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하박국 3장 16-19절, 누가복음 17장 11-19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복음뉴스 0 2022.11.20 17:10

본문말씀: 합3:16-19, 눅17:11-19 

제   목: 감사로 노래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이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Though the fig tree should not blossom, nor fruit be on the vines, the produce of the olive fail and the fields yields no food,  the flock be cut off from the fold and there be no herd in the stalls, yet I will rejoice the LORD; I will take joy in the God of my salvation. (Hab 3:17-18) 

 

추수 감사주일입니다. 

 

한 해 동안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날입니다. 

 

올해도 코로나 펜데믹 속에 감사절을 또 맞이했습니다. 

 

상실, 슬픔, 고독, 우울, 고통의 어두운 색깔로 채색된 세상입니다. 

 

이런 때에도 우리는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런 때에도 설교자는 ‘범사에 감사하라’ 라고 설교할 수 있어야 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성도들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랍니다.(살전6:18)

 

올해는 영국의 청교도들이 신앙의 자유를 찾아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온 지 402년이 되는 해입니다. 

 

그들의 항해는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코로나상황보다 훨씬 더, 눈물겹도록 절박했습니다. 

 

강풍과 눈보라 치는 혹독한 추위 속에, 질병과 식량부족, 들짐승들의 위협, 거할 집하나 없는 절박한 상황에서 절반 가까운 이들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신앙생활 제대로 하고 싶어서입니다.

청교도들은 신앙의 박해를 피해 영국을 떠났습니다. 

 

메이플라워 항해 일지에 따르면, 그들은 온갖 고통과 어려움 속에서도 감사를 드렸습니다. 

 

플리머스 해변에 도착하던 1620년 12월 26일은 극심한 추위로 얼어붙은 날이었지만 그들은 나무와 바위를 끌어안고 눈물과 환희에 뒤섞인 채 하나님께 감사 찬양을 드렸습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그들은 '감사의 신앙' 으로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청교도들의 '감사의 신앙'의 바탕이 된 구약 하박국 선지자의 이 고백에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에 대한 감사' 가 흐르고 있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하박국 3:17-18). 

 

시편 100편에 청교도인 들이 부르던 찬송시가 있습니다.

 

온 땅이여 여호와께 즐거운 찬송을 부를지어다.(1절)

 

기쁨으로 여호와를 섬기며 노래하면서 그 앞에 나아갈 지어다.

 

여호와가 우리 하나님 이신 줄 너희는 알지어다.(2절)

 

그는 우리를 지으신 이요, 우리는 그의 것이니 그의 백성이요 그의 기르시는 양이로다.(3절)

 

감사함으로 그 문에 들어가며 찬송함으로 그의 궁정에 들어가서 그에게 감사하며 그의 이름을 송축할지어다.(4절)

 

여호와는 선하시니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고 그의 성실하심이 대대에 이르리로다.(5절)

 

감동적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같이 출발한 동려들이 추위와 질병으로 죽어가지만 하나님을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과 섭리 안에 있는 양으로서 감사드렸습니다.

 

그 신앙의 바탕아래 오늘의 미국이란 나라가 세워졌습니다.

 

청교도들의 신앙을 바탕으로 한 든든한 반석위에 하나님께서 U.S.A (United States America ) 를 세웠습니다. 

 

그래서 미국 사람들은 항상 탱큐 (Thank)하고 감사의 인사를 합니다.

 

성경의 감사는 단순히 받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가 아닙니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 하리이다.'(시118:28). 

 

주님이 '나의' 하나님이신 것 자체가 감사입니다. 

 

그래서 많은 시편기자들이 '하나님의 이름' 에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의인이여 너희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그의 거룩한 이름에 감사 할지어다.'(시97:12, 시44:8, 106:47, 30:4). 

 

또 우리가 '주의 백성이요 주의 목장의 양이니, 우리는 영원히 주께 감사하자‘ (시79:13)고 말합니다. 

 

‘주께서 내게 응답하시고 나의 구원이 되셨으니’(시편118:21) 감사하자고 노래합니다. 

 

여호와께 감사하는 이유는 ‘그는 선하시며 그의 인자하심이 영원하기’ 때문입니다.(시100:5, 106:1, 107:1, 118:1, 118:29). 

 

유명한 시편 136편에는 무려 26번이나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라는 후렴구가 나옵니다.

 

구약성서에는 세 가지의 화목제(peace offering) 가 나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기쁨과 행복의 제사가 화목제인데, 

 

첫째는 감사제(感謝祭, thanks offering )로 이미 주신 것에 대한 감사입니다. 

 

둘째는 서원제(誓願祭, votive offering)로 앞으로 주실 것을 믿고 미리 드리는 감사합니다. 

 

그리고 셋째는 낙헌제(樂獻祭, freewill offering,)로 자원제로 기쁜 마음으로 자원해서 드리는 감사입니다. 

 

낙헌제는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입니다. 

 

처음엔 조건을 바꿔달라고 기도하지만, 신앙이 깊어지면 조건을 뛰어넘는 감사가 일어납니다. 

 

시편기자는 "내가 낙헌제로 주께 제사 하리이다. 여호와여 주의 이름에 감사하오니 주의 이름이 선하심이니이다."(시54:6)라고 했습니다. 

 

주의 이름에 감사하는 이 감사가 성경의 감사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청교도들도 이 감사의 신앙으로 고난을 이겼습니다. 

 

이것이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라는 하박국의 신앙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바벨론이 쳐들어온다는 소리를 듣고 창자가 흔들렸고 입술이 떨렸다고 했습니다.(합3:16)

 

더 비참한 것은 이들을 막을 힘이 없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습니다.

 

그는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고, 포도나무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하나님께 감사드립니다.(합3:17)

 

더 큰 복은 17절 마지막 접속사 ‘없을지라도’ 입니다.

 

우리말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입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라,’ 고백했습니다.(19절)

 

다윗도 ‘나의 힘이 되신 여호와여 내가 주님을 사랑하나이다.’(시18:1)

 

우리의 힘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잘 넘어지고 쓰러집니다.

 

그러나 세상 창조자요, 전능하신 하나님의 힘은 영원합니다.

 

우리나라 '감사송' 이라는 복음성가에 나타난 감사의 신앙입니다. 

 

‘그래서 감사, 그래도 감사, 그러나 감사, 그러므로 감사, 그렇지만 감사, 그럼에도 감사, 그러니까 감사, 아주 그냥 감사, 그리 하실지라도 감사,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감사, 그럼에도 불구하고 감사, 이래도 저래도 감사, 매일매일 감사, 항상 감사, 쉬지 말고 감사, 범사에 감사.’

 

저는 ‘평생감사’ 라는 이름으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 시대는 이러한 감사의 마음, 감사의 신앙을 잃어버린 시대입니다. 

 

일찍이 사도 바울도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스스로 지혜 있다 하는 자들이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다‘(롬1:21)고 한탄한 적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7장에는 한센병 환자 열 명이 예수께 고침을 받았으나 그중 오직 한 명만 예수께 돌아와 감사했다는 기사가 나옵니다. 

 

예수께서는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 하였느냐?(눅17:17)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고 한탄하시며 돌아와 감사한 그 한 사람에게만 "네 믿음이 너를 구원 하였느니라"(눅17:19)고 선포하셨습니다. 

 

무슨 의미입니까? 

 

다시 말하면 이 한 사람에게만 완전한 치료가 이루어졌습니다.

 

아홉은 육신의 치료는 받았지만, 한사람은 육신의 치료 뿐 아니라, 영혼도 구원을 받았다는 말씀입니다 

 

감사하는 한사람에게만 육신의 병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구원 약속이 주어졌습니다. 

 

예수께서는 '네 감사가 너를 구원하였다' 하지 않으셨습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하셨습니다.(19절) 

 

즉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이 곧 믿음이요, 그 믿음으로 구원이 주어졌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감사와 믿음과 구원은 ‘하나’ 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감사는 깊은 신앙적 행위입니다. 

 

사람들은 당연하게 여기는 것에는, 별로 감사한 마음이 들지 않습니다. 

 

살면서 감사라는 말에 인색한 사람들을 종종 보는데, 그들의 공통점은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들을 당연한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은 그것들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여기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자신의 것이라고 여기는 것들이 사실은 '주어진' 것들이라는 깨달음에서 감사가 우러나옵니다. 

 

시편 50편은 이렇게 노래합니다.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시편 50:14, 23). 

 

인간은 벌거벗고 세상에 왔다가 벌거숭이로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살면서 누리는 것은 모두 '주어진' 것들 입니다. 

 

그는 자신에게 베풀어진 것들의 일부를 바칩니다. 

 

그러므로 그는 감사의 제사를 통해 겸허히 자신의 유한함을, 자신의 일시성을 시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는 그 본질이 종교적입니다.

 

엣 앵글로 색슨 영어에서 ‘thankful’(감사가 넘치다) 이라는 말은 ‘thinkful’ (생각이 깊다)의 뜻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이는 깊이 생각하면, 감사가 넘칠 수밖에 없다는 말씀입니다. 

 

조금만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나의 이 생명이, 오늘 이 하루가 당연합니까? 

 

여기까지 나 혼자의 힘으로 왔습니까? 

 

내가 누리는 것들이 다 나의 성취입니까? 

 

아마도 인간의 품위를 가장 떨어뜨리는 것은 감사를 모르는 것입니다. 

 

동물도 고마움을 알고 표현합니다. 

 

예수께 돌아와 감사를 표한 그 사마리아인 한센병 환자의 이야기가 말해주는 진리는 감사가 우리를 구원하며 인간을 더 높고 품위 있는 존재로 만든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예수께서 물으셨습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고침을 받고 그냥 제 길로 간 그 아홉 중 하나입니까? 

 

아니면 돌아와 감사함으로 구원의 축복까지 받은 그 한 사람입니까?

 

부천서 목회하는 친구, 박인걸 목사의 기도 시입니다.

 

제 목: 주님! 감사합니다. 

 

 한 쌍의 비둘기처럼 오래된 둥지에서 아내와 함께  

 오순도순 살아온 날을 감사합니다. 

 

뒷바라지 힘들어도 현관에 뒹구는 자식들 신발 을 보면 마음으로 기댈 수 있어 감사드립니다. 

 

 아침마다 깨어날 때면 아직도 내 심장이 뛰고 있고 푸른 하늘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합니다. 

 

 서로 아껴주는 아름다운 마음을 가진 이웃들과 언제나 함께 있어 감사합니다. 

 

 햇곡 밥을 지어 푸성귀 반찬을 얹어 먹을 때마다 풍성한 양식에 감사드립니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와 주님의 목숨과 나를 맞바꾸어  영원한 생명을 주시니 감사합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전도자인 바울은,  입만 열면 ‘감사’ 하라고 권면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한마디로 '감사의 신학' 입니다. 

 

그는 먼저 기도할 때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빌4:4)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절)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4:7) 

 

그는 또 감사하는 말을 하라고 권합니다. 

 

‘그러므로 사랑을 받는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누추함과 어리석은 말이나 희롱의 말이 마땅치 아니하니 오히려 감사하는 말을 하라’(엡5:1-3). 

 

아니 바울은 사람자체가 감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

 

그리스도의 평강이 너희 마음을 주장하게 하라. 너희는 평강을 위하여 한 몸으로 부르심을 받았나니 너희는 또한 감사하는 자가 되라.(골3:15)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 또 무엇을 하든지 말에나 일에나 다 주 예수의 이름으로 하고 그를 힘입어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라"(골3:16-17).

 

그런데 우리는 감사하는 삶을 살고 싶어도 감사의 에너지가 고갈된 것을 느낍니다. 

 

감사는 의무감으로 하는 것이 아니어야 할 텐데, 감사가 넘친 바울의 신앙의 비결은 무엇일까요? 

 

바울은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골2:6-7) 고 말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눈 여겨 보아야 할 것은 주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는 네 가지 권면이 모두 수동태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원문을 직역하면 주 안에 '뿌리를 박히고,' '세워지고,' '믿음에 굳게 섬을 받아,' '감사함이 넘치게 되게 하라' 입니다. 

 

이 모든 일이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이루어진다는 신앙의 표현입니다.

 

더욱 특이한 점은 이 네 가지 중에서 맨 첫 번째 '뿌리를 박히다' 만이 완료형 시제로 되어 있다는 점입니다. 

 

그러니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이미 '뿌리가 박혀 있어야 한다.' 는 것입니다. 

 

그래야 그 결과로 우리의 믿음이 나무처럼 '세워지고,' '굳게 섬을 받고,' 마치 나무에 꽃과 열매가 열리는 것처럼 '감사함이 넘치게 된다.' 는 것입니다.

 

우리는 겉으로 보이는 초목의 아름다움에만 감탄하며, 그 풀과 나무의 생명을 지탱하는 뿌리의 고마움을 잊고 살 때가 많이 있습니다. 

 

하지만 내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것, 보이지 않지만 나를 나로 있게 한 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는 그 은총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왔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우리 삶의 토대가 되어주는 노동을 우리는 '그림자 노동' 이라고 합니다. 

 

어머니와 농부와 노동자들의 노동이 없었다면, 우리는 여기 존재하지 않습니다. 

 

나의 매일 매일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수많은 것들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랑과 헌신과 수고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내 삶의 가지에 맺힌 꽃과 열매에 대한 찬가만이 아니라, 그 꽃과 열매를 맺게 한 뿌리에 찬가를 보내야 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것들에 감사해야 합니다. 

 

오늘은 하나님께 만이 아니고, 고마운 사람을 떠올려 보시고 고맙다고 편지를 쓰거나 전화를 해보십시오.

 

마지막으로 감사는 나눔으로 완성됩니다. 

 

바울은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고전15:10) 

 

하나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다. (고후12:9)고 고백합니다. 

 

바울의 신학은 '은혜의 신학' 입니다. 

 

그렇게 선물처럼 받은 은혜이기에 바울은 그것을 적극적으로 나누라고 권면합니다. 

 

로마에 있는 교회에 편지를 보내면서 바울은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항상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며 손 대접하기를 힘쓰라"(롬12:12-13)고 말합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의 가정에는 양초와 담요 그리고 마른 빵 세 가지가 항상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왜냐하면, 언제 나그네가 지나 가다가 도움을 요청할지 모르기 때문이었다고 합니다. 

 

나그네가 문을 두드리면 그를 맞이하기 위해 양초가 필요했고, 그가 굶주렸을 테니 신속히 마른 빵을 준비했다가 제공해야 했고, 그가 잠을 잘 때 덮을 수 있도록 담요를 준비해야 했습니다. 

 

이 세 가지가 초기 모든 기독교 가정의 필수품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렇게 철저히 바울의, 은혜의 신학과 감사의 신앙을 나눔과 환대로 실천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바로 신앙의 힘으로 모진 박해 속에서도 서구 문명의 중심신앙으로 깊이 뿌리를 내렸습니다. 

 

사도 바울은 너 하나님의 사람들아...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고 너그러운 자가 되라. (딤전6:17-18)

 

이것이...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딤전4:19). 

 

나눔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제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로 말미암아 항상 찬송의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자. 오직 선을 행함과 서로 나누어 주기를 잊지 말라. 하나님은 이 같은 제사를 기뻐하시느니라."(히13:15-16).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지 말라.“(마6:25)

 

공중의 새를 보라, 심지도 않고 거두지도 않고 창고에 모아들이지도 아니하되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기르시나니 너희는 이것들보다 귀하지 아니하냐, (26절)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 하고, 길쌈도 아니 하느니라. (28절)

 

그러나 솔로몬의 모든 영광으로도 입은 것이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 (29절)

 

‘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져지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믿음이 작은 자들아‘(마6:25-34)

 

우리는 추수감사의 의미를 다시 한번 생각해 봐야 합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8에 ‘범사에 감사하라.’ 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뜻이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와 연결되지 않으면 범사에 감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십자가 은혜 안에 들어온 신자들은 그 구원의 경륜을 정확히 알고 그분의 거룩한 통치를 지금 받고 있기에 범사에 감사할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첫째 의미가 무엇입니까? 

 

쉽게 비유하자면, 사형 집행일이 확정된 사형수를 아무 이유와 근거도 없이 완전하게 사면 석방시킨 것입니다. 

 

또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왕의 자녀로 중용한 것입니다.

 

그 후의 인생은 당연히 덤으로 사는 것입니다. 

 

왕에게 목숨의 빚진 자이므로 범사에 왕에게 감사해야 합니다. 

 

그것으로 그치지 않고, 왕의 자녀, 하나님의 자녀로 세워 졌기에,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아야합니다. 

 

그런 일을 하고 있기에 항상 기뻐할 수 있으며, 그 일을 더욱 성실히 행하기 위해서 쉬지 말고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감사절도 풍성한 현실적 수확에 대한 감사뿐 아니라, 십자가 안에 있는 복음으로 옮겨져야 합니다. 

 

그래서 복음적 삶의 풍요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자녀로서 문제와 고난을 없애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추수에 대한 감사만 하자면 엄격히 말해 교회에서 구태여 추수감사절을 절기로 지낼 필요도 없다는 것입니다.

 

잘 생각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십자가 없는 추수 감사절은, 어느 세대 어느 민족에게나 항상 있어왔습니다. 

 

한국에 기독교가 도래하기 전부터 추석이 있었듯이 말입니다. 

 

그러나 예수 십자가가 있는 추수감사절은 1621년 현실적 축복이 아닌 예수 십자가 생명 안에서 영혼에 기쁨의 열매를 맺은 사실만으로 피와 눈물을 제단에 쏟은 그 때가 처음이었습니다.

 

먹고 마시는 것들은 하나님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공짜로 주시는 일반 은총입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하나님께 감사할 이유와 근거는 차고도 넘칩니다. 

 

신자는 세상에서 만왕의 왕이신 하나님의 자녀로 부름 받은 특별은총을 입었습니다. 

 

예수님이 가신 길을 따라가면서 그분이 보이신 사랑을 세상에 실현해야만 합니다.

 

추수 감사절에서 감사의 본질, 예수십자가 복음을 놓치는 그런 신앙에 아쉬움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아무리 풍요하고 형통해도 예수가 없다면, 죽은 신앙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엄청난 고난 중에 있으며 전혀 호전될 기미가 없고 더 큰 고난이 겹쳐서 죽음과 방불할지라도 예수 십자가 안에 있다면 너무나 기쁘고 감사하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어느 노인의 빵 한 조각을 놓고 감사기도 하는 성화를 아시나요?

 

그 노인은 행상을 하는 길에 식사 때가 되어, 물 한 대접에 빵 한 조각 놓고 간절히 감사 기도하는 모습을 보고 찍었는데 그 따님이 그를 그려서 유명한 성화가 된 사진입니다.

 

'감사의 신앙' 이 위기 극복의 열쇠입니다. 

 

사람은 감사를 느끼는 순간부터 행복해 진다고 합니다.

 

감사할 줄 아는 신앙은 성숙한 신앙입니다.

 

감사할 조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상황 속에서 찬송을 부르며 감사를 고백했던 선지자가 하박국입니다.

 

고난 중에 드리는 하박국 선지자의 감사기도를 통해 성숙한 신앙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상실과 우울과 슬픔과 고독과 고통의 이 코로나 대 유행시대에서도 감사의 노래를 부를 수 있어야 합니다.  

 

117일간의 긴 항해, 굶주림과 질병의 위협, 동료들의 죽음 가운데서도 시편 100편을 부른, 청교도들의 그 감사의 찬양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찬양이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과 선하심과 인자하심에 감사하십시오. 

 

겸손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십시오. 

 

그 감사의 예배가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웃과 나누는 감사의 제사를 기뻐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그 나눔의 제사가 우리를 구원하고 세상을 치유할 것입니다. 

 

예수께서 물으십니다.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여러분은 잃어버린 그 아홉이 되지 말고 돌아와 감사함으로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라는 주님의 축복을 받는 그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감사는 곧 믿음입니다. 

 

그 믿음이 그 감사의 신앙이 오늘 우리를 구원할 것입니다. 

 

한해의 결산이 감사를 회복하는 추수감사절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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