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양칼럼

[이철수] 예배

이철수 목사 0 2021.03.19 18: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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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속의 수많은 사람들 중  예배를  질문한  사람이  있을까?

 

한  여인이 있다.    

그 분은  기구한  운명으로  동네에서 왕따를 당하고  살던  야곱 우물가의  여인이다. 

주지하는바 중동 지역의  정오  12시는  뜨거운  시간이다. 

사람들은 낮잠을  자거나  기도하는  시간이다.  

이  여인은  사람들의 시선을  피해  그 시간에 물을  길으러  나왔다.

그 곳에  예수님이 계셨다.

 

그녀와  예수님은  개인적으로는 가장 긴  13마디의  대화를 나눴는데  대화 중  여인은  예배에 관한  질문을  하였다.

"어떤 이들은  예루살렘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 하고, 우리들은 조상 때부터 부터 그리심 산에서  예배를  드려야한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리심 산에서는  저를  받아주지 않습니다.

저는  어디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합니까?   

한마디로  예배의 갈증을  주님께 하소연 하였던  것이다.   

 

이 여인은 남성과의 관계에서 몇 번의 사별과  몇 번의 버림을 받았는지는 모르나, 흔히 알듯 불륜  패륜의 여인은 아니었다는 것이  이 질문에  나타난다. 

그건 하여간 그녀의  삶은  얼마나  갈증에  찬  삶이었을까? 

 

허버트 브라운이 쓴  "예수와  그의 시대"란  책에 보면    이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신분이 적나라하게 나타나 있다.  

여인의  뒷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얼마든지  이혼을 하거나  버릴 수 있었다니, 얼마나 망나니  사회였던가?

 

예수님이  선지자임을  알아차린  이 여인은 '나는  언제나  그럴듯한  남자를  만나  남보란듯  살 수 있나요?' 하고 묻지 않고  나는 어디 가서 예배를 드려야 하느냐고  질문한다. 

이  가련한  여인의 질문은  인간이 하나님께  토로한  모든  질문가운데 가장 모범적이고  가장  거룩하고   가장 성경적인  질문이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다. 

"아버지께  참으로  예배하는 자들은 성령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이렇게  자기에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우리 성경에 "신령과  진정으로"라고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예배는 진리이신 예수님의 제물 되심과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다.

그러니 예배의  제단에 희생제물되신  예수님을 제쳐두고  인간의  열정과  정성과 화려 찬란함이 강조되는 것은 예배의 본질을  망각한  것이다.

 

예배는 목마른 사람들이  하나님을 찾아 나오는  행위이다.

하나님께서도  이런  사람들을  찾으신다 하지 않는가?

 

어쨌든 그 때가 온다고 하는데 그게 언제냐, 바로  지금이라고 하신다.

갈증의 한  여인이  심령 속에 하나님을 찾아  헤매고 바로  이런 여인을 만나주려고  정오에  우물가에  찾아오신  예수님(메시아)!

이 시간이야말로  참으로 예배하는 시간이요, 죄인과  하나님이 만나는  생수의 시간이 아닌가? 

 

몇 분의 시간이 지났을까?

여인은 마침내 비상한다. 

물동이를 놓고  저 어두운  왕따의 벽을 향해 돌진한다. 

돌진하며 외친다.  

 

여러분  동네  여러분!

지금  우물가에  한 분이 서 계십니다.  

이분은  저의  어두운 과거를  모두 알고 계십니다.  

나는 이분이  메시아이심을 믿습니다.

 

느닷없이  울려오는 왕따의 이 외침. 

예수님을  알리는 여인의 절규.

 

어서들  나오세요!

이 분을  뵈러  어서들  나오세요!

 

이것이  생수의 위력이요, 참  예배자의  당당함  아닐까?

이것이 진리 안의  자유  아닐까?

 

현대에 들어  사람들은  예배란  말을  너무  흔하고 쉽게 한다.

안식일 예배가 있는가 하면, 일요일  예배도 있다. 

그뿐인가?

대면 예배와 비대면 예배, 장례 예배, 환송 예배, 개업 예배, 무슨 무슨 감사 예배, 수요 예배, 금요 철야 예배 등등...

 

예배를 드린다는 데야  할 말은 없지만, 우리가  너무 예배 문화에 젖어있지 않은가 하는  우려도 든다.

장례니 개업이니 환송이니 하는 일에  예배란 말을  굳이 사용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안식일을 지키는 사람들은 주일 예배를  일요일 예배라고  약간  폄하한다.

 

모두 요한복음  4장의  예배에 대한 정의를  다시 한 번  돌이켜 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1. 우리에게  예배에의  참  갈증이 있는가?

2. 그런  우리를  하나님께서  과연 찾고 계신가?

3. 내 열성과 정성을 보아  하나님은 나를 보고 계실 것이라 착각하지 않는가?

4. 다시 말해, 주님이 나와  동행하신다고 착각하는 것은  아닐까?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역사의  주관자이시다

따라서  그 분을  예배함은  인간  삶의 기둥이다.

결코  문화의 한  현상일 수는 없는 것 이다.

 

요 근래  바이러스의  문제로  교회의 문이  닫혀있다.

공공 예배를 드리려하나  건물주가  펄펄 뛴다.

나 역시  과거 7년 동안  단  한 주도  결하지 않은 우리 요양원교회의 근처에도  못 간다. 

밖에서  기도하고 올 뿐이다.

 

바이러스의  창궐도 모두  하나님  섭리 하에서  일어난 일이다.

그 안에  뜻이 계실 터이요  우리는  그 안에서  자유함을  얻으면 그 뿐이다.  

 

나는  요새  시간이 널널하다.  

나는  안식일 예배도 아니고 일요일 예배도  아닌   매일 예배를 드리며 산다.  

매일  주님과  버성겨 산다.

참 기쁘다.   

 

이제 머지않아  바이러스 문제도  끝날  요량이다.

그러면  나는  살아남으신  요양원  성도님들을 향해  달려 갈 것이다.

거기엔  나의 누님도  계신다. 

치매를  앓고 계시는 우리 누나.

누나는  나와  아홉 살 차이신데  나만  보면  "내가  어렸을 때, 이 목사 많이 업어줬지." 그 얘기만  줄창하신다.

"알아요. 벌써  열 번째에요" 

"열 번  내가 언제 ,,,열번?"

누나는  벌컥 화를 낸 후 조금 있다  깔깔 웃으신다.

 

그나저나  다시 만나면  나를  알아보실  분들은  몇이나 되실까?

들리는 바로는   대  여섯 분이  소천 하셨다고 한다.

내 주변에도  가까운 친척이  세상을  떠났다.

 

문제는  교회를  다닌 적이 없는 사람들의  장례식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왔을  때이다. 

이름이  장례식이지 언제부터인지  내용은  예배의 형식을  밟게 된다.

나는  이런  경우  단호히  요청을  거부한다.

예수님을  믿지 않은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장례 절차를  따르면  그 뿐  죽은 사람의 시신을 놓고 새삼스레  말씀과  찬양과 기도를 드림은 그것이 참  예배인지  아니면  한  문화형태로서의  예배인지 나는  아직  분간을  못하고 있다.

 

불행하게도, 지금  교회에 다니 않는 친척 분들이 몇  분  계신다.  

이 분들의  연세가 높아 언제  무슨 일이 일어날지  예측을  못한다. 

만약  이런 상태에서  내게 장례에 관한  의논이  온다면  나는 어찌할까?

때가 때인 만큼 별 걱정을  다 하고 산다.

 

ⓒ 복음뉴스(BogEum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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