서 쫒아내지 마시며
주의 성령을 내게서 거두지 마소서.
정직하게 기도했습니다.(시 51:10-11)
세리와 바리새인의 기도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세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고개를 들지 못하고 나는 죄인입니다.
허물이 많습니다. 용서해 달라고 고백할 때에
주님은 그의 기도를 들으셨습니다.
그런데 바리새인들은 따로 서서 손을 들고,
오~ 하나님 우리는 주일도 잘 지킵니다.
십일조도 잘 드리고 세리들 같이 죄도 짓지 않았습니다.
자기 의를 드러낼 때 주님은 이런 기도에
관심이 없었고 듣지도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자기 기준에서 의롭게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의 관점에서 볼 때 그것은 위선이었습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에게 정직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보는가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시는가는 더 중요합니다.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 앞에 민감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중심’을 보시고, ‘나의 말’을 들으시고,
‘나의 행동’을 보신다는 코람데오의 신앙,
즉 하나님 앞에서의 삶이 중요합니다.
실수가 있고 허물이 많을지라도,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게 돌아올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을 버리지 않고 귀하게 사용하십니다.
다윗이 그러했고, 베드로가 그러했습니다.
특히 우리는 정직한 마음으로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마음은 하나님과 주님과
성령이 거하는 전이라고 했습니다.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지만 나무의 뿌리와 같습니다.
뿌리가 튼튼해야 좋은 열매를 맺듯이
마음이 건강하고 깨끗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성경에 쓰임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한결같이
하나님 보시기에 마음이 정직했습니다.
중심이 바로 된 사람들이었습니다.
“나의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사람의 중심을 보느니라.”
고 하셨습니다.(삼상 16:7)
하나님은 이스라엘 2대왕을 뽑을 때
기준을 중심에 두셨습니다.
이새의 여덟 아들 가운데 일곱 번째까지 데려왔으나
내가 찾는 자가 아니라고 거절하셨습니다.
여덟 번째 다윗을 데려왔을 때,
“내가 찾는 자가 그니라. 그에게 기름 부어서
왕으로 삼으라.”고 하셨습니다.(삼상 16:12)
사실 다윗은 허물도 실수도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중심이 바로 된 것을 보시고
왕으로 세우셨습니다.
거짓은 마귀가 사용하는 가장 큰 무기입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사사로운 일에도 거짓말을 너무 잘합니다.
몇 시간 있으면 들통날 일을 거짓말 합니다.
부부간에도 거짓말을 잘하니까 남편을 믿지 않고
아내를 믿지 않습니다. 마귀에게 속는 일입니다.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는 여호와께서 미워하시는 것이요,
속이는 저울은 좋지 못한 것이니라고 했습니다.(잠 20:23)
한결같지 않은 저울추 란
저울 눈금을 속인다는 말입니다.
즉 장사하면서 속임수로 하는 것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이것을 미워하신다고 했습니다.
실수가 많아도 괜찮습니다. 허물이 있어도 괜찮습니다.
정직하게 하나님 앞에 나오면
모든 것이 용서가 되고 하나님의 사랑받는 사람이 됩니다.
하나님은 히스기야를 향해
정직한 사람이라고 칭찬하셨습니다.
오늘 예배를 드리며
정직하게 살기를 작정하며 기도하시길 축복합니다.
예배를 드려도 정직하게 드려야
하나님이 받으셨습니다.
성경에는 드리나마나 한 제사도 있었고(사 1장),
드리고도 화를 입은 제사도 있었습니다(말 1장)
오늘도 하나님이 받으시는
신령과 중심으로 예배를 드리길 원합니다.
정직한 기도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거짓된 기도는 마귀가 듣습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기도를 보세요.
위선적이고 형식적인 바리세인 기도에는
관심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나는 죄인이라고 고백하며
감히 하늘을 우러러 볼 수 없노라고 고백할 때
주님은 이런 기도에 귀를 기울이셨습니다.
헌금도 정직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리차드 포스트는 그리스도인은
두 가지가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영적으로 거듭나야 하고 또 하나는
돈주머니가 거듭나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의 돈에 대한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 대한 태도를 알 수 있습니다.
돈은 영성의 척도가 된다고도 했습니다.
하나님 앞에 예물 드리는 것을 인색하게 줄이려고 하지 말고
많이 드릴 수 있길 기도하세요.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출발점이 됩니다.
우리는 무엇을 얼마만큼 드리느냐 보다
드리는 마음이 더 중요함을 깨달아야 합니다.
정직한 예배, 정직한 기도, 정직한 헌금을 드리세요.
하나님이 정직한 것을 받으시고 축복하십니다.
2. 히스기야는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히스기야가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의지하였는데
그의 전후 유다 여러 왕 중에 그러한 자가 없었으니”(5절)
전에 지나간 왕들이나 앞으로 있을 유다 왕들 중에도
히스기야 처럼 하나님을 의지한 왕이 없었다는 말씀입니다.
1) 의지한다는 말은 '확신한다. 신뢰한다.'는 뜻입니다.
히스기야는 왕의 권력이나 사람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군사력을 의지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습니다.
이것이 형통해지는 비결이었고 승리하는 비결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에 담대해집니다.
히스기야는 담대하게 그 당시에 스물다섯 살에
왕이 되어서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왕이 되자마자 그 산당을 때려 부셨고
주상목상을 찍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우상들을 모조리 쓸어버렸습니다.
이런 담대함이 하나님을
의지하는데서 부터 나왔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가 문제가 아니고, 미사일, 핵보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이 없어졌습니다.
예수님의 권세도 능력도 다 없어졌습니다.
믿는 자들에게 따르는 표적도 사라졌습니다.(막 16:17-18)
성령의 역사가 없어졌습니다.
성령의 은사와 열매를 들을 수 없습니다.
(롬 12:6-8, 고전 12:4-11, 갈 5:22-23)
초대교회와 같은 사도행전적 역사가 잠식되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손이 짧아 구원하지 못하심도 아니요,
귀가 둔하여 듣지 못하심도 아니라.
오직 너희 죄악이 너희와 너희 하나님 사이를
갈라놓았다고 했습니다.(사 59:1-2)
하나님 밖에 두려울 것이 없고, 죄가 부끄러워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밖에 자랑할 것이 없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이 아닌
인간의 수단 방법을 회개해야 합니다.
예수 십자가 보혈의 능력이 아닌
맘몬신학 사상을 회개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의지할 때 담대해 집니다.
2) 우상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4절)
히스기야는 왕이 되어서 제일 먼저
우상을 타파하는 종교개혁을 단행했습니다.
보이는 우상도 있지만 보이지 않는 우상도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입니까?
하나님보다 더 관심을 갖는 것, 하나님보다 더 앞에 있는 것,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 하나님을
밀어내는 모든 것들이 우리의 우상입니다.
때로는 돈이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자식이 우상이 될 때가 있고
높은 사회적 지위가 우상이 될 때가 있습니다.
우상은 하나님이 가장 싫어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없어야 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삶입니다.
3)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옵니다.
성도의 가장 큰 힘은,
하나님을 의지하는 데서 오는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을 의지하고 종교개혁을 단행할 때
하나님이 축복하셨습니다.
자녀들에게 많은 유산을 물려주지 못할지언정,
하나님 없이는 살 수 없노라고 하는
신앙을 유산으로 물려줘야 됩니다.
이게 신앙의 가문입니다.
하나님은 다윗 왕 이후로 남북 왕조를 통틀어서
가장 위대하고 탁월한 지도자로
히스기야를 평가하고 있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유혹 많은 시대에
적당히 타협하고 적당히 신앙이 넘어가기 쉬운 이런 시대일수록
더욱 하나님을 의지하고 사시길 축복합니다.
3. 히스기야는 하나님의 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그에게서 떠나지 아니하고
여호와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을 지켰더라.(6절)
1) 계명은 곧 하나님 말씀입니다.
사실 이전에 왕들은 하나님의 계명을 제대로 지키지 않으므로
버림받은 왕들이 많았습니다.
교통법규를 지키는 것은 상대방을 위해서도 지키는 것이지만
사실은 자기의 안전을 위해서 지키는 것입니다.
나라에 법을 잘 지키면 자신이 보호를 받는 것입니다.
법이란 잘 지키는 사람을 보호해주기 위한 것이고
안 지키는 사람을 벌을 주기 위한 것입니다.
히스기야는 여호와의 계명을 철저히 지켰습니다.
히스기야의 생애를 보면
모두가 하나님의 사랑받을 짓을 했습니다.
하나님 보시기에 정직하고, 하나님만 의지하고,
우상을 때려 부수고,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켰습니다.
이런 히스기야를 축복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도 복을 달라고만 하지 말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사랑하세요.
복을 섬기지 말고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잘 섬기기를 바랍니다.
그가 여호와께 연합하여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고
모세에게 명령했던 계명들을 다 지켰다고 했습니다.(6절)
여러분도 무엇을 하던지
하나님과 연합하시길 바랍니다.
연합한다는 말은 하나님과 함께 했다는 말입니다.
나 혼자는 약하여 넘어지고 찢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의지하는 것이 힘의 근원이요,
복 받는 비결입니다.
여러분도 히스기야처럼 하나님만 의지하고,
하나님과 연합하시길 축복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정직할 때 신앙의 야성이 회복됩니다.(4절)
정직하게 살면 담대해 집니다. 떳떳하기 때문입니다.
히스기야는 하나님 앞에 정직하게 살았기 때문에
과감하게 그 시대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에
산당을 부수고, 주상을 깨트리고, 아세라 목상을 찍어
과감하게 우상을 제거했습니다.
강한 신앙의 야성이 생기는 것입니다.
정직하게 살 때 세상에
영향력 있는 그리스도인이 됩니다.
반면에 거짓되게 살면
늘 불안하고 자신감이 없어집니다.
여호와 앞에 정직한
히스기야의 야성을 본받기를 바랍니다.
앗수르왕 산헤립 때문에 내게 기도하는 것을
내가 들었노라 기도할 때 능력이 나타납니다.(왕하 19:20)
그 밤은 기도하는 밤이었습니다.
앗수르 군대와의 싸움에 힘 한번 쓰지 않았는데
그 밤에 여호와의 사자가 나타나
다 송장이 되었습니다.(왕하 19:35)
하나님은 이런 히스기야에게
두 가지를 축복하셨습니다.(7절)
1) 하나님이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보다
더 큰 은혜가 어디 있습니까?
이것이 임마누엘의 신앙입니다.
2)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였습니다.
형통이란 막힘이 없는 삶을 의미합니다.
은혜가 막히지 않고, 기도가 응답되며,
축복의 통로가 열려야 합니다.
세상에는 예상치 못한 장애물이
복병처럼 도사리고 있습니다.
여러분도 히스기야처럼 신앙의 야성을 키워서
예수 이름으로 원수마귀 물리치고 승리하시길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