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를 위한” 강청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비록 벗됨을 인하여서는 일어나 주지 아니할지라도
그 강청함을 인하여 일어나 그 소용대로 주리라 눅11:8
흔히 ‘강청기도’라고 일컫는, 하나님께 강하게 떼쓰며 조르는 기도, 끝장 볼 때 까지 포기하지 않고 기도하면,
하나님이 들어주신다고 우리는 믿고 있습니다.
그 말은 사실인데, 우리는 믿음이 약해서 ‘강청기도’를 하기 힘들뿐더러
‘강청기도’를 했다손 치더라도, 응답을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본문을 읽다가, 그 이유 한 가지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자기를 위해서가 아니라,
밤중에 찾아온, 여행 중에 지쳐서 찾아온 자기 친구를 위해서 강청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의 이기적인 목적으로 강청한 것이 아니라,
이타적인 순수한 목적으로 강청했고, 그 소원은 응답되었습니다.
오늘 내가 간절히 원하는 것, 내 간절한 기도가 내 야망을 위한 것인지, 내 이웃의 소망,
또는 하나님의 소망을 위한 것인지 곰곰이 생각해 봅니다.
‘이타적인 순수한 목적’인 경우, 굳이 강청기도를 안 해도, 하나님은 자연스럽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물며 강청기도까지 하는데, 하나님이 왜 응답해 주시지 않겠습니까!
▲“정의를 위한” 강청
눅18:1~8절에도 또 다른 강청기도의 예가 나옵니다.
여기는 ‘불의한 재판관’에 대해 탄원하는 ‘억울한 과부’의 강청 비유입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한을 풀어 주시리라 눅18:8
이 구절을 [쉬운성경]은, 하나님께서 속히 그의 백성들에게 정의를 베푸실 것이다. 라고 번역했습니다.
강청기도의 주인공의 탄원은 “정의”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내 이기적인 사욕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밤낮 부르짖는 하나님의 선택된 백성들의 간청을 듣지 않으시고 오랫동안 미루시겠느냐? 눅18:7
이렇게 반어적으로 묻는 것은, 강조법의 한 형태로,
하나님은 반드시 자기 백성들의 간청을 들으신다는 강조적 표현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나의 간청은… 쉽게 응답되지 않고, 아주 어렵사리 진행됩니다.
하나님이 성경에 거짓으로 약속 하신 것도 아니요,
내 간청의 내용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것이 만약 ‘정의’를 위한 것이었다면…
오랫동안 미루시겠습니까? 눅18:7
내가 신앙의 목표를 ‘나의 성공, 부유, 출세’에 고정할 때, 강청기도를 많이 하는 것 같습니다.
반대로 목표를 ‘하나님 나라와 그 의, 미 전도종족 복음화, 이웃 잘 되기’에 둘 때,
강청기도는커녕, 게으른 기도도 잘 안 하는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