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상 & 기도

누가복음 24장 13-35절 말씀 묵상 [김경열 목사]

복음뉴스 0 2021.04.12 18:45

본문말씀 : 눅24:13-35. 

제   목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에게. 

 

저희가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줄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니(눅24:32) And they said one to another, Did not our   heart bum within us, while he talked with us by the way, and while he opened to us the scriptures? (Luk24:32) 

 

세계 어떤 종교도 부활을 믿는 종교는 없습니다.  부활한 적이 없기 때문입니다.

 

가끔 죽었다가 살아났다는 이야기들은 합니다. 만 다시 죽습니다.

 

마르다의 오라버니 나사로도 죽었다가 살아났으나 다시 죽었습니다.

 

지구상에 생명체로 존재하는 한 영원한 것은 없습니다.

 

그런데 십자가에서 죽으셨다가 사망권세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은 기독교 신앙의 핵심이요,  생명의 본질입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실 때 행악자 둘이 함께 달리셨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시면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눅23:33-34)

 

라는 말 한마디에 한 강도가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강도는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생각하소서. 라 하니(42절)

 

그 강도에게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에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이르리라’ 약속하셨습니다.(눅23:32-43)

 

사도 바울이 부득불 자랑하고 싶은 체험이 있는데, 몸 안에 있었는지 몸 밖에 있었는지 다녀온 셋째하늘 낙원에 이끌려가서 보았다고 했습니다(고전12:4)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돌아가신 후 마리아가 무덤을 찾아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이 열려 있었고, 시신이 없어졌습니다.

 

기가 막힌 현실 속에 아연실색하며 무덤가에서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너무 반가운 나머지 예수님하고 만지려 하니까. “나를 만지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못하였노라 고 하십니다.(요20:17)

 

그러면서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고 하셨습니다(요20:17 下)

 

그러면 한 강도에게 오늘 낙원 이르리라. 한 곳과, 바울이 보았던 낙원은 곧 아버지 집은 아니라는 말씀이 됩니다.

 

성경 요3:13에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외에는 하늘에 올라간 자가 없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까지 신앙생활 잘하던 믿음의 선진들! 

 

그 고귀한 신앙의 순교자들은 지금 다 어디에 계시는가요?

 

천국에 가서 누구를 만났다는 간증은 어디에서 보고 온 것일까요?

 

낙원(Paradise)과 천국(Heaven) 은 다릅니다.

 

낙원에 있는 자들은 곧 아버지 집, 천국으로 가게 될 것입니다.

 

음부(헬)하데스, (히)스올)와 지옥 (헬)게헨나)은 다릅니다.

 

음부에 있는 영혼들은 영원한 불 못, 지옥으로 곧 갑니다.

 

천국에는 언제 들어가는가요?

 

요한계시록에 천년왕국이 끝난 후(계20장) 사망도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는 새 예루살렘이 

(계21:1-4)이 도래 된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영원한 처소 곧 천국이 예비되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곳으로 영접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14:1-3)

 

이 때가 천사장의 나팔과 함께 신랑 예수님께서 재림하는 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신부)는 예수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주안에서 죽은 자들의 영혼은 천국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낙원에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믿는 자에게 부활은 최대의 기쁨이요 승리의 날입니다.

 

만약에 십자가의 죽으심과, 다시 사는 부활이 없다면, 신앙이 존재할 가치도 없고, 우리의 믿음도 헛되다고 했습니다. 

 

고전15:14에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부활 신앙으로 평생 살아야 합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오순절 성령 받은 이후, 종교 지도자들의 위협과 핍박이 심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우리가 너희 말 듣는 것이 옳으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게 옳으냐? 고 따졌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와 부활의 증인이라고 했습니다. 

 

부활은 오직 기독교에만 있는 하나님의 구속사입니다.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부활신앙으로 다시 살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람마다 넘어진 자가 다시 일어났고. 실패하고 낙심한 제자들이 일어났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날 때, 다시 용기를 얻었고 확신을 얻었고 기쁨의 삶이 회복되었습니다. 

 

부활의 아침에 돌문이 열리듯이, 여러분의 인생길이 열려서 막힌 모든 것들이 열리고, 사망과 음부의 권세를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비상하시길 축복합니다.

 

엠마오로 가고 있는 제자들 얼굴에 슬픔으로 가득 찼습니다.(15-17절)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 아닌가?

 

신앙의 눈이 가리어져 동행하고 있는 주님도 알지 못하고, 세상의 무거운 짐을 지고 슬픔과 걱정으로 가득 찬, 괴로운 마음으로 걸음을 독촉합니다. 

 

오늘 본문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를 만나주셨던 때의 일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제자들은 이상한 소문을 듣고 있었습니다.

 

안식 후 첫날 아직 어두울 때에 막달라 마리아가 예수님이 묻혀 있던 무덤을 찾아 갔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무덤 입구를 가로 막고 있던, 돌문이 옮겨져 있고 예수님의 시신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서는 깜짝 놀라 급히 제자들에게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베드로와 요한이, 그녀의 말을 듣고 급히 달려가 무덤에 도착했답니다. 

 

그들이 동굴 속에 들어가 보니 예수님의 몸은 어디로 사라졌고, 몸을 감싸고 있었던 세마포가 돌 위에 놓여 있고, 머리를 쌌던 수건이 놓여 있었답니다. 

 

열 한 사도와 및 그들과 함께 하고 있던 사람들에게도 예수님 부활의 소식을 전해 주었지만 제자들도 그 말을 허탄하게 여겨 믿지 않았답니다.

 

이런 이상한 괴 소문을 듣고, 두 제자는 빨리 예루살렘을 벗어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혹시나 닥쳐올 괴담의 소문에서 벗어나고 싶었을 것입니다.

 

 

1. 우선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들은 과거에는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 이었습니다. 

 

예수님 사건으로 화가 임할지 모른다는 생각으로 두 제자가, 예루살렘에서 11km 정도 떨어진 엠마오로 도망가고 있었습니다. (13절)

 

예수님이 부활하셨던 그 날 오후에 있었던 사건입니다.

 

이 두 사람은 지금 예루살렘 성을 등지고 떠나 서쪽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 두 제자가 예수님의 말씀대로 갈릴리로 가야했던 사람들이었다는 점입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너희 보다 먼저 갈릴리로 가시나니 거기서 너희가 뵈오리라.(마28:7) 

 

갈릴리는 이스라엘 땅 북부 지역입니다. 

 

당시 예루살렘에서 갈릴리로 가자면, 동쪽에 있는 여리고 성으로 돌아가거나 북쪽 사마리아 성을 지나서 가야했습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이 와는 전혀 반대 방향인 서쪽의 엠마오로 가고 있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은 들었으나(22절-24절) 믿지 못하고 동쪽이나 북쪽이 아닌 서쪽 엠마오로 갔던 것입니다. 

 

이들은 갈릴리에서 만나겠다는 주님의 말씀은 기억도 않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과거에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는데, 이것이 어찌 된 일입니까?

 

여러분! 과거에 얼마나 열심히 주님을 따르셨습니까? 

 

교회 다니는 분들 중에 과거에는 열심이 있었다고 자신 있게 대답할 수 있는 성도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변함없이 끝까지 헌신하며 주님을 따르기가 쉽지 않습니다. 

 

나를 위해 십자가를 지신 주님을 인생 끝 날까지 변함없이 따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들은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전까지 예수님을 따르던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은 길을 가면서 ‘이 모든 된 일’(14절), 즉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과, 제 삼일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해괴한 소문에 대하여 서로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 가까이 오셔서 그들과 동행하며 길을 가셨지만, 그 두 사람의 눈은 가려져 있어서 동행하는 분이 예수님인 줄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15-16절). 

 

예수님은“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17절) 하고 물으셨습니다. 

 

그때 이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면하면서도 누구인지 알지 못하고 보통 사람을 대 하듯이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신 후에도 인성을 여전히 가지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신성을 가진 이후에도 인성을 여전히 가지고 계셨지만, 그의 몸은 지극히 영화로운 몸으로 변화되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의 눈은 가려져서 그분이 부활하신 예수님인 것을 알지 못했습니다. 

 

어쩌면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상상하지 못하였고, 상황으로 보아 대화하고 있는 분이 예수님인지는 전혀 알지도 생각도 못했습니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인해 큰 슬픔과 혼란 속에서 빠져서 길을 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가 무엇이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2.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현재 절망과 실의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과거에 그들은 예수님을 열심히 따르던 제자들이었으나 지금은 절망과 실의에 빠진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17절 말씀에 보면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다” 고 되어 있습니다. 

 

두 사람은 예수님께 대한 자기들의 기대가 무너졌다 생각하고, 절망과 실의에 빠져 슬픈 빛을 띠고 엠마오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절망과 실의에 빠진 이유는 오직 한 가지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사실을 믿지 못했기 때문입니다.(22절-24절) 

 

이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17절) 섰고, 그 두 제자 중 한 사람인 글로바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예루살렘에 우거하면서 근일 거기서 된 일을 홀로 알지 못하느뇨?”(18절). 

 

예수님은 그들의 대답을 들으시기 위하여 “무슨 일이뇨?” 하고 오히려 되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글로바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 이스라엘을 구속할 자로 여겼던 나사렛 예수의 일인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 박았습니다”(19-20절)

 

이 일이 된 지가 벌써 사흘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당혹해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여자들이 예수의 무덤에 갔다가 시신을 보지 못하고 무덤이 비어 있었다는 소식을 제자들이 듣고 달려가 보았답니다, 

 

그래서 우리와 함께 있던 제자들 중 두어 사람이 무덤에 가 보았지만 정작 예수님은 보지 못하였답니다.(19-24절).

 

그런데 천사가 와서 그가 다시 살아나셨다는 이야기만 해 주었답니다. 

 

이 제자들은 아직도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못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다시 살아나셨다고, 전해준 여자들의 말도 아직 믿지 못하고 있습니다, 

 

헛 소문인줄로 알았던 것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왜 우리 눈앞에 직접 나타나지 않고 계신 것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살아나셨다면 도대체 어디에 계시다는 말입니까? 

 

그가 살아나셨다면, 어서 이스라엘을 속량하고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셨어야 하는 것이 아닙니까? 

 

정말 황당하고, 혼란스럽습니다.

 

일부러 바리새인들이나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시체를 감추어 놓고 제자들에게 돌려주지 않으려는 수작으로 생각할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부활하셨다는 예수님은 눈앞에 보이지도 않고, 정말로 슬프고 혼란스럽다는 말을 했습니다.

 

이때 예수님은 이 두 제자에게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하고 책망하셨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 가르치셨습니다. 

 

그들의 가려진 눈은 성경에 대해 가려진 상태이고, 그들의 막혀진 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영안이 완전히 닫혀 있습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었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그들에게 “모세와 및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27절)해 주셨습니다. 

 

그가 받으신 고난과 받으실 영광이 구약성경에 어떻게 예언되어 있는지, 예수님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설교)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가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실 것이 성경에 어떻게 약속되어 있는지 성경 한 구절 한 구절을 찾아서 풀어 설명해 주셨습니다. 

 

성경은 예수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습니다(요5:39)

 

성경은 우리가 구원에 이르도록 자라게 하시고(벧전2:2), 구원이 이르는 지혜를 주십니다(딤후3:15)

 

예수님께서 그렇게 성경을 풀어주셨을 때에, 그들의 마음은 뜨거워졌습니다.(32절). 

 

마음이 열리고 성경이 깨달아 질 때, 그동안의 근심, 걱정, 염려가 사라졌습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니 사명이 회복되었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영으로, 그의 교회를 통해서, 그리고 그의 설교자들을 통해서 이 일을 계속 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교회는 말씀사역을 가장 중요한 사역으로 꼽으며, 예배에 있어서도 말씀의 설교를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꼽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집에 들어가셔서 한 가지 일을 더 하셨습니다. 

 

그것은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실 때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그들에게 주신 일입니다(30절).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이적을 행하실 때에도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들에게 주셨습니다,  

 

성찬을 제정하실 때도 유월절 식사 자리에서, 예수님은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제자들에게 떼어 주셨습니다. 

 

여러 성경 주석가들은(어거스틴, 매튜 헨리) 이 구절을 해석하면서, 그리스도께서 여기에서 축사하시고 떡을 떼어 나누어 주신 것에는 

성례전 적인 의미가 깃들어 있다고 하였습니다. 

 

주님께서는 그 두 제자에게 복음의 말씀을 들려주셨을 뿐만 아니라. 떡으로 복음을 확증시켜 주시는 일을 하셨던 것입니다. 

 

그들이 떡을 받을 때에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게”(31절) 되었다는 점을 우리는 주목해서 볼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우리 가운데에서 이 일을 행하고 계십니다.

 

말씀으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하시고, 떡으로 우리의 눈을 밝히소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모습을,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닮았습니다.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그네와 행인의 모습이, 마치 인생순례의 길을, 걸어가고 있는 나의 모습을 닮았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제자이면서도 눈이 가려져서 여전히 어리석고 우둔하고 미련한 것도 나와 꼭 닮은꼴입니다. 

 

우리들도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입니다. 

 

우리도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그리스도의 고난과 영광에 대해서 여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구속사를 이해하지 못하고 변해있는 모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믿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혼란과 슬픔에 빠질 때도 많이 있습니다. 

 

임마누엘의 주님이 곁에 계시는 데도 보이지 않으니, 세상환경을 바라보고 슬퍼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지금도 그의 교회를 통해서, 모든 말씀을 자세히 풀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에 대해 설명하여 주심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을 뜨겁게 하십니다. 

 

또한 주님께서는 말씀사역과 함께, 성례의 시행을 통해서 사람들의 눈을 밝혀서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확신하게 하십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떡으로 눈이 밝아진 제자들은 그들의 슬픔을 거두고 놀라움과 흥분과 감격에 찼습니다. 

 

3.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이제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이 두 제자는 “곧 그 때로 일어나 예루살렘에 돌아갔다” 고 되어 있습니다. (33절)

 

“곧 그 시로”(33절)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자신들이 길에서 예수님을 만난 것과, 예수님의 말씀을 자세히 풀어 설명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이 떡을 떼어 주신 것을 증거 함으로써 다른 제자들과 복된 성도의 교제를 나누었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서, 큰 확신과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눅 24:47-49).

 

“두 사람도 길에서 된 일과 예수께서 떡을 떼심으로 자기들에게 알려지신 것을 말하였다”고 되어 있습니다. (35절)

 

그러니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서 부활을 믿게 되자, 그 즉시 부활의 증인이 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두 제자는 열한 제자와 함께 부활하신 예수님을 한번 더 뵈었습니다. (36절) 

 

이 두 사람은 후에 오순절 날에 성령을 받은 120여 명 중에 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또한 “예수는 그리스도라고 가르치기와 전도하기를 그치지 않았던” 초대교회 성도들 중 대표적인 성도들이 되었을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은 이제 예수님의 부활의 증인으로서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삶을 살았을 것입니다.

 

그들은 엠마오로 가는 길 이었으나, 주님을 만나고 예루살렘으로 갔습니다.

 

사실 두 제자가 되돌아 간 예루살렘 성은 그들에게는 무시무시한 도시입니다. 

 

예수님을 죽인 대제사장이나 서기관들 바리새인들이 아직 그대로 권세를 잡고 있었고 예수님을 죽인 로마의 군병들이나 그 군중들이 그대로 있는 곳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예루살렘으로 다시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으면 이처럼 담대해집니다. 이것이 성경적'입니다. 

 

믿음의 용사들이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다”고 증거 했습니다. (히11:35절)

 

‘더 좋은 부활’ 을 얻고자 해서 말입니다. 

 

사도 베드로나 바울이 왜 그렇게 담대했습니까? 

 

더 좋은 부활신앙 때문 아닙니까?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부활 사실을 믿으므로 믿음의 선조들처럼 담대한 신앙인이 되시기를 진심으로 축원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은 갈릴리에서 만나자고 한 말씀을 버리고, 엠마오로 떠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슬픔과 걱정이 많이 있었지만 주님이 말씀을 풀어줄 때 마음이 뜨거워 졌습니다.

 

말씀으로 마음이 뜨거워지고 떡으로 눈이 밝아진 제자들은 그들의 슬픔을 거두고 놀라움과 흥분과 감격에 찼습니다. 

 

“곧 그 시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서, 제자들에게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 하였습니다. 

 

여전히 미련하고 더디 믿는 우리는, 자주 혼란에 빠지며 슬픔과 근심에 휩싸이는 때가 많습니다, 

 

말씀과 성례를 통해서 마음이 뜨거워지고 눈이 밝아져서, 큰 확신과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증거하며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눅 24:47-49).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변화된 모습은,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며 우리의 이야기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 앞에 마음이 뜨거워 져야합니다. 

사명이 회복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부활 신앙입니다.

 

사망권세를 이기고 부활하신 주님이 열어주시는 승리와 축복이 여러분의 가정과 교회와 우리민족위에 함께 하시길 축복합니다.

 

얼마나 훈훈하고 기쁜 일인 줄 모릅니다.

 

배신하고 의심하고 부인하고 돌아간 제자들을 찾아가신 예수님을 꼭 만나시길 기원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담대해 집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후에 큰 기쁨을 얻게 되었습니다. 

 

이 기쁨은 불안과 두려움이 사라지고 의심하던 마음이 사라졌습니다. 

 

코로나로 인해 힘들고 지치고 성전예배가 무너졌다면, 다시 부활신앙으로 예배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예수의 말씀을 들은 제자들의 마음이 뜨거워졌듯이 무너진 생활 속에 부활의 은혜로 회복되길 기도해야 합니다. 

 

장차 다시 오실 주님을 기다리는 재림의 소망이 깊어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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