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고린도전서 15장 1-11절 말씀 묵상 [김동권 목사]

복음뉴스 0 2022.06.03 08:17

 

제목 :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

본문 : 고전 15:1-11

 

패러다임이라는 말은 개인들이 사고나 체계에 대한 틀을 갖는 겁니다 .가정 환경에 의해서 만들어 집니다. 경험을 통해서 틀을 갖춥니다. 배움을 통해서 틀이 형성 됩니다. 나름대로 자신들만의 틀을 갖고 삽니다. 그 틀 속에서 모든 걸 해석 합니다. 좋다 나쁘다. 별로다. 이런 건 믿음 없는 선택이다. 저렇게 해서는 안된다. 라는 자기 틀 속에서 함부로 해석하고 판단해 버립니다. 때론 자신들만의 틀로 함부로 평가하고 결정하다보면 실수 할때도 많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매사에 신중해야 합니다.  

 

또한 많은 경우에 익숙해져 있던 틀이 무너질 때가 있습니다. 어떤 충격이나 신앙의 경험이 틀을 무너지게 합니다. 그리고 새로운 틀을 마련하는 계기가 됩니다 . 종종 내가 너무 몰랐다. 내가 너무 좁았다. 내가 너무 어리석었다 라는 답변을 통해서 자신이 그동안 주장하고 고집했던 틀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깨닫는 고백을 합니다. 

 

신앙적 관점에서 우리는 패러다임을 영성이라는 말로 대치해 볼 수 있습니다. 영성은 성령에 순종하면서 삶을 추구해 가는 자세나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사울의 영성은 하나님과 무관한 자기 생각속에서 살아왔습니다. 자기의 생각에 벗어나면 뭐든지 다 틀렸다는 위험한 판단을 내립니다. 사울이 나중에 신앙 고백을 하면서 자신을 소개 하는데 .. 훼방자, 박해자, 폭행자 라는 단어를 사용 합니다. 그 만큼 자신이 추구했던 패러다임이 얼마나 잘못되었는지 고백합니다. 

 

바울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난 후에 새로운 영성을 형성 합니다.

바로 부활에 뿌리박은 영성입니다.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은 철저한 복음에 입각한 태도 입니다. 

바울은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 이다 라고 말합니다.  복음은 고전 15:3-4절에서 ..성경대로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시고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라고 십자가와 부활을 의미 합니다 .

 

바울은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을 통해서 새로운 것들을 발견합니다.

하나,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은 겸손의 눈을 갖게 합니다.

9절에 보라. ..사도라 칭함 받기를 감당하지 못할 자니라 ..바울은 얼마나 교만 했습니까? 그런데 사울이 자신을 바라보는 눈이 달라졌습니다. 스스로 사도로 칭함받기에 감당할 자격이 없는 사람임을 고백 합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자신에게 사도의 직분을 주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임을 겸손하게 반응합니다. 

 

자기가 생각해 볼 때도 도저히 나 같은 죄인을 불러 주셨다는 것에 감사 합니다 .바울은 죄인 중에 괴수라고 했습니다. 바울은 괴수 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도저히 용서받을 수 없는 자였다고 고백 합니다. 

 

우리들의 삶도 죽을 수 밖에 없는 죄인입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이 우리들에게 새로운 삶을 시작하게 하셨다는 겸손은 굉장히 중요한 고백 입니다. . 

 

둘,복음을 반석삼고 살게 합니다

2절을 굳게 지키고 헛되이 믿지 아니하면 구원을 받으리라

십자가와 부활은 성도의 반석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굳건히 세워진 삶을 살아갈 때에 성숙이 있습니다. 삶은 고난의 연속이라는 말을 합니다. 고난의 때는 피하고 싶은 게 인지상정입니다 .

성도로서 살지만 실패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주님은 결코 실패가 없음을 확신하고 사는 겁니다. 나는 부족하지만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임을 믿고 사는 겁니다. 

 

나는 죽지만 주님은 부활의 권능을 발휘하시는 분임을 믿고 사는 겁니다. 바울은 복음을 반석삼고 담대하게 복음에 입각한 삶을 살았습니다.

 

셋, 부활은 역사적 사실임을 깨닫게 해 줍니다.

5-8절까지 부활하신 주님이 자신을 보여주신 명단입니다. 바울은 만삭되지 못한 자신에게도 나타나셨음을 고백 합니다. 

 

나타난 대상들을 보면 십자가를 믿지 못하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에게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오백여 사람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야고보와 자신에게 보이셨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에게 부활하신 주님을 보여 주셨다는 확신을 갖게 합니다.

 

바울은 부활의 영성을 통해서 자신에게 미친 영향을 언급 합니다. 

하나는, 나는 죽고 예수가 내 안에 산다는 확신입니다. 

바울은 부활을 통해서 내 안에 그리스도가 살아계심을 확신 합니다. 그 동안 내 안에 주인이 자신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는 내 안에 주인이 그리스도이심을 고백 합니다. 이제 이후의 삶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임을 분명히 합니다. 

 

바울은 내 안에 죽은 예수를 살려 냅니다. 내 욕심, 내 생각 , 내 고집 때문에 죽었던 예수를 살려 내고 내가 죽습니다. 내 안에 예수께서 살게 합니다. 나는 죽고 예수로 산다고 고백 합니다. 

 

부활로 인해 잃어버린 하나님의 임재를 회복합니다. 내 안에 계시는 그리스도를 통해서 내 삶을 봅니다. 내 미래를 봅니다. 내 뜻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뜻을 추구 합니다. 신뢰합니다. 

 

둘,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습니다 .

이 말은 세상은 복음을 아주 하찮게 여김을 넌지시 비추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세상이 보기에는 완전히 실패 입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메시아는 헬라인에게는 다 미련한 것이요, 유대인에게는 연약함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 합니다 .불경건한 자들의 비웃음에도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에게 왜 복음이 중요한지, 복음의 능력이 무엇인지 아주 구체적으로 증거 합니다. 

 

바울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소개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자신에게 질문을 합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 하느냐.. 사울이 질문 합니다. 주여 누구시니이까 이르시되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과거의 삶에 대해 속이거나 감출 수 없는 삶이었습니다. 바울의 과거의 삶은 그리스도를 박해하는 박해자 인생을 살았던 자신임을 공포 합니다. 그런 자신을 복음이 새로운 인생을 살도록 구원해 주셨다 라고 고백 합니다 .복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나는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않는다고 고백 합니다. 

 

바울은 복음을 부끄러워 하기 보다는 복음을 자랑합니다. 자신이 복음을 알게 된 것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냅니다 .더 나아가 복음이 미치는 영향에 대해서 언급 합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 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니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라고 고백 합니다.

 

둘째,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을 갖고 사는 삶은 두 가지 면에서 집중하며 삽니다.

행 20:24에 내가 달려갈 길과 주 예수께 받은 사명 곧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는 일을 마치려 함에는 나의 생명조차 조금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노라 고 말합니다. 

 

하나는 복음에 대한 집중입니다.

복음이 지시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복음이 방향입니다. 즉 예수를 방향 삼고 따라 갑니다. 집중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버릴 줄 압니다. 복음에 집중하는 데 방해가 되는 것들은 과감하게 배설물로 간주 합니다. 

 

복음을 방향 삼고 바울은 푯대를 향한 지칠 줄 모르는 전력질주를 즐거워 합니다.

하나님이 지시해 주시는 푯대를 향해 거침없이 질주를 합니다. 적당한 타협을 찾아볼 수 없습니다 

내가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고 바울이 말하는 것을 보십시오.

 

복음이 흔들리면 내 삶이 흔들리게 됩니다. 복음이 균형을 잃어버리면 삶은 뒤죽박죽 될 뿐입니다 .복음에 무너졌던 아담과 하와는 서로간에 책임 전가를 합니다. 하나님앞에 서지 못하고 숨어 사는 존재가 되어 버렸습니다 .

 

또 다른  집중은 증언입니다

증언에 집중 하는 겁니다 .바울은 증언에 집중합니다. 

바울이 증언한 진리는 뭔가요?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증거 합니다. 

바울은 메신저로서 부름을 받고 메세지를 정확하게 증거 합니다. 복음에 전념 합니다 .증언에 집중합니다 

 

팬더믹 시대에 복음에 집중하면서 증언자로서 살아가는 비밀은 ..

하나,예수의 심장을 가져야 합니다 .

심장은 신체의 모든 세포, 조직 및 장기에 혈액을 공급하는 정교한 펌프 역할을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심장을 가졌다고 고백 합니다 .그리스도의 심장은 내 삶 전체를 움직이게 하는 근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삶에 심장이 되어 나를 움직이게 했다고 고백 합니다. 그 길이 고달프고 힘든 길이라 할지라도 명령을 따르는 삶이 즐겁고 기뻤다고 고백 합니다.

바울은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바울이 끝까지 지치지 않고 달려갈 수 있었던 비결도 예수의 심장을 갖고 뛰었기 때문입니다.

 

나는 예수의 심장을 갖고 있는지.. 스스로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

굳은 심장을 갖고는 쉽게 지치고 피곤이 쉽게 몰려 올 뿐입니다. 지금은 강심장을 가질 때입니다. 강심장은 바로 그리스도의 심장을 소유하는 것입니다. 열정이 숨쉬는 예수의 심장을 갖고 팬더믹 시대를 헤쳐 나가야 할 것입니다 .

 

둘, 예수의 흔적을 가져야 합니다 .

바울은 갈 6:17에서 내가 내 몸에 예수의 흔적을 지니고 있노라 고 말합니다. 

사도바울은 예수의 종된 표식(흔적)은 예수 그리스도를 신실하게 따름으로 인해 몸에 얻은 고난의  흔적(상처) 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의 고난의 흔적은 셀 수 없습니다. 

고후 11:23-25(새번역)에 보면 “그들이 그리스도의 일꾼입니까? 내가 정신 나간 사람같이 말합니다마는, 나는 더욱 그렇습니다. 나는 수고도 더 많이 하고, 감옥살이도 더 많이 하고, 매도 더 많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하였습니다. 유대 사람들에게서 마흔에서 하나를 뺀 매를 맞은 것이 다섯 번이요. 채찍으로 맞은 것이 세 번이요, 돌로 맞은 것이 한 번이요, 파선을 당한 것이 세 번이요, 밤낮 꼬박 하루를 망망한 바다를 떠다녔습니다” 라고 고백 합니다. 물론 계속해서 목마름, 추위에 떨고 헐벗음, 강도 만남, 여러번 굵고, 여러 날 동안 자지 못하고..

이런 흔적들이 많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자랑할 것이 있다면 여전히 나의 약함을 자랑한다고 고백 합니다.

 

내 삶에 예수의 흔적의 갯수가 많아지기를 기대 합니다 .

 

셋, 예수의 마음을 품어야 합니다 .

예수의 마음을 품기 위해서는 먼저 내 안의 마음을 청소해야 합니다. 마음을 청결하게 해야 합니다.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세상을 보아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이웃을 보면 시기, 미움, 질투는 다 사라 집니다. 

 

우리 안에 예수의 마음을 품고.. 사람들에게 접근해야 합니다. 맡겨진 일에 다가서야 합니다. 예수의 마음은 나의 행동을 바로 잡아 주실 것입니다. 나로 하여금 진정한 제자로서 삶을 살도록 부추겨 주실 것입니다. 

 

마지막, 부활의 영성을 가지고 미래를 향해 당신만의 달려갈 길을 달려가라 

고전 15:58에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여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팬더믹 이라는 두려운 현실 한복판에서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또 다른 변이가 발생해서 다시 마스크를 써야 할 것이라는 뉴스들이 나돌고 있습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우리가 의지하고 살 수 있는게 하나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팬더믹으로 인해서 살기가 점점 어려워 집니다. 우리에게는 앞으로 예측치 못한 많은 어려움이 다가올 것입니다 . 그런 현실 속에서 룻기에 보면 나오미 가정처럼 흉년이 들자 훌쩍 떠나면 되지 하는 생각을 갖고 삽니다. 성경은 나오미 가정이 흉년이 들자 모압으로 이주 하였다 고 합니다. 흉년이 들었는데 더 흉년이 든 곳인 모압으로 이주합니다. 

 

반면에 흉년이 들었지만 떠나지 않은 무명의 가정들도 많습니다 .흉년의 기간은 대략 10년 정도 됩니다 . 룻 1:4에 “그들은 모압 여자 중에서 그들의 아내를 맞이하였는데 하나의 이름은 오르바요 하나의 이름은 룻이더라 그들이 거기에 거주한지 십 년쯤에” 라고 말씀 합니다.

 

그런데 10년 기근 동안 베들레헴을 떠나지 않고 참고 견뎌 낸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10년의 흉년동안 어떻게 견뎌내었을까요? 분명히 기도하면서 견뎌내었을 것입니다 .얼마나 기도 했을까요 ? 장장 10년입니다.  기도하는 중에 길을 제시하시면 익숙하지 않는 일들을 하면서 참고 견뎌내었을 것입니다. 10년 기다렸더니 마침내 하나님이 하늘 문을 여시고 비를 내려 주셨습니다. 룻기 1:6에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케 하는 현실 한복판에서 우리는 부활의 권능을 입고 살아야 합니다 

엡 2;1,4-7에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를 살리셨고 

고난과 시련은 앞으로 부활을 기다리면서 오늘의 시련을 뚫고 나가는 겁니다 .

 

그리스도의 부활은 우리가 두려움에 처했을 때 무엇에도 비할 수 없는 희망과 확신을 주는 자원이 됩니다 .

엡 2:6에 또 함께 일으키사…일으키사 라는 말은 부활하게 하신다는 의미 입니다. 우리가 힘들어도 끝까지 믿음을 지키는 겁니다. 그 과정이 너무 힘들고 고달프다 할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들의 삶을 부활하게 하실 것입니다 .

 

팬더믹 시대에 상황에 약삭빠른 삶의 선택은 마치 흉년이 들어 모압으로 이적하는 믿음 없는 행동과 같습니다. 끝까지 부활의 소망을 갖고 믿음의 자리를 굳건히 지키는 겁니다. 나에게 주신 길을 따라 믿음을 갖고 따라 가는 삶입니다.

 

부활 이후에 바울은 진정한 믿음이 무엇인지 깨닫습니다 .믿음이란 장소성이라는 의미 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시면 지시하는 대로 그 자리에 가는 겁니다. 그 곳에 서 있는 겁니다. 이게 바로 믿음은 장소성 이라는 의미 입니다.

 

오늘 우리들도 믿음이 장소성이라는 관점에 볼 때에 믿음을 바로 세우고 있는지 점검해 보아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주님 뜻대로 따르겠다고 합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하는 데 몸은 전혀 그 곳에 가 있지 않습니다. 전혀 따름이 없이 말로만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바울에게는 바울이 달려가야 할 길이 있었습니다. 오늘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우리도 각자가 달려가야 할 길이 있습니다. 우리가 달려가야 할 길은 그리스도께서 추구하신 하나님 나라를 위해 달려가는 겁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입었다는 말은 하나님의 꿈을 위해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때로는 힘들고 고통스럽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뜻에 어긋남 없이 살아가는 겁니다 .

 

비록 삶에 패배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부활을 믿는 것은 하나님은 결코 패배 하지 않음을 확신하는 겁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형상을 입은 자로서 삶을 경주하는 자세는 갈 4:19에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라고 고백 합니다.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

 

각자의 삶을 통해서 주어진 길을 향해 믿음의 장소성을 갖고 달려가야 할 것입니다 . 바울처럼 해산의 고통을 감당하겠다는 각오를 가지고 달려가는 겁니다. 

이제는 더 이상 말로만 부활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는 건 비겁한 삶입니다 .

이제는 몸소 삶으로 실천 하며 살아야 합니다. 믿음을 굳게 지키고 힘써 그리스도의 몸을 이뤄 가는 삶의 경주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부활의 권능을 입고 형통케 하는 인생을 만들어야 합니다 

형통이라는 말은 꿰뚫고 나가는 힘이라는 의미입니다. 내 힘으로는 역부족입니다. 하지만 부활의 권능을 믿고 달려가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이 형통케 하실 것입니다 .

 

바울은 부활을 믿고 사는 삶은 현장성이 있어야 함을 보여 주었습니다. 그리스도처럼 십자가의 고난과 아픔을 몸소 실천하는 삶임을 삶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결코 남은 어떻게 하나 곁눈질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은 각자에게 달려갈 고유의 길을 주셨기 때문입니다 .

 

부활하신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베드로를 향해 시몬아.. 라고 부르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베드로야 라고 부르시지 않으시고 시몬이라 부르셨습니다. 부인 한 이후에 새롭게 시작하기를 원하셨던 것입니다 

 

나를 따르라 말씀 하십니다 

그랬더니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입니까? 요 21:21에 이에 베드로가 그를 보고 예수께 여짜오되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 

예수님은 답하지 않고 “ 네게 무슨 상관이냐 너는 나를 따르라 “라고만 말씀 하십니다 

무슨 의미 입니까? 당신도 자신을 남과 비교하지 말라는 겁니다. 요한은 요한이 달려갈 길이 있고, 너는 너가 달려가 길이 있음을 강조합니다. 

주님은 너의 길은 너 만의 것이며 옆 사람의 길과 같지는 않다고 했습니다 .

 

예수님만 바라보며 그분이 당신만을 위해 예비해 두실 길로 경주하는 겁니다.

히 12;12절에 읽어볼까요?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라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우리가 달려가 길은 막막함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현실 입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부활에 뿌리 박은 영성으로 힘차게 달려가는 겁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바톤을 이어 받으려고 준비하고 계십니다. 바울처럼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면류관을 얻는 아름다운 순간을 맞보는 주님의 자녀들 되면  어떨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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