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백의흠] 개혁가들의 길을 따라 6

백의흠 목사 0 2017.10.10 18:04

 

a4bafc2254c8a52abcc1be13004371ea_1507672835_84.jpg Peace Palace (국제사법재판소)

 

9시쯤 올라와서 샤워를 하고 졸려서 10시쯤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일어났더니 오목사님이 주무시지 않고 셀폰을 보고 계셨다.

“몇시쯤 되었냐?”고 물었더니 “12시쯤 되었다”고 한다.

다시 억지로 잠을 청해 잠이 들었다.

가끔 오목사님의 코고는 소리에 잠이 깨기도 하였지만 다시 잠이 들었다.

한참 곤하게 자고 있는 데 알람 소리가 들렸다.

오목사님이 새벽 예배 가려고 4시 30분에 시간을 맞추어 놓은 알람 소리였다.

졸리기는 한데 이 시간에 잠이 깨면 다시 자기가 힘들다.

잠을 자지 못할 것 같아 일어나서 셀폰의 충전 상태를 보니 33% 밖에 되지 않아 다시 전기를 꽂아 놓고 기도를 시작하였다.

매일 아침마다 드리는 기도. 이왕 잠을 못 잘 것, 기도하기 딱 알맞는 시간이다.

소파에 무릎을 꿇고 한 시간 정도 기도 했다.

내가 기도 하는 동안에 오목사님도 일어나셔서 침대에 누워서 기도 하시는 것 같다.

내가 기도를 마치고 컴퓨터를 키니 그 때 오목사님이 다시 주무신다.

나는 졸린 몸을 이끌고 다시 인터넷을 보며 글들을 점검하고 쓴다.

 

그러다 보니 어느 덧 6시 30분이 되었다.

7시에 식사를 하는데 잠을 잘 수 있을까?하는 생각을 하면서 침대에 누웠다.

그러다가 잠이 들었다.

깜짝 놀라서 시계를 보니 8시 10분이었다.

급히 식당으로 내려가서 급하게 아침을 간단하게 먹었다.

오목사님은 속이 안 좋으시다고 아침을 안 드시겠다고 하신다.

아침을 먹고 올라와서 샤워를 하고 짐을 챙겨 호텔을 나왔다.

 

차가 9시 10분에 와서 20분에 떠났다.

오늘은 국제 사법 재판소가 있는 평화의 궁과 예정에는 없던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한다.

Hague의 downtown을 지난다.

헤이그는 군데 군데의 고층 건물과 고전적이며 아름답게 정돈된 4층 건물이고 가지런히 정열되어 있는 모습이다.

살고 싶을 만큼 조용하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전형적인 살고 싶은 도시이다.

캐나다의 오타와에 갔을 때의 느낌이다.

윗부분이 황금색 철문으로 되어 있는 네덜란드 국왕의 집무실을 지나 국제 사법 재판소가 있는 Peace Palace에 둘렀다.

아름다운 건물과 정원.

멋있었다.

평화의 궁전 뒤에 국회 의사당에 둘렀다.

이 곳에서 국왕이 일년에 한번 연설을 한다고 한다.’

많은 고등 학생들이 견학을 오기도 한다.

네덜란드 사람들의 신장이 세계에서 제일 크다고 하는데 이 곳에서는 뚱뚱한 사람들을 거의 볼 수 없다.

미국은 welfare를 너무 많이 주고 food stamp를 항상 주어 너무 많이 먹고 일을 안 해 뚱뚱한 것이 보편이 되었다.

 

정면에서 본 국회 의사당 건물은 앞에 분수대가 있는 큰 연못이 있고 멋있었다.

헤이그를 보면서 이 도시는 정말 살고 싶은 도시다.

도시 자체의 멋있음, 사람들의 모습.

우리가 머물러 있던 곳의 집들도 마치 한국의 성북동과 같은 단독 주택 부자촌 같았다.

예린이가 국제 변호사가 되어 국제 사법 재판소에서 일하면서 이 곳에 산다면 좋을텐데 하는 생각을 갖는다.

이런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에 요새 모슬렘의 테러로 고통을 당한다는 모습이 안타깝다.

네덜란드에서는 흑인이 많지 않은 것 같다.

흑인보다는 중동 사람들이 더 많다.

자주 히잡을 쓴 아랍 여자들이 많이 보인다.

고등학생들 가운데도 흑인은 안 보이고 아랍 여자 애들은 보인다.

 

국회 의사당 앞쪽 길 건너에 감옥이 있었다.

이 곳에서 초장기의 개신교들을 고문하는 곳이었다.

최초의 순교자가 재침례교 교인이었다.

그 곳에 그 당시 고문하던 모든 기구들이 다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고문으로 죽어간 성도들을 생각하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

나도 그 시대에 살았더라면 그 고문을 어떻게 견뎠을까? 나도 그렇게 죽어 갔을텐데

마음대로 하나님을 믿고 섬기며 신앙의 자유가 최대로 보장된 이 시대에 이 곳에 살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지 모른다.

네덜란드는 일반적으로 많은 종교들을 포용했다고 한다.

그래서 많은 핍박받는 개신교들이 이 곳으로 모였다.

독일 치하에서도 유대인들이 이 곳에 많이 모였다.

그리고 네덜란드 사람들이 보호해 주었다

그래서 지금도 모든 것을 포용하여 세계 최초로 동성혼을 허용했는지 모르겠다.

 

곧 이어 이준 열사 기념관에 갔다.

원래는 이곳은 예정되어 있지 않았는데 헤이그까지 와서 이준 열사 기념관에 안 가면 안 된다는 여론이 있어서 방문했다.

이준 기념관에 방문해서 안에 들어 가는 순간에 울컥하며 눈물이 나오려고 했다.

조국의 풍전등화속에서 나라를 뻬앗기지 않으려는 몸부림.

나도 울분이 나온다.

그 곳을 관할 하시는 관장님과 원장님 부부.

관장님은 장로님이었다.

한국의 이화여고에서 교편을 잡으셨다는 원장님이 30분동안 설명하시는데 흥분되셔서 울분에 차서 말씀을 하신다.

지금까지 이렇게 많은 목사님이 오신 적이 없으시다고.

우리가 시간이 없어서 짧게 강연 해 달라고 부탁하셨는데도 열정으로 말씀 하신다.

 

강연만 듣고 시간이 없어서 여기 중국 식당에 가서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다시 이준 열사 기념관에 가서 4층까지 사진과 기록물들을 보았다.

이 곳은 이준 열사가 묶었던 집이었다.

300년 된 집인데 구입하여 내부 수리와 구조를 바꾸었다.

이준 열사가 죽음으로 발견된 방과 침대도 있었다.

오늘 이준 열사 기념관을 방문하면서 한가지 사실을 알았다.

우리는 학교에서 이준 열사가 만국 평화 박람 회장에 못 들어가서 세계 사람들 앞에서 할복 자살한 것을 배웠는데 그 곳 방에서 죽음으로 발견되었다고 한다.

사인은 정확하지 않지만 아마 일본에 의해 독살 된 가능성이 있다.

나라 잃은 서러움, 약소 국가의 안타까움,

지금 한국의 상황도 풍전등화와 같은데 조선 시대의 당파 싸움처럼 자기만 옳다고 싸우고 있으니 안타까울 뿐이다.

상동 교회 집사였던 이준 열사가 나라를 살리는데 앞장서고 대부분의 기독교인들이 애국자였는데 이 시대의 우리 기독교인들은 진정으로 나라를 살리는 데 앞장 서고 있는 지 묻고 싶다

 

관장 장로님이 이 곳 네덜란드를 위해 기도 해 달라고 한다.

네덜란드가 20년 전만 해도 교회가 2만개가 넘었는데 이제는 8천개고, 주일에 암스테르담에서 교회 가는 사람이 1%도 안 된다고 한다.

자기가 사는 동네의 주민이 사백명인데 주일에 교회 가는 사람은 자기 혼자뿐이라고 한다.

그 곳에서 관장님이 이준 열사의 책을 주셨다.

 

이준 열사 기념관을 나오자 우리 일행은 독일의 Berlin으로 향했다.

6시간 30분 정도 걸리는데 중간에 쉬면서 그리고 들를 때 들르면 8시간 내지 9시간 걸린다고 한다.

네덜란드를 떠나면서 이들의 자전거 문화가 제일 부러웠다.

젊은 아가씨들이 자전거를 타는 모습은 여유도 있으면서도 부러웠다.

차와 어울리는데 아마 이들은 서로 익숙해 져서 마치 사람들이 걸어 가는 모습처럼 자연스럽고 위험하지 않은 것과 같다.

베를린으로 가는 도중에 집을 카메라로 보면서 은영이와 함께 카톡을 했다.

카톡을 하며 글을 쓰니 조금 어지러워 중단했다.

이제는 자는 시간이다.

밖의 경치를 보면서 잠깐 잠을 잤다.

네덜란드는 전부 평지이고 옥수수 밭과 밭이다.

가끔 한국의 비닐 하우스 같은 유리로 된 하우스가 있다.

그리고 밭에는 소들과 양, 염소들이 풀을 뜯어 먹고 있다.

 

잠깐 자고 나서 가게에 간 은영이와 카톡을 하니 휴게소에 왔다고 잠깐 화장실을 둘러 쉬라고 한다.

Bentheimer Wald 휴게소다.

그런데 여기서 보니 막 네덜란드를 벗어나 독일령에 도착한 것이다.

화장실에 가니 유로 50전의 돈을 받는다.

유럽은 화장실도 돈을 받는다고 하더니 단순히 소변을 보는데 돈을 받는다.

화장실은 물비누도 다 떨어지고 손 말리는 기계도 안 되고.

미국이 최고다.

 

10분 동안 쉬고 4시 30분에 다시 출발이다.

독일로 들어서자마자 처음으로 우리를 반긴 것은 풍력 발전소의 풍차이다.

그리고 목장에서 소똥 냄새가 풍겨 온다.

네덜란드는 전부 완전히 평평한 평지인데 여기서는 낮은 산과 언덕이 보인다.

사진에서 보던 독일의 농촌 집들이 보인다.

독일에 들어 오니 퇴근 시간이라 그런 지 교통이 막힌다.

그런데 길 옆에 폭스 바켄 차 딜러가 있는데 그 옆에 Kia Motor 딜러가 있었다.

그것을 보고 다들 환호성을 지른다.

네덜란드에서 한국 차를 거의 볼 수 없었다.

유럽차가 특히 독일차가 많았고 일본차들은 많이 보였지만 한국 차는 3일동안 기아차 한대를 보았을 뿐이다.

 

Hannover로 가는 길에 산들이 이제 제법 높고 산맥처럼 많은 산들이 보인다.

이제는 한국이나 미국과 비슷한 경치이다.

도로는 네덜란드와 마찬가지로 시속 120km이다.

독일 휴게소 Auetal에서 휴식을 취하며 미리 준비한 도시락으로 저녁을 먹었다

여기 휴게소 화장실도 70전이다.

이제 베를린까지 약 3시간, 365km이다.

2번 고속도로를 타고 2시간 동안 계속 달리다가 9시가 조금 지나 베를린을 160km 앞두고 사고가 났다.

경찰차가 달려 가고 앞의 차들이 엄청나게 밀린다.

이렇게 막히다가는 12시가 지나서 들어 가겠다.

반대편 차들은 쌩쌩 달리고 있는데.

조금 지나가 보니 승용차가 박살 나고 불이 나서 불자동차가 불을 끄고 차는 다 타 버렸다,

어떻게 달렸길레.

오 목사님이 “또 한사람 갔겠구나!”하고 탄식 하신다.

여기서 20분 정도 지체 했다.

우리  버스 운전사가 첫날, 둘째날 운전하신 70세 가까운 할아버지인데 속력을 내기 시작한다.

다른 차들을 빠르게 추월한다.

할아버지의 운전은 곡예와 같았다.

네덜란드의 좁은 길에서도 운전을 너무 잘 하셨다.

길이 공사를 해서 도착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 진다.

운전 기사가 아우토반 고속도로가 사고가 나고 공사가 많아서 traffic이 심해서 지방도를 타는데 길을 잃어 버렸다.

다시 멈추어서 GPS가 가르쳐 주고 지도를 보면서 찾아 간다.

그러다가 또 길을 잃어 버린다.

네 번이나 길을 잃어 버렸다.

그러다 보니 11시 전에 도착할 목적지가 12시가 훨씬 넘었다.

그런데 기사가 하루 4시간 운전하고 30분을 쉬어야 한다는 규칙이 있는데 안 쉬면 운전 라이센스를 빼앗긴다고 길에서 30분을 대기하고 쉰다.

48명을 기다리게 만든 것이다.

결국 30분을 쉬고 다시 GPS로 찾아 1시 5분에 Holiday Inn에 도착했다.

호텔은 깨끗하고 좋은데 오늘 아침 8시면 떠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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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4bafc2254c8a52abcc1be13004371ea_1507673012_1.jpg 헤이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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