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역사’ 사랑은 ‘수고’ 소망은 ‘인내’라는 말과 동일시되어 사용된 성경구절이 데살로니가전서 1장 3절입니다. 여기서 사랑은 ‘수고’라고 말합니다.
생각해 봅시다. 아이를 낳아 키우는 부모의 사랑은 한없는 수고입니다. 그 수고는 대가를 바라는 수고가 아닙니다. 헌신이고 희생이고 양보이며 무조건적입니다. 어머니의 경우는 더욱 그렇습니다.
결혼한 부부의 경우 시간이 지나면서 결혼생활이 잘되는 가정도 있지만 그렇지 않고 힘든 가정도 있습니다. 무엇이 문제일까요? 서로 사랑해서 결혼한 것 아닌가요? 아주 특별한 독특한 경우의 결혼을 이야기 하는 것이 아닙니다. 결혼은 사랑을 전제로 이야기 하는 것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사랑해서 한 결혼이 어떻습니까? 몸도 마음도 잘 살아가는 결혼생활은 저절로 되지 않습니다. 서로의 ‘수고’가 동반되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관계가 나빠지고 결혼생활은 어렵습니다.
평소 살면서 문제가 생기면 “만나서 해결하자.”합니다. 그러나 그 만남이나 대화가 그동안 사랑의 ‘수고’ 없었음을 서로에게 확인시키느라 갈등을 더 강화할 소지가 높습니다. 나는 ‘수고’를 했는데 너는 ‘수고’ 없음을 말합니다. 그래서 해결을 위해 만났는데 오히려 더 어려운 상황을 만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반드시 수고로움이 동반됩니다. ‘수고’라고 할 때 그것은 ‘노력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감정에 반응함이 아니라 의지를 사용하는 것입니다. 수고는 저절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헌신’을 동반하고 마음도 시간도 물질도 사용됩니다. 너를 위해 내가 주는 것입니다. 계산하지 않습니다. 혹시 계산해 손해를 알게 되어도 받아들입니다. 여기서 친밀한 관계가 형성됩니다. 받는 사람의 경우 행복을 느낄 수 있으나 주는 것 또한 행복을 줍니다. 오히려 줄 때 더 행복합니다.
삶은 마치 건축물을 세우는 것과 같다는 것이 많은 선견자들의 말입니다. 에리히 프롬(Erich Seligmann Fromm. 1900-1980)은 “참여하지 않으면 사랑하지 않는 것이다.”했습니다. 이 말들을 연결하면 한 번 참여로 사랑을 건축하기 어렵다는 말을 만들 수 있습니다. 사랑의 건축은 수고가 있습니다. 건축이 잘 되려면 기초에서부터 모든 건축과정이 성실해야 합니다. 부실하면 무너집니다. 그래서 관계의 건축인 사랑은 꾸준함과 성실한 수고를 동반해야 잘 세워집니다. 수고(관계)하지 않으면서 사랑(관계)이 문제없을 것이라 생각한다면 그건 오해이며 이기적인 생각입니다. 그러면 생각지도 못한 때에 무너집니다. 늦은 후회만 있습니다.
사랑은 수고입니다. 참여이며 관계이고 손해입니다. 지금 사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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