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난 이제 네가 힘들지 않아
본문 : 디모데후서 4:9-18
하나님은 우리를 관계적인 존재로 만드셨다. 우리는 관계 속에서 생활한다. 부부 관계, 부모 관계, 자녀 관계, 직장 관계, 이웃 관계, 성도 관계 속에서 미숙함과 성숙함이 드러난다. 관계는 도움을 주고 도움을 받는 서로의 짐을 지는 관계다. 하지만 말만큼 쉽지 않다. 서로 유익을 주면서 살아야 하는데 어느새 이기적이고 자기 중심적인 생각이 관계를 지배 한다. 조금이라도 손해 본다 싶으면 언제든지 불통한다.
오늘 본문에도 보면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온다. 데마, 누가, 두기고, 알렉산더, 디모데, 등 많은 이름이 등장한다. 한 때는 아름다운 관계 속에서 살았다. 옆에 있는 것만 해도 위로가 되고 큰 힘이 주었던 관계들이다.
그런데 어느날.. 떠나 버린다. 아픔을 준다. 힘들게 한다. 관계가 무너지면 상처를 받는다. 관계가 깨지면 실망이 크다. 정신적 충격이 크다. 극단적 상황으로 치닫게 되면 니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하며 싸움 박질을 한다.
왜 좋았던 관계들이 하루 아침에 처참하게 깨지는가? 이유들은 분명 다양하다. 질투심이다. 남이 잘 되는 꼴을 못 본다. 칭찬이 어려워진다. 박수 칠줄 모른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상당히 부정적이다. 섭섭함이다. 서운하게 했다는 거다. 자신을 무시했다는 거다.
또 다른 이유는 자기 밖에 모르는 너무 계산적이다. 자기를 희생하고 헌신하려고 생각이 없다. 굳이 타인을 위해 에너지 낭비를 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그리고 미움이다. 미움은 경쟁에서 기인한다. 같은 그룹 안에서도 자신보다 남이 높은 평가나 인정을 받으면 미움이 생겨난다. 남을 미워하면 해를 끼친다. 말로 상처를 준다. 온갖 못된 짓을 한다.
노인 바울에게 큰 아픔과 상처를 준 사람들을 보라.
첫 번째 사람이 데마다. 10절에 보면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떠나 버린 인물이다. 데마는 바울과 함께 복음 사역을 했던 동료 일군이었다. 그런데 데마는 세상을 사랑하여 바울을 버렸다고 말한다.
왜 데마는 바울을 떠났을까? 데마는 바울이 감옥에 갇히고 별로 도움이 될 것 같지 않아 방향을 틀어 버렸다. 같은 동역자가 힘들고 곤경에 빠졌다고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훌쩍 떠나 버린 것이다.
거듭난 자라 할지라도 굳건한 믿음이 형성되지 않으면 영적 위기에 무너진다. 데마가 그랬다. 한때는 바울이 잘 나갈때는 협력하였지만 감옥에 갇히고 나서는 생각이 달라졌다. 고난과 어려움에 훌쩍 세상을 향해 돌변하는 것은 쉽다. 염려의 파도가 높을수록 은혜의 깊은 바다를 믿고 살아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언제든지 내가 데마처럼 될 수 있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복음을 의지하고 살아야 할 인생들이 조금 어렵다고 세상을 더 사랑한다면 불쌍한 인생이 될 뿐이다. 힘들고 어려울 수 있다. 그럴때마다 우리의 힘이 되신 여호와를 의지해야 한다.
또 한 사람이 등장하는 데 바로 알렉산더다.
14절에 보면 구리 세공업자 라고 소개한다. 당시에는 알렉산더라는 이름이 굉장히 많았다. 바울은 좀더 구체적으로 구리 세공업자 라고 소개 하고 있다.
알렉산더는 유대인으로서 한 때는 바울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공언했던 인물이다. 그러나 같은 직종에 있던 사람들의 유혹에 넘어가 믿음을 파선한다.
딤전 1;18-19을 보라.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그 가운데 후메내오와 알렉산더가 있으니 내가 사탄에게 내준 것은 그들로 훈계를 받아 신성을 모독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믿음의 파선.. 부숴 졌다는 것이다. 진리를 떠나 세상의 유혹에 믿음이 망가졌다는 의미다. 좋은 가르침에서 멀어져 잘못된 가르침을 따라 살아간다.
은 세공업자들은 당시 손으로 만든 장신구와 동상을 만들어 관광객에게 판매하여 많은 돈을 벌며 활기를 띠었다. 하지만 복음으로 인해서 신상 만드는 일이 얼마나 허구이지 사람들이 깨닫는다. 이렇게 되자 은 세공업자들 입장에서는 판로가 줄어들자.. 바울을 대적한다. 그런 가운데 구리 수공업자인 알렉산더를 유혹해서 바울로부터 멀어지게 한다.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두 가지 면에서 참으로 힘들게 했던 인물이다.
하나가 알렉산더는 바울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다.
14절에 하반절에 보면 내게 해를 많이 입혔으매..자신의 사업이 위축되는 것을 막기 위해 복음을 버린자다. 복음이 돈 때문에 뒷전으로 밀려 버린다.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복음이 안중에 없다.
동종 업자들은 알렉산더에게 얼마나 많은 미끼를 던졌을까? 꾀임에 넘어간 알렉산더는 바울과 바울을 방해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간질을 한다. 그러면서 마침내 본색을 드러내는 일을 한다.
바울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미웠을까? 얼마나 화가날까!
둘은 알렉산더는 15절에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다고 합니다.
특별히 바울이 무슨 큰 범죄 라도 저질러서 험담하는 게 아니다. 뚜렷한 이유 없이 뒤에서 괴롭히는 사람이다.
사람은 늘 바울에 대해서 뒤에서 험담한다. 15절에 그가 우리 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는 말씀을 보면 바울이 말할 때마다 꼬투리를 잡는다. 왜 그렇게 하느냐.. 간섭한다. 적당히 세상과 타협도 하고 하면 다 좋은 게 좋은 거지 뭐 하고 토를 단다. 툭 툭 던지는 말 한마디가 가슴에 비수를 꽂는다. 얼마나 열받을까요? 정말 두들겨패고 싶은 심정이었을 것이다.
이 시대의 알렉산더처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진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서도 세상과 결탁하며 사는 사람이다.
귀가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를 뿐이다. 오늘 날도 이런 달콤한 말에 넘어지는 그리스도인들이 너무나 많다. 세상의 유혹은 끊임없다. 하지만 진정한 동지는 하나님이 알려주신 길을 한 결 같이 걷는 자다.
데마나 알렉산더를 보면서 강렬하게 느끼는 것이 뭔가?
관계의 아름다움은 믿음이 감정보다 앞서야 함을 절실하게 깨닫게 한다.
10절과 14절에 버리고 해를 입히고.. 이런 이유들을 보면 관계는 감정이 믿음 보다 앞설 때에 마귀가 작용 하게 한다.
신앙 생활은 믿음으로 감정을 잘 조절할 줄 알아야 합니다. 믿음으로 감정을 누룰 줄도 알아야 한다.
감정이 믿음을 짓누르게 되면 엉뚱한 생각을 한다.
믿음으로 감정이 북받쳐 오른다고 함부로 말하면 안된다. 행동도 마찬가지다.
믿음이 어떤 상황 속에서도 감정보다 앞서게 하라
예수 믿는 다는 것은 성경 메뉴얼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의 가르쳐주신 레서피 대로 사는 것이다. 예수님을 삶의 원칙으로 삼고 사는 것이다. 그러면 영적 보는 눈이 건강해 진다.
17절에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내가 때론 비아냥 거리는 말, 나를 말로 대적하는 알렉산더에게 휘둘림을 당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주님께 함께 하셔서 내게 힘을 주심으로 감정을 믿음으로 이겨낼 수 있다고 고백 합니다.
둘째, 받은 상처나 아픔은 내가 복수 하려고 하지 말고 주님께 의탁하라.
받은 상처를 복수로 갚지 말고 주님께 위임하라
바울이 다들 떠나고 힘든 시간을 겪을때에 보여준 영적 민첩성을 보라.
14절에 ..주께서 행한 대로 그에게 갚으시리니..
우리는 당한 만큼 갚겠다고 늘 생각한다. 갚는다고 치유되는 게 아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저 반복될 뿐이다. 복수를 하는 행위를 엄밀히 따져보면 결국 자신에게 돌아오는 이익은 아무것도 없다. 도리어 복수를 하면 자신에게 피해가 돌아오는 경우가 훨씬 많다.
바울도 자신을 떠나고 해를 입히고 하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분노가 치밀고 화가 머리 끝까지 날 수 있다. 그런데 바울은 결코 개인적으로 복수하려고 하지 않는다.
바울은 이런 상황에서 디모데에게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니” 라고 쓰면서 디모데에게 주는 영적 조언은 악당을 스스로 벌하지 않고, 복수를 하나님께 맡겨야 함을 시사 한다.
16절 하반절에…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은 자신을 힘들게 한 알렉산더에게 왜 나한테 이렇게까지 못된 짓을 할까 하며 많은 에너지와 시간을 낭비 하지 않는다.
바울은 그 사건에 매여 있지 않는다. 매여 있다 보면 힘이 빠진다. 의욕이 상실 되기 쉽다.
빨리 그 사건에서 벗어나는 상책이다. 떠나 버린 데마 나 마가, 그리고 알렉산더를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화가 치민다. 그러나 그 사건에서 빠져나와 멀리서 그들을 바라보면 그래.. 데마 나 마가 그리고 알렉산더는 “인연은 거기까지야.”. 같이 있는 동안 참 즐거웠지.. 생각한다.
우리 주변에도 이런 케이스들이 많다. 왜 우리들의 관계가 이 지경까지 왔지??
탓할 수 있다. 상대방에게 책임 전가를 할 수 있다. 더불어 내가 뭐 잘못한 게 있나 하는 죄책감에 시달릴 수 있다. 하지만 그 어떤 방법도 깨끗하게 정리가 되기는 쉽지 않다.
제일 좋은 방법은 빨리 그 사건에서 떠나면 정리가 쉬워 진다. 그 사건에 계속 머물게 되면 분통 터지고 화병으로 인해서 본인에게 치명적 결과를 가져화만 치민다. 분노가 쌓여 간다. 미워지고.. 계속해서 입에서 나오는 건 욕 뿐이다.
마지막, 임마누엘로 함께 하시는 주님과 함께 관계를 다시 회복하라
17절을 보라.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심은…
모두가 바울을 떠났다. 버렸다. 바울은 지금 감옥에 갇혀 있다. 얼마나 외롭고 쓸쓸했을까? 그런데 바울은 고백한다. 주께서 내 곁에 서서 나에게 힘을 주셨다고 고백한다.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바울도 넘어질 수 있다.
얼마나 화가 나고 약이 오를까.. 노인을 이렇게 대접하다니..
주님이 함께 하시지 않으면 바울도 마귀가 주는 유혹에 넘어 질 수 있다.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건하게 하여 그를 대적하라."
바울은 주님이 함께 하심으로 나를 강하게 하셨다고 고백한다. 흔들리는 마음을 굳게 잡아 주셨음을 확신한다. 얼마든지 마귀가 주는 인간적인 방법으로 반응할 수 있다. 그렇게 하면 상한 마음을 조금이나마 위로 받을 수 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주님의 관점에서 볼때는 마귀에게 지는 선택일 뿐이다. 그래서 바울은 17절 하반절에 …내가 사자의 입에서 건짐을 받았느니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주시는 마음으로 바울이 보여준 영적 마음밭을 보라.
하나, 남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는다
16절 하반절에 .. 다 나를 버렸으나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않기를 원하노라
바울이 한 때는 속상했던 것 부인할 수 없다. 얄밉고 분통이 터졌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내가 저들이 한 짓을 내가 복수 하겠다는 마음을 버렸다. 오히려 주님께서 해결해 주시기를 원했다.
달라진 바울의 마음 밭을 보라.
11절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바울에게 있어서 마가는 너무 곱게만 자라서 힘들고 어려운 일을 안하려고 하니.. 저리 약해 빠져서 뭐에 써 먹나.. 금수저 출신들을 쉽게 평가해 버렸다. 자신은 고난을 위해서 싸우는데 좀 힘들다고 포기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해가 가지 않았다.
바울은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 받는다.
스스로 겸손하여 타인을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을 배운다. 달라진 바울의 마음은 누가에게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고 간청한다.
둘, 바울 스스로 악한 일을 극복하고 천국에 들어가는 기회를 얻는다
18절에 주께서 나를 모든 악한 일에서 건져내시고 또 그의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시리니..
악한 일은 자신이 받은 상처와 분노에 대한 복수심에 불타는 마음이다.
자신이 인위적인 방식으로 해결하려고 했다면 복수는 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용서하지 못하는 불순종으로 인해서 천국에 들어가지 못했을 것이다.
바울이 데마나 알렉산더를 바라보는 달라진 시선을 보라.
“난 네가 더 이상 힘들지 않아”
바울은 행위에 대한 미움이 앞섰다. 하지만 세월이 지나면서 행위 보다는 그 사람 자체의 가치를 바라본다.
우리는 절대 그 인간은 못써.. 하는 짓을 봐라..’ 용서 보다는 복수심에 불타 올랐다. 이해 보다는 어떻게 저럴 수가 하는 생각이 앞섰다. 자연히 미움과 분노가 머리끝까지 올라갔을때가 많다.
하지만 우리에게도 그 사람 자체에 대한 가치를 부여 할 수 있다면 보는 눈은 달라질 수 있다.
바울은 복수와 원망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는다. 바울은 믿음과 순종으로 끝까지 견딤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린다. 18절 하반절에 "그에게 [주님께]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대림절 기간이다
17절에 ..나에게 힘을 주심은..
이 세상에 다시 오실 예수님은 상처 입은 치유자로 오신다. 우리가 경험한 수 많은 아픔과 상처들을 이미 경험하셨다.
주님은 먼저 상처 입은 치유자이시다
많은 사람들은 한 명을 놓고 비난한다. 상처와 아픔을 주는 말을 쏟아 붓는다.
하지만 주님은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고 말씀 하신다. 예수님은 겸손함으로 공감한다. 남을 헤아리는 마음이다.
교만은 우쭐함과 남을 업신여긴다. 들었던 돌을 내려 놓지 못한다. 겸손은 들었던 돌을 내려 놓는 용기를 갖게 한다.
신앙 생활은 혼자서도 충분할까? 그렇지 않다. 관계 속에서 서로 짐을 지면서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물론 관계를 통해서 상처 받고 아픔을 서로 경험할 수 있다.
내 앞에 마가가 있나요..
내 앞에 데마가 있나요.
내 앞에 알렉산더가 있나요..
이들 때문에 상처 받고 아픔을 견디느라 힘들었지요.
그들에게 허물을 돌리지 말아요.
예수님처럼 겸손함으로 그들을 헤아리는 눈을 가져요..
아니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마가였나요.
아니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데마였나요.
아니 내가 지금 누군가에게 알렉산더였나요..
그들에게 나의 이기적인 선택이 배신감과 상처로 힘들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나는 왜 자꾸 그리스도에게서 떠나려고 할까?
내가 왜 어느새 이 지경까지 되었을까?
예수를 믿노라고 하면서도 세상을 다 사랑했기
때문이다.
세상을 더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때마다 하나님을 더욱 더 깊게 묵상해요..
지금 데마처럼 알렉산더처럼
주님을 멀리 떠나 있나요
주님을 배반하고 주의 진리를 떠나 불순종하며 살때에 주님의 마음을 얼마나 아프셨을까!
다시 오시는 주님께서도 나를 향해 “난 이제 네가 힘들지 않아” 라고 하실 것입니다.
주님의 간절한 호소에 귀를 기울여 보아요.
너희는 힘써 내게 속히 오라..
그 분이 가르쳐 주는 진리로 처신하라.
나를 향해 속히 오라고 하시는 그리스도의 마음.
오늘 우리들의 마음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럴때에 내 주변에 데마, 마가, 알렉산더를 바라보는 시선은 달라질 것입니다.
난 이제 네가 힘들지 않아..
주님이 오시는 대림절 기간에 이런 회복의 은혜를
경험하는 복된 시간이 되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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