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 내가 평안히 눕고 자기도 하리니 나를 안전히 살게 하시는 이는 오직 여호와이시니이다. - You have given me greater joy than those who have abundant harvests of grain and wine. I will lie down in peace and sleep, for you alone, O LORD, will keep me safe.” (시편 4: 7-8)
다윗이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기도의 노래이다. 그는 이 기도 가운데서 인생들에게 권면하는 말도 함께 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다른 사람에게 권면하는 말이라기보다는 흔들리는 자신을 견고히 다지는 말로 들린다. 바로 직전 시편 3편에서는 다윗이 아들 압살롬의 위해를 피하면서 지은 시가 있다. 자기를 치고자 하는 대적이 너무 많다고 호소하며 자신을 안보하여 주실 것을 기도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다윗이 정말 참 기쁨을 누리면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그들의 곡식과 새 포도주가 풍성할 때보다 더하니이다.”라고 고백 했을까하는 의구심이 생긴다. 사울왕을 피해 다니며 겪은 수많은 고관도 모자라 이제는 자기 자식으로부터 적대시를 당하는 불행을 겪고 있는 그로서는 너무도 참담하여 한숨 없는 날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면서도 다윗은 “천만인이 나를 에워싸 진 친다 하여도 나는 두려워하지 아니하리이다.”라고 시편 3편에서 고백한다. 이 고백 또한 실제로 그런 두려움이 없어서가 아니라 믿음 안에서 그렇게 담대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간절한 소원을 고백에 담아 기도한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나의 부정적 생각 때문일까?
이 시편을 읽으며 나의 마음에다 정직한 답을 요하는 질문을 던졌다. “너는 주님 안에서만이 가질 수 있는 참 기쁨을 소유하고 있는가? 소유하였던 적이 있었는가?”하는 질문이다. 나의 믿음 생활의 지나온 날을 돌아보며 솔직한 정의를 내리면 믿음 안에서 살아 왔다고 말은 하지만 참 안도하고 기뻐하며 다가올 미래에 대해 담대함을 갖고 지낸 적은 매우 희소하였다는 것이다. 말씀이 제시하시는 어떤 수준의 삶에 도달하기 위한 끊임없는 추구, 그러나 늘 못 미치는 현실로 인해 주님 앞에서 부끄럽고 송구한 마음을 씻을 수 없었던 삶이었다. 한편으로는 상존하는 사탄의 유혹과 공격, 그로인해 넘어질 때도 많았고, 실패와 배신의 결과로 땅을 치는 통곡의 기도를 드린 적도 여러 번이다. 부끄럽기도 하고 한심하기도 하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지금까지 말로는 주님 안에서 기뻐한다고 하고 평안을 누리며 감사하며 살고 있다고 하였지만 실제로는 참 기쁨을 가지지 못하였다. 내가 허점을 보이면 바로 공격할 태세를 갖추고 기회를 엿보는 무언가가 항상 에워싸 진치고 있다는 분위기를 느끼기에 안도하거나 기쁨을 누릴 수 없었다.
이를 좋게 보면 경계심을 늘 가지고서 대비하는 믿음의 자세라고 할 수 있으나 달리 보면 염려와 걱정이 오히려 믿음을 덮어 열매가 열릴 틈을 주지 못하는 처지, 즉 복음서 중 씨뿌리는 사람의 비유에서 ‘가시떨기가 있는 땅’과도 같은 것이다. 처참한 사고를 경험한 자가 사고의 장면이 자꾸 떠올라 괴롭힘을 당하는 것처럼 불안의 트라우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다소나마 소망을 가지게 하는 조그마한 징후는 움이 트듯 조금씩 주님 안에서 갖는 평안과 나의 미래에 대하여 믿는 긍정적 생각이다. 주님의 자상한 간섭하심이 내 삶의 여정을 늘 덮고 있다는 믿음이 싹트고 있고, 그로 인하여 언젠가 경험한 적이 있는 안도와 기쁨과 담대함을 오랜만에 다시 느끼게 된 것이다. 그렇지만 왜 나는 믿는 자로서 그동안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평안과 기쁨을 누리지 못하고 살아왔는가 하는 것이 의문이다. 소망의 싹이 보이기 시작한 요즘과 참 기쁨과 안도 속에서 살지 못하였던 시절의 차이가 그 원인을 빨리 만나는 열쇠가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선 제일 먼저 떠오르는 차이점은 말씀을 가까이 하며 살아왔던 것과, 말씀을 가까이 하기보다는 바삐 무언가를 이루어가기 위하여 열심히 일을 하였던 것이 그 차이라는 것이다. 말씀 우선보다도 일 우선이 가져다 준 결과는 일의 실패에 대한 염려와 일의 성과를 목표대로 이루지 못하여 내놓을 것이 없으면 어쩌나 하는 우려였다. 다시 말하면 일의 주체가 주님이 아니고 나였으며, 일의 목적이 주님의 영광이 아니고 나의 계획을 이루는 것이었기 때문에 혼자 염려하며 나 혼자 씨름하고 싸워 온 것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간혹, 혹은 자주 목적을 이루기 위해 필요하면 물론 주님께 도움의 손을 내미는 기도는 하였지만 일의 주인과 주체로서 주님께 구한 것이 아니라 도움을 주시는 능력의 하나님이시기에 구한 것이다.
그러나 말씀 묵상을 일상으로 하는 삶을 통하여 조금씩 신실하신 주님을 피부로 영으로 실감하게 되면서 주님은 내 인생의 주인이시오, 내가 행하는 모든 일의 이유와 목적이 되심을 알게 된 것이다. 일의 이유와 목적이 내 삶의 주님이신 거룩하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리는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되니까 실제로 나의 관점이 달라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달라지고 있는 것의 결과는 만용이 아니라 주님 안에서 믿음의 담대함을 가지게 된 것이요, 긴장이 풀려 가지는 해방감의 안도가 아니라 영적 긴장 속에서도 주님이 간섭하시기에 반드시 최선의 결과를 얻게 될 것이라는 확신으로 안심하는 기쁨을 발견하였다.
중요한 차이는 말씀묵상이요, 지금도 나에게 말씀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주님 곁으로 날마다 다가가 그 말씀을 들으며 말씀의 방향대로 살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