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말씀: 마14:22-33
제 목: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 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느냐 하시고 배에 함께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지라.(마14:31-32) And immediately Jesus stretched forth his hand, and said unto him, O thou of little faith, wherefore didst thou doubt? And when they were come into the ship, the wind ceased.(Mat14:31-32)
사람이 건강하게 사는 데는 여러 가지 비결이 있습니다.
그 비결들 중 하나는 많이 웃으면 큰 효력이 있답니다.
하루에 매일 15초를 웃으면, 이틀 간 생명이 연장되고, 하루에 45초를 웃으면 고혈압, 스트레스가 해소가 된다고 합니다.
여러분! 많이 웃으면서 건강하게 기쁘고 행복하게 사시길 축복합니다.
프랑스에서 최장수로 112살을 산 사람이 있었습니다,
장수의 비결이 뭐냐고 물었더니, 이 분이 한참을 웃더랍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아마 하나님이 나를 천국 데려가는 걸 잊어 버렸나봐요. 그러면서 유머스러운 이야기를 하더랍니다.
인생을 살면서 여유와 유머감각은 건강에 어떤 의학적인 치료보다도 중요하다고 합니다.
하나님을 바라보면 삶의 여유가 생기고, 평안이 있고 사랑하는 마음이 넓어집니다. 그리고 모든 보는 시야가 달라집니다.
그런데 우리는 사랑한다고 하지만, 사실 관점을 바꿔 생각해 보면 인간이 얼마나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인가를 느낄 수 있습니다.
전에 옆집 아파트에서 애완견을 기르는데 늘 안고 다니면서 입을 맞추기도 하며, 개를 굉장히 사랑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부터 개가 짖지를 못하고, 꼭 감기 걸린 것처럼 켁켁거리길래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못 짖게 하느라고 개 목 젖을 지져 수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개가 말을 못해서 그렇지 내 운명이 어쩌다 저런 인간을 만났을까?
말만 할 수 있다면 원한이 얼마나 크겠는가? 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개는 짖어야 개입니다.
진짜 꽃을 사랑한다면 꽃을 꺾어서 꽃병에 넣는 것이 아니라, 들판에서 자유롭게 자라게 둬야, 그게 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새를 사랑 한다면 새장에 가둬놓는 것이 아니라, 하늘을 훨훨 날게 만들어 줘야 그 새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물고기가 어항 안에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저 바다로 내 보내야 행복합니다.
모든 기준을 자기관점에서 삶의 구심점을 삼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앙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창조하신 근원을 따라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을 하든지 하나님이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도, 봉사도, 구제도 하나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여러분도 하나님께 인생의 초점을 맞추고 살기를 바랍니다.
1929년 미국이 경제공항으로 어려울 때에, 루즈벨트 대통령은 오히려 세계에서 가장 높은 빌딩을 건축했습니다.
왜냐하면 실업자들에게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그게 뉴욕에 있는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입니다.
이 건물 높이는 102층으로 지었는데, 그 이유는 청교도들이 신앙을 찾아서 미국에 메이플라워를 타고 온 사람들이 102명이기 때문이랍니다.
신앙의 사람들을 기념해서 102층의 건물을 지었답니다.
그 후로 뉴욕 맨하탄에는 102층 이상의 건물은 지을 수 없답니다.
한 건물을 짓는 데에도, 청교도들의 신앙을 담은 건축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은 청교도 신앙의 비밀을 많이 담고 있습니다.
주소의 번지가 33 번지입니다.
엘리베이터는 88층 까지만 운행합니다.
왜 그렇게 만들었을까요?
하나님을 섬기는 신앙의 혼을 밑바닥에 두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든, 공부를 하든, 성공을 꿈꾸는 사람은, 무엇을 하든 하나님이 구심점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삶이요, 목표요, 방향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중심이 되는 삶, 이것이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인생의 초점을 어디에 다가 맞추고 사십니까?
하나님께 맞추는 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그럴 때 하나님의 지혜가 임하고 평안을 얻게 됩니다.
오늘 말씀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체험하고 난 직후의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기적을 베푸신 후에 혼자 산으로 기도하러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배를 타고 건너편으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본문에 ‘재촉하다’ 의뜻은 ‘강요하다’ 로 가기 싫어하는 제자들을 억지로 보내셨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과 무리들을 보내신 후, 기도하러 따로 산에 올라 가셨습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내용을 통해, 왜 혼자 예수님께서 기도하러 가셨는지 유추할 수 있습니다.
오병이어의 사건으로 사람들의 갈채와 인기를 통해 얻어지는 정치적 메시야로 이 땅에 온 것이 아니라, 자기의 십자가죽음을 통해 죄인들을 구원하실 메시야로 왔음에 대한 자기 정체성의 기도였을 것입니다.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를 뒤로할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얻기 위한 기도였을 것입니다.
세상의 위로와 인정이 아닌 하나님의 격려와 위로를 얻는 시간이었을 것입니다.
이렇듯 사람들의 갈채를 뒤로할 때, 주님의 위로와 격려가 찾아옵니다.
예수님은 전도하시기 전에도 따로 기도하셨습니다.(막1:35)
기적을 행하시기 전이나 후에도 늘 한적한 곳에서 기도 하셨습니다. (23절, 눅5:15)
열두제자를 세우기 전에 밤이 맞도록 기도하셨고,(눅6:12-13) 십자가 고난을 받기 전에는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도록 간절히 기도하셨습니다.(눅22:44)
때론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 하셨으며(히5:7), 이외에도 습관을 좇아 산에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눅22:39)
우리에게 기도의 본이 되어 주셨습니다.
본문에 제자들 끼리 배를 타고 가다가 큰 풍랑을 만났습니다.
배는 이미 육지에서 수리나 떨어 졌다고 했습니다.(마14:24)
바람이 심상치 않게 물더니, 배가 침몰직전까지 뒤흔들렸습니다.
시간은 밤 사경(새벽3시-6시 사이)이라 했습니다.(마14:25)
풍랑을 만나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물위를 걸어오셨습니다.
제자들은 유령이라 하며 무서워 소리를 질렀습니다.(26절)
예수께서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 고 하십니다.(27절)
베드로가 주여! 만일 주시거든 나를 명하사 물위로 오라 하소서.(28절)
그때 주님께서 오라 하시니(29절)
베드로는 주님만 바라보고 물로 뛰어내렸습니다.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더니... (29절)
베드로는 주님을 바라보고 물 위를 걸어갔습니다.
그런데 어디선가 갑자기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30절)
베드로가 바람을 보고 무서워 하니, 빠져 갔다고 했습니다.(30절)
바람이 불든 태풍이 일어나든 주님이 오라고 했으면, 주님만 바라보고 가면 되는데, 바람을 보았답니다.
그 순간 두려움이 생기면서 불안이 찾아왔고, 물에 빠져버렸습니다.
베드로가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30절)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믿음이 적은자여, 왜! 의심하느냐? (32절) 하시고 함께 배에 오르매 바람이 그치는 지라.
예수님은 베드로를 건지시며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고,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셨습니다.
오늘 이 사건을 통해 여러분은 무슨 생각을 하십니까?
주님만 바라보는 신앙을 회복하시길 축복합니다.
세계정세가 불안한 요즘, 코로나로 물가는 폭등하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이런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
첫째, 참 평안은 주 안에서만 얻을 수 있습니다.(27절)
“예수께서 즉시 일러 가라사대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27절)
제자들이 불안에 떨고 있을 때, 주님은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이 언제 이런 불안에 빠졌습니까?
1) 주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에 찾아왔습니다.
주님과 떨어져 있는 시간에 찾아온 불안입니다.
자기들끼리 배 타고 가다가 풍랑을 만났을 때 불안에 빠진 것입니다.
우리 삶 속에 예수님이 없는 시간, 예수 없는 장소에서 문제를 만날 때 대안이 무엇입니까?
삶이 공허하고, 어려움을 겪고 있는 원인이 무엇이라 생각하십니까?
제자들이 왜! 예수님은 태우지 않고 자기들끼리 배를 탔을까요?
당장 현실에 예수님이 없어도 불편하지 않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언제나 양지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음지가 될 수도 있습니다.
믿는 자들은 음지가 되었을 때, 주님을 찾고 기도를 하지만, 비 신앙인들은 자포자기 하거나 삶을 포기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한국에 한 해 동안 자살 인구수가 13,799명 이었습니다.(2019년 통계)
안타깝게도 이는 OECD국가 중 1위이고, 하루에 평균 38명이 자살하고 있답니다.
조금 전에 제자들은 오병이어의 기적으로 배불리 먹었습니다.
이제는 예수님이 계셔도 그만이고, 안 계셔도 별로 필요성을 느끼지 않았습니다.
제자들은 자기들끼리 배를 타고 건너편 벳바게로 떠난 것입니다.(막6:45)
제자들이 노를 저어 십 여리쯤 갔을 때...(요6:19)
그런데 가는 도중에 예상치 못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심한 파도가 치고 배가 좌우로 흔들리더니, 순식간에 물이 배안으로 들어오기 시작합니다.
그때서야 주님이 배에 계시지 않은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편안하고, 현실에 문제가 없을 땐, 주님을 잃어버리고 살 때가 있지 않습니까?
제자들처럼 우리들끼리 인생의 노를 저어갈 때, 얼마나 힘이 듭니까?
그러다가 풍랑을 만나고, 질병을 만나고, 실패를 만나고 나면, 그제 서야 주님이 함께 하지 않고, 내 맘대로 산 삶을 깨닫습니다.
이제 살만하니 질병이 찾아오고, 기둥이 무너지는 아픔을 겪지 않습니까?
혹, 이렇게 사는 것이 내가 바라는 삶이 아닌데 생각하지는 않습니까?
주님을 찾아, 두려움과 불안에 떨고 있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하늘을 쳐다보며 인간의 한계를 느끼며, 한숨 짖을 때는 얼마나 있습니까?
전지전능하신 주님을 찾아야 합니다.
2) 성숙한 신앙은 평안할 때 더 잘 섬깁니다.
성숙한 신앙은 오히려 문제가 없고 평안할 때, 더 기도를 저축하고, 믿음을 저축하고, 더 하나님을 잘 섬기며,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입니다.
주님과 함께 있는 장소가 안전한 장소요, 평안한 시간입니다.
어느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풍랑 속에서 위험에 처해 있는 배를 그렸습니다.
많은 사람을 태우고 항해하다가, 배가 침몰 직전에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배가 침몰하고 있는데도, 그 안에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웃음이 있고 기쁨이 충만한 것입니다.
도대체 배가 침몰하는데 어떻게 기쁨이 있고 웃음이 있을수 있습니까?
그 그림 속을 자세히 보니까, 키를 잡고 항해하는 선장,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었습니다.
주님이 선장이셨기 때문에, 풍랑을 만나고 배가 기울어져도 그 안에 있는 사람들은 불안이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생의 항로에서도 주님이 선장이 되시면, 어떠한 풍랑 속에서도 평안한 것입니다.
주님이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도 주님과 동행자가 되기를 축복합니다.
둘째, 풍랑을 만날 때 주님만 바라보아야 합니다.(30절)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 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 하소서”(30절)
1)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중요합니다.
‘바람을 보고’ 라는 말을 주목하세요.
바람을 보면 빠집니다.
환경에 빠지면, 빠져 나올 방법이 없습니다.
베드로는 바람을 보는 순간 두려움이 찾아왔고, 불안이 인생을 빠뜨렸습니다.
바람을 보는 순간 믿음을 잃고 말았습니다.
바라보는 것을 통해 생각이 지배되고, 생각은 마음을 지배하고, 마음은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바라봄이 중요합니다.
음란한 매체를 보면, 마음이 온통 음란해집니다.
바라본다고 하는 것이 우리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주는 가를 알아야 합니다.
바라보면서 인생은 따라가게 되고, 행동을 만들어 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찬송을 부르고, 예배드리고,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을 바라볼 때, 방향이 달라집니다.
베드로가 지금 물에 빠진 것도, 바람을 보았기 때문이라 했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어디를 바라보고 인생을 걸어가고 있습니까?
그리스도인이 세상 사람과 다른 것이 무엇입니까?
파도를 보는 것이 아니라, 파도를 잔잔케 하시는 주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서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경주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를 바라보자. 저는 그 앞에 있는 즐거움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히12:2)
우리의 모든 죄를 지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바라보세요.
예수그리스도 십자가는 우리의 피난처요, 도피성입니다.
태풍이 불든지, 풍랑이 일어나든지, 베드로가 주님만 똑바로 바라보고 걸어갔다면 빠지지 않았습니다.
혹 빠졌다, 하더라도 걱정할 이유가 없습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은 시선을 어디에 두고 사십니까?
파도를 바라보십니까? 아니면 주님을 바라보십니까?
인생의 초점도, 방향도 하나님께 맞추시기 축복합니다.
이라크 전투 때, 미국의 제퍼 패튼 중령이 전투기 편대를 이끌고 이라크 국경을 들어섰답니다.
그런데 제트기가 적의 미사일 레이더망에 걸렸습니다.
그는 몸부림치듯 제트기를 조작해서 레이더망을 벗어났답니다.
그런데 순간 너무 긴장하다가 그만 귓속에 달팽이관이 고장 나서 평형감각을 잃어버렸답니다. 균형을 잃은 것입니다.
자신은 제트기가 상승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계기판을 보니까 땅을 향해 60도로 곤두박질을 치면서 내려가고 있더랍니다.
바깥은 칠 흙 같이 어두웠습니다.
패튼 중령은 제트기가 상승하고 있으니 기수를 더 올려야 할 것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계기판은 정반대였습니다.
이 때에 자신의 생각을 신뢰할 것이냐? 계기판을 더 신뢰할 것이냐를 빠른 선택을 하지 않으면 죽음이 오는 순간입니다.
그때에 패튼 중령은 자기의 경험, 생각을 내려놓고 정확한 계기판을 보았답니다. 그리고 제트기를 올렸답니다.
700미터 고지를 그대로 추락하려는 순간에, 구사일생으로 살아난 사건이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믿음은 하나님에 대한 신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맡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이 우리의 생각과 정 반대가 될지라도, 계기판을 선택한 조종사처럼, 내 생각 내 방법을 내려놓을 수 있어야 됩니다.
하나님이 인도하는 계기판을 믿고 따라 가는 것이 믿음입니다.
인생의 방향을 먼저 하나님께로 정하시기 바랍니다.
셋째, 주님은 큰 믿음을 요구하셨습니다.(31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31절)
1) 믿음이 작은 것이 문제였습니다.
베드로가 주님이 물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순간 강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주님의 오라는 말씀을 믿고 뛰어내렸습니다.
그런데, 심한 바람이 불어왔습니다.
주님을 바라보던 시선을 잃고, 바람을 바라보았습니다.
주님에게서 눈을 떼는 순간 믿음을 잃었고, 주님의 보호권에서 벗어났습니다.
언제든지 환경바라보지 말고, 주님만 바라보아야 삽니다.
베드로가 풍랑을 보는 순간, 걷잡을 수 없이 물에 빠져들었습니다.
주님이 빠진 베드로를 건지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31절)
주목해야 할 것은, 믿음이 없는 자라고 하지 않고, 작은 자라고 했습니다.
베드로가 믿음이 없는 것이 아니라. 믿음이 작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이 작다는 말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믿음이 가볍다는 말입니다. 가벼우니까 잘 흔들리는 것입니다.
또 하나는 믿음이 짧다는 말입니다.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서도 끝까지 인내하지를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는 것입니다.
전도하다가도 빨리 돌아오지 않는다고 포기하는 것입니다.
남편 예수 믿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한 답니다.
그러면서도 20년이나 안 믿은 사람이 하루아침에 예수 믿겠느냐?
기도를 해 놓고 또 의심을 합니다.
이것을 작은 믿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여러분의 큰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파도를 바라보지 말고, 파도 넘어 주님의 손길을 바라보는 큰 믿음이 되기를 원하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누구라 고백합니까?
배에 있는 사람들이.....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로소이다 (33절)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고백했습니다.
즉, 믿음은 바다에 빠지지 않을 것이라는, 자기 확신과 자기 주문이 아닙니다.
바다를 걷고 계시며 나를 명하여 바다 위를 걷게 하시며, 바람을 잔잔하게 하시는 창조주 예수님에 대한 지식이요, 믿음입니다.
그 분이 누구인지에 대한 확실한 지식이 많을수록, 우리의 믿음도 커 질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 적을수록 우리의 믿음은 작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14:30)
이는 환경에서 구원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신앙생활하며, 만나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 속에서 우리를 건져 주소서(출6:7)
원수들의 손에서 구원하소서.(삼상4:3)
모든 재난과 고통 중에서 구원하소서.(삼상10:19)
질병에서 구원하소서.(마9:22, 막5:28, 눅8:48)
이외에도 죄에서 구원하소서.
피로 말미암아 구속 곧 죄 사함을 얻었느니라.(엡1:7)
그의 이름으로 죄 사함을 받았느니라.(눅24:47)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셨느니라.(계1:5)
영혼의 구원도 있습니다.(출6:8, 벧전1:9)
천국에 들어가도록 구원하셨느니라.(딤후4:18)
예수 믿는 사람들은 영혼 구원에 이르는 믿음으로 살아야 합니다.(히10:38)
우리는 오직 영혼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히10:39)
“주님과 함께 배에 오르니 바람이 그쳤더라.” (32절)
주님과 함께 있는 시간, 주님과 함께 있는 자리, 이곳이 평안한자리요, 안전한 자리요, 축복의 자리요, 행복한 자리입니다.
이제 여러분도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도 시대에 흔들리지 않는 큰 믿음으로 주님과 함께 동행하며 달려가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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