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 17일(월요일) 오전에 뉴욕 교협 회관을 찾았다. 뉴욕 교협 제43회기 정, 부회장 선거에 출마한 입후보자들의 언론 토론회에 참여하기 위해서였다.
부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김전 후보를 바라보면서 안타까운 마음이 밀려왔다. 유권자들이, 기자들이 고령인 김전 후보의 건강에 관하여 많이 염려하고 있다는 것을 김전 후보가 익히 알고 있음이 분명했다. 간혹 일부러 제스처를 크게 하면서, 본인의 건강에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애써 강조하려고 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아무리 애를 써도, 숨길 수 없는 것이 있었다. 청력이었다. 기자 회견이 시작되기 전, 김전 목사의 가까이에 있던 사람이 "목사님!" 하고 네 차례를 불렀는데도, 그 소리를 듣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나이는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기자들의 질문을 알아듣지 못하는 경우들이 왕왕 있었다. 기자 회견의 사회를 본 유상열 목사가 마치 통역을 하듯이, 기자들의 질문을 풀어서 설명해주어야 했다. 유상열 목사가 사회자인지, 김전 목사의 통역원인지 비서인지 햇갈렸다.
김전 목사가 15-20년 전 쯤에, 뉴욕의 교계를 위하여 봉사하겠다는 생각을 했더라면 참 좋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봉사를 하는 것도, 때가 지나기 전에, 때를 놓지기 전에 해야 한다는 것을 절감했다.
장애가 있다고 해서 봉사를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다.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지만, 혼자서도 할 수 있는 봉사와 다수의 사람들을 이끌면서 하는 봉사는 다르다는 것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봉사건 사역이건, 여럿이 같이 하는 경우에는, 다수의 리더로서 하는 경우에는, 가장 중요한 것이 소통이다. 듣고 말하는 것이다. 제대로 들어야 제대로 말을 할 수 있다. 정확히 듣지 못하면 정확히 말을 할 수가 없다. 동문서답은 질문을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서, 바르게 듣지 못해서 생긴다. 듣지 못하면 소통이 되지 않는다.
"살 판 난 사람들 많지요. 이 핑게 저 핑게로 돈 뜯어 내는 사람들..." "김전 목사님, 1년 후에 회장되시면 그 많은 일정을 감당하실 수 없으실텐데, 왜 출마하셨습니까?"라는 나의 질문에 어떤 기자가 해 준 답이다. 잘 듣지 못하는 김전 목사의 가까이에 있으면서 사욕을 챙기는 목사들이 있다는 이야기였다. 김전 목사가 그걸 알고 있을까? 알고 있으면서도, 득표에 도움이 된다고 하니까, 그런 사람들의 말을 따르고 있는 것일까? 아니면, 제대로 듣지 못해 바른 판단을 못하고 있는 것일까?
왜 정년 퇴직 연한을 정해 놓았을까? 나이가 들면, 신체의 모든 기능이 저하되기 때문이다. 시력도, 청력도, 기억력도, 체력도 현저히 감퇴한다. 판단력도 흐려진다. 연륜에서 얻어지는 득보다는, 기능의 저하에서 오는 위험의 요소가 더 크다. 그래서 정년 퇴직 연한을 정해 놓았다. 목사들의 은퇴 연한을 정해 놓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헌데, 많은 목사들이 말로만 은퇴를 했다. 시무하던 교회에서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렀다. 퇴직금도 받았다. 은퇴목사, 원로목사의 칭호도 받았다. 그런데, 여전히 현역처럼 뛴다. 교계 관련 뉴스를 작성하다보면, 많은 예배의 설교자와 축도자가 은퇴한 목사들이다. 그런 목사들이 입에 달고 있는 말이 있다.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80세에 부르셨다"고... 모세는 120살까지 살았다. 120살을 살았던 사람에게 80세는, 80세를 사는 사람에게는 53세에 해당된다. 그러니 "하나님께서는 모세를 80세에..." 라는 말을 써서는 안된다. 모세가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과 대면하여 이야기를 했던 사람이다. 그런 모세와 자기를 동일시하는 것은 교만도 너무 심하지 않은가?
이야기가 곁길로 갔다. 기자들의 질문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해서, 제대로 듣지 못하니 질문의 핵심을 파악하지 못해서, 제대로 답을 하지 못하는 김전 후보를 바라보면서, 김전 후보가 젊었을 때 부회장 선거에 입후보했었더라면 참 좋았겠다 하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김전 후보가 부회장 선거에 입후보한 것이 자의였을까? 주위에서 덕을 보려는 사람들의 부추김에 넘어간 것일까? 어느 쪽이건, 바른 판단은 아니다. 안타까운 마음이 크다.
<뉴욕기독교방송 논설위원, 뉴욕 코리안 닷 넷 대표>
* 2016년 10월 22일 자로 발행된 <기독뉴스>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