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막 11:17)
And he taught, saying unto them, is it not written,
My house shall be called of all nations
the house of prayer? but ye have made it
a den of thieves.(Mark 11:17)]
로마시대에 왕이 백성들을 향해 선포를 했습니다.
죄를 지으면 반드시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두 눈을 빼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하필이면 사랑하는 아들이 먼저 죄를 지었습니다.
왕은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아들을 잡아오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아들의 한 쪽 눈을 먼저 뺐습니다.
고민을 한 왕은 나머지 한쪽은 자신의 눈을 뺐습니다.
공의를 실천하기 위해 두 눈을 뽑되,
한 눈은 자식의 눈을 뺏고
한 눈은 왕의 눈을 뽑아서 공의를 실천하고
또한 자신의 한쪽 눈을 빼서
아들에 대한 사랑을 보여 주었다고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이십니다.
주님도 이 땅에 오셔서 사랑을 전하셨습니다.
그러나 불의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하지 않으셨습니다.
1) 용서하는 것과 타협은 다릅니다.
잘못을 뉘우치는 것은 끝없이 용서하셨지만,
불의에 대해서는 단호한 의분을 나타내셨습니다.
외식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해 독사의 자식들이라고
때로는 열린 무덤 속과 같다고 무섭게 책망하셨습니다.
화를 내는 감정의 표현 속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분노가 있고 의분이 있습니다.
때로는 의분이 필요합니다.
의분은 불의를 보고 분을 내는 것입니다.
중학생쯤 보이는 여학생들이 교복을 입은 채로
어른들 앞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데
어른들이 못 본체 하거나 피해가는 것을 보고
이것은 관용이 아니라 비굴함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사회가 갈수록 무질서 해지는 것은
어른들이 잘못을 보고도 내 자녀가 아니라고
무관심하거나 외면해 버리기 때문입니다.
물론 사회가 그만큼 악해졌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요즘 학생들이 학교폭력에 시달려 괴로움을
이기지 못하고 자살하는 학생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이나 부모까지도 확실히 책임져 주지
못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아예 말을 하지 않고
고민하며 시달리다가 자살까지 몰고 갑니다.
어쩌다 이 사회가 이렇게까지 되었는지
안타깝고 탄식할 노릇입니다.
이 시대에 의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한 나라의 대통령을 지낸 사람이 자식들은
수천억의 재산을 가지고 있으면서 돈 문제로
매일 기사에 오르내리는 것을 보면서
철면피같은 모습에 분노가 생깁니다.
나라가 이렇게 어려운 때에 침묵하고만 있는 것이
옳은 일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헌법에 명시된 자유민주공화국의 이름을 떼고
사회주의로 몰고 가는데도 그냥 보고만 있는 것은
역사의식이 있는 것인지 비겁한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우리 세대는 80년대 민주화를 외치며 최루탄 가스를 마시는
용기있던 시대가 그립습니다.
불의한 일에 분노할 줄 아는 것이
진정한 정의요, 의분이 사랑입니다.
가정에서 자녀들을 양육하는 데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 둘만 키우다 보니 자녀가 우상이 되었습니다.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 변해 가고 있습니다.
선악의 구분을 모릅니다.
전에 4대 독자가 사람을 몇 명 죽이고
사형 언도를 받았습니다.
교도소에서 마지막 자기 엄마를 직접 만나기를 원했습니다.
포승줄에 묶여서 특별 면회를 했습니다.
어머니는 아들을 끌어안고 한없이 울었습니다.
시간이 되어서 헤어져야 한다고 하니 아들이
엄마 손을 내 얼굴에 대 주세요.
그 순간 아들이 어머니의 손을 물어 뜯어서
살 가죽을 다 벗겨 놓았답니다.
간수가 말리니까 울면서 하는 말이
내가 남의 가계에서 물건을 훔쳐올 때,
잘못이라고 매 한번만 제대로 때려줬어도
나는 사형장의 죽음으로는 가지 않았을 겁니다.
하면서 울더랍니다.
4대 독자라 너무 귀해서 나쁜 짓을 해도
무조건 잘 했다고 한 것이 선악을 분별하지 못하고
결국 사형수가 되었습니다.
이 글을 읽으면서 저도 많이 반성했습니다.
요즘은 성도들에게도 너무 좋은 소리만 하고
쓴 소리는 없어져 가고 있습니다. 좋은 것이 아닙니다.
요즘 교회에 권징조례가 없어졌습니다.
목사 설교에 회개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회개하지 않고 능력이 없습니다.
수술을 해야 하는데 진통제만 먹이면 안 됩니다.
메스를 대고 수술을 해야 합니다.
지금 한국교회도 점점 시들어가는 화초처럼
메말라 가고 있습니다.
지난 번 한국에서 제일 많이 모이던
기도원에 가서 느낀 것이 있습니다.
몇 년 전만 해도 앉을 자리가 없을 정도로 수 천명씩 모이고
앞자리는 물병을 들고 금식을 하면서 애절하게
부르짖는 성도들로 가득 차던 곳이
지금은 썰렁하게 비어 있는 것을 보고
이것이 지금 한국교회의 현주소가 아닌가?
생각해 보았습니다.
교회가 십자가와 부활의 본질을 놓치고
하늘의 소망보다는 땅에서의 번영만이
성공의 법칙인 것처럼 변질되어 가면서
교회는 자꾸 세속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와 부활을 증거하다가 순교를 당하면서도
이것을 최고의 영광으로 삼았던 것이
우리 믿음의 선진들이 걸어온 신앙의 발자취입니다.
주님의 이름 까닭에 집을 빼앗기고 직장을 잃고
매를 맞으면서도 우리는 예수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감사했습니다.
전에 중국에서 가정교회 지도자들을 모아놓고
밤을 새가면서 교육을 한 일이 있습니다.
한 분이 간증을 하는데 공안에게 붙잡혀서
너희들의 조직을 말하라고 고문을 하는데
머리를 망치로 때려서 이렇게 머리가 없다고 보여주는데
가운데 머리가 없었습니다.
기절을 하고 물을 퍼부어서 깨어났는데 다시 고문을 하면서
너희들의 모이는 곳을 불라고 하더랍니다.
더 이상 나를 괴롭히면 혀를 깨물어 잘라 버리겠다고 했더니
예수쟁이들은 독한 것들이라고 하면서 고문을 멈추더랍니다.
그분이 기쁘게 나는 주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고 하면서
주님 앞에 갈 때 주님이 얼마나 기뻐하실까를 생각한다는
고백을 할 때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의 신앙은 어떠한가요?
신앙의 기준이 하늘을 바라보지 않고 땅으로 내려왔습니다.
영적인 눈을 뜨고 하나님을 갈망하기 보다는
땅의 것만 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찾기 보다는
내 뜻에 하나님이 동의해 주기만을 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내가 원하는 일들이 이뤄지면 오히려
나태해지고 하나님과 멀어지기 시작합니다.
십자가는 버리고 영광만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난이 없이는 부활의 영광도 누릴 수 없습니다.
성도는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주님은 사랑인 동시에 공의가 분명하십니다.
이것을 두 기둥으로 삼아야 합니다.
본문에 예루살렘으로 들어가시는데
성전 안에서 비둘기를 팔며 돈 바꾸는 자들로
성전을 더럽혔습니다.
주님은 상을 엎어버리고 채찍을 들고
단호하게 이들을 내쫓았습니다.
성전을 정화하시면서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의분을 볼 수 있습니다.
의분은 불의한 일을 보고 모른 체 하는 것이 아니라
거룩한 분노를 갖는 것입니다.
이 시대는 지금 의분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본질을 생각하면서
우리 마음의 성전도 정리할 것을 정리하고
깨끗하게 정화하는 기회가 되길 원합니다.
1. 무엇보다, 성전에서 쫓아낸 자들을 보세요.(15절)
1) 성전을 더럽히는 자들을 내쫓았습니다.
이들은 신앙을 이용하여 이익을 추구하는 자들입니다.
성전 안에서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제물이 아닌 것을 가지고 들어오는 자들을 내쫓았습니다.
성전은 제사 드리는 곳입니다.
백성들이 제사하려고 짐승을 가지고 옵니다.
그러나 너무 멀리서 오는 순례객들은
짐승을 가지고 올 수가 없어서
돈을 주고 비둘기 같은 제물을 사서 제사로 드렸습니다.
이것을 이용하여 장사를 하였습니다.
이들은 제사에는 관심이 없고 돈을 바꿔주며
제물을 팔면서 이익을 챙기는데 혈안이 되어 있었습니다.
주님이 이런 모습을 보시고
상을 엎으셨고 이들을 내쫓았습니다.
그리고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라고
성전의 목적을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거룩한 곳을 더럽혔기 때문입니다.
성전의 목적에서 빗나갔기 때문입니다.
2) 성전은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이 계신 거룩한 곳입니다.
성전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곳입니다.
구약은 제사였기에 직접 제물을 드렸습니다.
그러나 신약에는 예수님이
단번에 제물이 되심으로 신령한 제사를 드립니다.
여기에서 건물적인 성전과 동시에
마음의 성전을 보게 됩니다.
유대인들은 성전을 가장 소중히 여겼습니다.
지금도 이스라엘에 다 무너진 예루살렘 성벽에
머리를 묻고 눈물로 기도를 드리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을 통곡의 벽이라고 합니다.
이들은 집을 지어도 동서남북 어디에 있든지
성전을 향해 방향을 정합니다.
철저히 성전 중심한 삶을 살았습니다.
성전 중심한 삶이란 하나님 중심한 삶을 말합니다.
이들은 어느 곳에 있든지 하나님을 중심해서 살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거룩한 성전이요, 신앙의 본질입니다.
이 거룩한 성전 안에서 신령한 예배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도 드려야 하는데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혔습니다.
종교지도자들은 상인들과 결탁해서
순례객들을 착취하였을 뿐 아니라
성전의 거룩함을 더럽혔던 것입니다.
주님은 상을 엎어버리고 이들을 내쫓으셨습니다.
주님의 의분입니다.
이런 건물적인 성전과 동시에
또한 우리 마음이 하나님의 성전임을 알아야 합니다.
우리 마음을 하나님이 계시고, 주님이 계시고,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마음이 거룩해야 합니다.
마음이 깨끗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보면 거의 물질이나 정신문제 이전에
마음에 관한 말씀이었습니다.
우리 마음이 성전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