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은 하루에 몇 마일 정도를 운전하십니까? 저는 하루 평균 100마일 이상을 주행합니다. 자동차를 운전하다 보면, 예기치 못한 돌발적인 상황들이 발생합니다. 깜짝 놀랄만한, 아찔한 순간을 당하게 되면 대부분의 운전자들은 경적을 울립니다.
운전을 하면서 경적을 울리는 사람들을 크게 나누어 보면, 상황이 생기기 전에 경적을 울리는 사람, 상황이 생긴 다음에 경적을 울리는 사람, 두 경우 모두에 경적을 울리는 사람들로 나누어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 해당되십니까?
저는 첫 번째의 경우에 해당됩니다. 상황이 ‘종료’된 다음에는, 다른 운전자의 잘못으로 아무리 위급한 경우를 당했더라도 경적을 울리지 않습니다. 잘못을 저지른 운전자가 자기가 잘못한 것을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굳이 경적을 울려야 할 이유가 없다는 생각에서입니다.
경적은 잘못한 운전자를 ‘야단치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사고를 막기 위해서 사용하는 것입니다. 제 자동차 앞이나 옆에서 주행하는 자동차 중에 똑바로 주행하지 않고 지그재그로 주행하는 자동차가 있으면 경적을 울립니다. ‘울려준다’고 하는 것이 더 적합한 표현일 것 같습니다. 자동차가 똑바로 달려가지 않을 때는, 운전자가 졸음운전을 하거나 다른 일 - 동승자와의 대화 또는 문자 메시지 주고받기 등 - 에 빠져 있는 경우입니다. 이런 운전자는 잠에서 깨어나게 해주어야 합니다. 주의를 환기시켜 주어야 합니다.
형법은 범죄자를 처벌하는 것이 주된 목적이 아니라 범죄를 예방하는 것이 주목적입니다. 죄를 지으면 처벌을 받게 되니까, 범죄를 하지 말라고 경계하는 것이 형법이 추구하는 것입니다.
목회자들은 돌보는 성도들이 이단이나 나쁜 사조에 빠지지 않도록 끊임없이 경계심을 갖게 해주어야 합니다. 성도들이 이단이나 나쁜 사조에 빠진 다음에 그들을 돌이키게 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많은 교회들이 성도들이 이단이나 나쁜 사조에 빠지지 않도록 예방책을 강구하는 일에 소홀한 것 같습니다. 교회들뿐만 아니라 교협이나 목사회도 예전처럼 이단과 사이비 예방 대책에 열심을 내지 않고 있습니다. 소를 잃은 다음에 외양간을 고치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입니다. 사람이 죽은 다음에 약을 사러 가는 것은 바보들이나 하는 짓입니다.
많은 기독 언론도 ‘경적’을 울리는 일을 피하고 있습니다. 많은 기독 언론들이 기사를 쓰면서 눈치를 봅니다. 후원을 해 주는 교회나 단체, 후원을 요청해야 하는 교회나 단체, 광고를 해 주는 교회나 단체, 광고를 요청해야 하는 교회나 단체의 눈치를 살피기에 급급합니다. 그래서는 안 됩니다. 언론이 나침판이 되어야 합니다. 언론이 할 말을 해야 합니다. 언론이 울리는 ‘경적’이 듣기 싫을 수 있습니다. 듣기 싫어도 ‘경적’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경적’을 무시하면 일을 그르칠 수 있습니다. 큰 비난에 직면할 수도 있습니다.
언론이 울리는 ‘경적’에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을 멀리해야 합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기의 ‘속내(욕심)’를 들여다보고 있는 언론이 싫은 것입니다. 자기의 속셈(바르지 않은 생각이나 계획)을 들키고 속이 상해서 언론을 향하여 욕을 해대는 것입니다.
목회자도, 교계 단체도, 언론 기관도 경계를 늦추어서는 안 됩니다. 차선을 넘나들며 주행하는 운전자들 - 정통 교리를 가르치는 것 마냥 위장한 이단과 사이비들 - 이 우리의 목숨을 위협하지 못하도록 - 우리의 선량한 성도들을 미혹하지 못하도록 - ‘상황’이 생기기 전에 경적을 울려야 합니다.
내(우리)가 졸음운전을 하면서는, 내(우리)가 동승자와의 대화에 정신이 빠져 있거나, 내(우리)가 문자 메시지를 주고받느라 전방을 주시하지 않고 있으면, 경적을 울릴 수 없습니다. 경적을 울릴 수 있기 위해서는 내(우리)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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