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하이라이트 - 글로바와 동무
부활을 아는 사람은 세상 어디에도 없는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 같습니다. 사람은 한번 태어나서 한번 죽게 되어 있는 것이 정해진 원리입니다. 성경에도 사람은 한번 났다가 한번 죽게 되어 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설령 예수님 한분만 부활을 하셨다고 할지라도 보편적 인생사는 아닌 것입니다. 교회에서 배운 대로 말하고 옮기고 있는 것은 신앙인에 한하여 이해되는 편입니다. 주님을 믿기로 고백함으로써 당연히 부활의 사실을 경험으로 받아드린 것을 신앙이라 할 것입니다. 그것으로 부활의 증인처럼 신뢰를 쌓으면서 자신을 지켜갑니다. 그러나 그런 것으로 부활을 전적으로 아는 것은 아닙니다. 그 이상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없거나 요구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지금은 희미하게 아는 것일지라도 차츰 충분한 자리로 나아가는 것은 가능할 것입니다. 간혹 인간은 한계를 모르고 그 이상으로 알고자 하여 과욕을 부리다가 탈선을 하는 경우가 종종 나타납니다. 그런 부족한 상태에서나마 완전하게 믿음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의 힘이 아니라 은총의 힘이라고 믿고 있는 것입니다. 단지 지금 불확실한 처지에서 완전을 사모하고 그 힘을 의지한다는 사실입니다. 그 이상으로 아는 척하여 사람들을 속이는 자들이 있는가하면 그런 착각을 신앙으로 포장하여 미혹하는 이단자들도 생각 보다 많은 것도 현실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인간을 배려하시기 위해서 감당할 만큼만 허용 하신다고 믿는 것입니다. 그래서 부활 하신 주님께서는 공격적으로 부활을 주입시키지 않았습니다. 수위를 낮추어서 인간이 감당할 수 있는 수준에서 최대한의 고려를 한 가지씩 실례를 통하여 남겨주신 것입니다. 그 실례가 사건으로 나타나 있기도 하고 교훈으로 남아 있기도 합니다. 우리는 그런 배려를 살피고 상고하고 때로는 탐구도 하여 보다 깊은 곳으로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 부활은 그런 실례를 남긴 것이 확실합니다. 단지 그 빈도가 높지 아니하여 자칫하면 아무것도 건질 수 없게 될 위험이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부활은 감격 하나로 다 받아드릴 수 없는 매우 구체적인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적 감각이 둔한 경우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게 된 경우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 중에 하이라이트를 골라서 주님 부활의 폭 넓은 이해를 삼고 싶습니다. 그렇게 많지 않은 대신, 한 사건이나마 강도 높게 들어 있는 진실을 파악 하여야 될 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중에 글로바와 그 동무 비화를 꼭 알려 주고 싶은 하이라이트로 골랐던 것입니다. 우선 글로바는 약간의 이름만 알려졌을 뿐 별로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부활 후에 다른 어떤 제자보다 더 많은 시간과 수고와 정성을 글로바와 동무에게 쏟았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을 보아서 아는 이야기 일뿐 그 내용을 너무 방관하는 상태라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우리는 항상 특별한 사람에게 관심을 집중시키는 좋지 않는 습관을 버리지 못하고 사는 편입니다.
1. 글로바가 예루살렘을 떠난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관심을 가질 만한 대상이 아니라는 뜻으로 보아도 됩니다. 유명하지도 않고 특별하지도 않은 글로바와 그의 동무를 부활하신 주님은 쫓아 가셨다는 것이 특별합니다. 물론 누구도 글로바에 대한 소스를 제공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글로바가 중요 인물이었는지 그의 동무가 유력한 인재였는지 모릅니다. 단지 한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란 점은 큰 의미를 시사하다 보아야 될 것입니다. 독재 독존 독주 독단 독선 그런 것은 주님께 별로 의미가 없을지 모릅니다. 글로바가 동무가 좋아서 함께 다녔는지 아니면 그 동무가 글로바를 잘 따라주고 지켜주는 좋은 파트너인지 그런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문제는 서로가 중요시하고 아낀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은 그런 인재를 제자로 삼으셨던 기록이 복음의 시작부터 나타나 있습니다. 예수님 공생애 시작 첫날에 베드로 안드레 두 형제를 제자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 곁에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 형제도 제자를 삼았습니다. 그 이튿날은 빌립과 나다나엘 두 청년을 같은 동네 친구 사이인데 함께 제자로 삼고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사흘째에 갈릴리 가나에 혼인 잔치에 초대를 받고 참석하게 됩니다. 거기서 처음 표적을 행하심으로 메시야 시대가 출범된 것입니다. 그 사람이 누구든 동무가 있으므로 그 위인을 논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것이 사회이고 세상이라 하는 것 같습니다. 혼자서 사는 것은 인간으로서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2. 글로바와 그 동무가 예루살렘을 빠져나와 엠마오로 향해 가고 있을 때 한 동행자가 나타납니다. 같은 방향으로 가는 사람은 어느 길에서든 없는 데가 없습니다. 같은 방향으로 간다고 다 동행이라고 말하지는 않습니다. 글로바와 동무는 좋은 동행으로 열심히 길을 걷고 있었습니다. 동행을 찾지도 않았고 필요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런데 낯선 동행자가 접근해 온 것이 사건의 발단입니다. 글로바와 동무는 마음이 울적한 중에서 길을 가고 있었으므로 마음을 달래 줄 동행이 생겨서 무척 반가웠던 것을 깨달았습니다. 동행자는 글로바와 동무에게 무슨 이야기를 그렇게 열심히 하면서 길을 가느냐고 물었습니다. 글로바는 주저할 사이가 없었습니다. 동행자가 묻는 것으로 봐서 아직도 아무 소식을 모르고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친절하게 되물어 보았던 것입니다. 손님께서도 우리와 같은 도성으로부터 오시는 것 같은데 도성에서 일어나고 있는 소문을 못 들으셨느냐고 여쭈어 보았습니다. 손님은 모른다는 듯이 무슨 일이 있었느냐고 물었습니다. 글로바는 마음 놓고 자기들이 낙향을 하는 이유를 술술 다 이야기해 주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들어 준 다음에 글로바가 알지 못하고 있는 성경의 깊은 메시아에 대한 공부를 손님으로부터 다 배우게 되었습니다. 얼마나 진실하고 친절하게 잘 가르쳐 주던지 가슴이 뜨거워지는 느낌까지 받게 되었습니다. 손님의 이야기에 완전히 도취되어 있었을 때 어느새 목적지인 자기 집 앞까지 다다랐습니다. 손님은 더 지나 가려는 것 같아서 글로바는 놓치고 싶지 않았습니다. 날이 저물어 가는데 자기 집으로 가서 쉬었다가 날이 밝을 때 다시 갈 길을 가시면 아니 되겠느냐고 간청을 했습니다. 손님은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했습니다. 얼른 모시고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저녁을 드시게 떡을 차려 드렸습니다. 손님은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때 손님의 얼굴이 주님으로 보였다가 금방 사라지셨습니다. 앞에서 떡을 들고 기도하신 후 금방 주님은 보이지 않았습니다. 글로바와 동무는 그제서야 길에서 만난 손님은 주님이셨다는 것을 알았던 것입니다. 어디로 가셨는지 알수 가 없었습니다. 글로바와 동무는 너무 기쁘고 감사하여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주님을 만나지 못하였기 때문에 갈피를 잡지 못하여 주저앉아 있는 형편이었습니다. 그런 형편이었으니 얼른 가서 기쁜 소식을 전해 주려고 결심을 했습니다. 그래서 왔던 길을 되돌아가려고 집을 나섰던 것입니다. 글로바는 주님을 찾을 생각을 하지 않았습니다. 확실하게 본 이상 제자들에게 알리는 것이 더욱 급했던 것입니다. 그길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서 제자들의 은거지인 아지트로 찾아 갔습니다. 그곳은 제자들 외에는 아무도 찾을 수 없는 곳입니다. 보안을 철저히 하였고 문단속을 물샐 틈 없게 해 놓았습니다. 드디어 글로바가 들어가서 제자들에게 자기와 동무가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보았노라고 당당하게 증거하였습니다. 제자들은 크게 놀라기는 했으나 믿으려는 태도는 전혀 아니었습니다. 이미 몇 차례 그런 소리를 들은 바가 있었으므로 별것 아니라는 태도였습니다.
3. 바로 그 순간에 방 한가운데 우뚝 서있는 한 사람이 나타났습니다. 자세히 보니 예수님이 거기에 서 계셨습니다. 문을 여는 소리가 난 적이 없었는데 어떻게 들어 오셨는지 모두들 놀라서 두려워하고 있었습니다. 문으로 들어오지 않은 것은 틀림없는 것 같습니다. 모두들 사람이 아닌 유령이라고 생각 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방안의 분위기는 글로바의 말을 듣고도 아무 반응이 없었으므로 삭막하기만 했습니다. 그런 순간에 예수님이 직접 증거에 나선 것입니다. 글로바의 말대로 조금 전 까지 글로바와 함께 있었던 사실도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시며 나는 유령이 아니라고 해명을 하셨습니다. 유령은 뼈와 살이 없는데 나는 너희가 보는 바와 같이 뼈도 있고 살도 있는 너희들과 꼭 같은 사람이라고 밝혀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쾌히 납득 하는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 장면을 성경에는 이렇게 기록해 놓았습니다. ‘저희가 기뻐서 어쩔 줄 몰라 하였으나 믿지는 아니하였다’라고 의미 있게 밝혀 놓았습니다. 부활은 쉽게 이해가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대목입니다. 그 장소에서 예수님은 부활 후에 가장 확실하게 끝을 맺으시려고 작정하신 듯합니다. 먼저 보통 사람들처럼 보게 해주시려고 먹을 것을 주문했습니다. 그러자 얼른 구운 생선을 누가 내다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 생선 한 토막을 그 자리에서 맛있게 다 드셨습니다. 그러고 나서 제자들을 가까이 불러서 자기 손을 내어 보이시며 직접 만져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또 옆구리의 상처도 손을 넣어서 확인해 보라고 맡겼습니다. 식성을 보나 상처와 흉터를 보나 어느 것 하나도 유령이나 귀신은 아닌 것이 판명이 되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믿던 믿지 않던 그것은 증거 부족이 아니라 자기들 믿음이 부족하고 불완전하다는 것을 깨우쳐 주셨습니다.
4. 그렇다고 해서 쉽게 풀려지지 않는 것 은 방에 어떻게 들어 온 것인지 그 대답은 말씀하지 않으셨습니다. 너무 난해한 문제여서 묻어 두시기로 하셨는지 모릅니다. 그렇지 않다면 훤하게 알 수 있는 어린 아이라도 알 것을 일일이 일러 주는 것이 좀 유치하여 알겠으면 알고 모르겠으면 알 때까지 두고 보시려는 뜻이 아닐까 싶습니다. 더러는 그 일이 궁금하여 시험에 빠질 지경에 이르기도 합니다. 주님은 진리십니다. 엉터리는 절대로 용납이 되지 않습니다. 예수님께서 아무도 모르게 살며시 기적을 부려서 들어 오셨다고 생각하면 예수님을 비겁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 비상수단을 쓸 이유가 없습니다. 정정당당한 것이 진리의 방식입니다. 몰래 하는 행위는 예수님과 거리가 멀어도 천리만리라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99%의 정확한 힌트가 있어도 사람들은 자기 머리 굴리기에 너무 익숙하여 정답을 찾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글로바에게 약속을 하셨습니다. 그날 밤은 글로바와 함께 그 집에 유하기로 하고 저녁을 드셨습니다. 약속을 변경한다는 말씀은 일체 없으셨습니다. 그렇다면 그 악속은 유효합니다.
식탁에서 갑자기 주님이 사라졌을 때 성경의 증언은 보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보이지 않아야 할 일이 진행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다고 어디로 가버렸다고 생각을 굳혀 버립니다. 이런 데서 문제가 야기됩니다. 주님께서 유하시기로 한 후 그 집에 계셨습니다. 글로바가 주님이 보이지 않아서 자기도 할 일을 생각했습니다. 나 혼자 주님을 독점하고 있는 것은 도리가 아니라고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래서 다른 제자들에게 달려가서 주님 소식을 전하려고 서둘렀던 것 같습니다. 주님은 그런 글로바를 지켜보시면서 얼마나 글로바가 귀하게 보였을지 생각을 좀 해 보십시오. 글로바가 예루살렘으로 향해 달려갈 때 예수님께서도 함께 달려간 것 아니겠습니까? 글로바를 뒤따라가면서 글로바에게 힘껏 응원을 보냈을 것은 보지 않아도 확실합니다. 만일 눈에 띄었으면 방해가 된다는 생각 때문에 필요할 때까지는 보이지 않게 지켜보신 것이 틀림없습니다.
5. 드디어 글로바가 조심스럽게 그 집 문을 두드리며 글로바라고 알리자 안에서 문을 열어주었을 것입니다. 글로바가 들어가고 동무가 뒤따라 들어 갈 때 주님도 함께 들어갔음은 여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만일 주님이 먼저 들어가시면 혼란이 생길 가능성이 생깁니다. 그렇지 않다고 해도 글로바가 증거하는 것이 훨씬 효과가 크다는 것을 주님은 아셨습니다. 부활은 증인의 몫으로 마련해 주신 은총의 대표적 가치입니다. 보고 믿는 자보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욱 복 있는 자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자유를 그 누구도 제한할 수 없습니다. 현대 교회는 예수님을 꼼짝 못하게 압박하는 모양새입니다. 혹 조직 신학으로 주님을 묶어 놓으려고 하지 않는가 싶을 때도 많이 있습니다. 글로바는 예수님께서 보이지 않자 즉시 자기 할 일을 시작하며 주님의 자유를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보여 주시지 않았다가 나중에 잠깐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 일입니까? 약속하신 주님은 도대체 어디로 가신단 말입니까? 이럴 수는 없습니다. 그런 넋두리를 해대고 있을 유치한 글로바가 아니었습니다. 현대 교회의 똑똑한 제자들은 자기가 주님을 엄청나게 신학적으로 교권적으로 제한하고 압박합니다. 좀 더 글로바의 신앙을 배우면 좋겠습니다.
6. 스승과 제자는 공통분모 안에 존재합니다. 스승의 생각과 제자의 생각은 닮게 되어 있습니다. 제자를 보면 스승을 알고 스승을 보면 제자가 보입니다.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공존 하는 관계입니다. 새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사람들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제자끼리 사랑하여야 제자답습니다. 제자끼리 서로 다투고 경쟁하고 밀치고 짓밟으면 이미 제자의 자리를 상실한 것입니다. 제자라면 스승이 한 분일 것입니다. 교파와 교단이 범람하여 지지고 볶고 찢고 할퀴고 그러면 스승은 어쩌실 것 같습니까? 경쟁에 눈이 뒤집힌 선수들의 살벌한 승부욕을 잠재울 처방은 없겠습니까? 어쩌면 서로 올려 주고 밀어주는 사랑과 우정의 모델로 주의 종들이 앞장 서는 세상으로 회복 되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글로바와 동무를 쫓아가면서 눈에 뜨이지 않게 도움을 주시는 우리의 스승을 우리 시대로 돌아오게 할 수는 없겠습니까? 정녕 이대로 좋습니까? 글로바처럼 낙향은 어떻습니까?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