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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화해는 법정에서가 아니라 제단 앞에서" 남일현 목사 설교

복음뉴스 0 2018.01.31 11:28
든든한교회, 아직도 분쟁이 계속되고 있는 교회이다. 예배당에서 예배를 드리는 든든한교회(담임 남일현 목사)와 친교실에서 예배를 드리는 든든한교회(담임 김상근 목사)가 한 울타리 안에 있다. 세상 법정에서 소송이 진행되고 있다. 언제 결말이 날런지 예측할 수 없다.

미국장로교 동부한미노회와 필그림교회(현재의 필그림선교교회)의 PCUSA 교단 탈퇴 관련 다툼은 사실상 종결되었지만, 그로 인한 앙금은 여전하다. 언제쯤 앙금이 가시게 될런지, 언제쯤 두 손을 마주 잡고 악수를 하게 될런지, 그런 날이 오기는 할런지 아무도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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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때에 남일현 목사가 "진정한 화해"라는 제목의 설교를 했다. 복음뉴스는 1월 28일 주일에 남일현 목사가 든든한교회의 주일 예배에서 한 설교를 동영상과 텍스트로 제공한다.



본문 : 빌레몬서 1장 1-7절   
제목 : 진정한 화해
설교 : 남일현 목사(든든한교회 담임)

목사로서 저는 중재를 서야 할 때가 있습니다. 특히 교인들 사이에서 문제가 생길 때 중재를 서야 합니다. 교회 안에서 분쟁이 생길 때 목사가 분쟁의 당사자가 되면 정말 안 되고, 목사가 중재를 서더라도 이단의 경우는 다르겠지만 일방적으로 어느 한 편을 들어도 안 됩니다.

그런데 중재라는 것이 참 힘든 일입니다. 중재가 이루어지려면 때로는 어느 한쪽이 양보를 하거나 자신의 권리를 포기해야 하고, 때로는 양쪽이 다 조금씩 양보를 해야 중재가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물론 본문은 양쪽이 아니라 한쪽이 결단하면 해결되는 문제였습니다.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빌레몬서 전체의 스토리를 알아야 합니다. 빌레몬서는 사도바울의 서신들 중 가장 짧은 서신입니다. 빌레몬서에는 주로 세 명의 사람들이 나옵니다. 바울과 빌레몬, 그리고 본문에는 안 나오지만 오네시모가 나오는데 이 세 사람 사이에 얽히고설킨 사연이 있습니다.

사도바울을 중심으로 쉽게 관계를 정리하자면 이렇습니다. 바울과 빌레몬은 사이가 좋았습니다. 빌레몬은 바울로부터 복음을 들었으니 바울에게 영적인 빚을 진 사람입니다. 바울과 오네시모 역시 사이가 좋았습니다. 오네시모도 바울로부터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문제는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관계였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들이 처음부터 사이가 나빴던 것은 아닙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종이었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였는데 그런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빌레몬에게 불만이 있었기 때문은 아닙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돈을 훔쳐 도망을 쳤던 겁니다. 그런데 당시 로마법에 의하면 주인에게서 도망친 노예는 사형에 처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는 도망을 친 것만으로도 사형에 해당되었는데 돈까지 훔쳐 도망을 쳤으니 잡히면 끝장인 상황이었습니다.

나중에 더 살피겠지만 빌레몬은 사랑이 많은 사람입니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종들에게도 그리 나쁘게 대우하지는 않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모는 빌레몬의 사랑을 배신해서 도망을 쳤는데, 게다가 빌레몬의 재산까지 훔쳐서 도망쳤던 노예였습니다. 

우리가 빌레몬의 입장이라면 어떻겠습니까? 제3자의 입장에서는 쉽게 용서라는 말이 나오겠지만, 내가 그 입장이라면 쉽게 용서하지는 못할 상황 아닙니까? 배신을 당했고, 물질적으로 큰 손해를 봤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한참 아랫사람에게, 원래는 사람으로 취급하지도 않는 노예에게 그런 배신을 당했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우리도 배신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랑을 줬던 사람에게서 배신을 당하기도 하고, 내 재산을 축내고 도망친 사람도 있습니다. 저 사람은 절대로 나를 배신해서는 안 되는 사람인데, 그런 사람들이 배신했을 때 어떻게 반응해야 하는지가 빌레몬서를 통해 깨달아야 할 교훈입니다.

물론 본서에 나오는 갈등은 사람들 사이에서 생긴 갈등입니다. 하지만 갈등이 있는 사람들이 진정한 화해를 누리길 원한다면 감정이 아니라 신앙이 개입되어야 합니다. 특히 신자들의 경우는 더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불쌍히 여기는 감정과 용서의 감정이라면 개입이 되면 좋겠지만, 배신감으로 인해 생긴 상한 감정, 악감정이 개입이 되면 화해가 어려워집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본서 안의 갈등은 굉장히 간단히 해결될 수도 있는 문제였습니다.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받아들이고 품어주면 모든 것이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는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지은 죄는 작은 죄가 아니라 죽을 죄였다는 것이 문제였습니다.

그런 배신자를 용서하고 사랑으로 감싸주는 것이 쉽다고 생각하는 분은 오늘 설교가 와 닿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를 배신하고 뒤통수를 친 사람, 나에게 금전적으로 막대한 손해를 입힌 사람을 용서하는 것이 어렵다고 느껴진다면 오늘 설교가 와 닿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신자들 사이에서 생긴 갈등은 아무리 세상적인 갈등이라도 결국 신앙과 연결이 됩니다. 그러니 세상적인 방법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지 말고 신앙적인 방법으로도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그렇기에 진정한 화해가 있으려면 하나님과의 화해부터 이루어져야 합니다.

신앙 안에서 갈등의 문제를 풀어나가야 합니다. 본서에 나오는 사람들은 그런 방법으로 갈등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오네시모는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면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고 싶다는 마음을 품었습니다. 1절. “그리스도 예수를 위하여 갇힌 자 된 바울과 및 형제 디모데는 우리의 사랑을 받는 자요 동역자인 빌레몬과”

당시 바울은 로마감옥에 갇힌 상황이었는데, 10절, “갇힌 중에서 낳은 아들 오네시모를 위하여 네게 간구하노라”오네시모는 감옥에서 바울을 만나 복음을 듣고 회심했습니다. 오네시모가 수감자로 바울을 만난 것은 아닙니다. 비록 바울이 감옥에 갇히기는 했지만 행28:23절 이하에도 나오는 것처럼 비교적 자유롭게 많은 사람들을 접견하며 복음을 전했는데, 오네시모도 그런 케이스였습니다.

오네시모는 노예로 있다가 도망을 쳤기에 자유를 만끽하고 싶어 했을 것이고, 주인의 재산을 훔쳤기에 돈도 있었습니다. 아마 그는 훔친 돈으로 로마의 화려함에 빠지고 환락에 빠졌을 겁니다. 그랬던 그가 어떻게 바울을 만났을까요? 바울이 적극적으로 그를 붙들었기 때문입니까?

분명한 것은 오네시모가 바울을 만난 것은 바울의 의지가 아니라 오네시모의 의지였다는 겁니다. 바울은 감옥에 갇혔기에 오네시모를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었고, 오네시모가 면회를 와야만 만날 수 있었습니다. 오네시모가 왜 바울을 만나고 싶어 했는지 정확한 이유는 성경에 나오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가 화려한 로마의 거리를 마다하고 감옥으로 향했다는 것 자체에서 그의 심적인 변화를 찾을 수 있습니다. 그는 화려한 로마의 삶과 자신의 삶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겠고, 화려함의 끝은 허무뿐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수도 있겠죠. 분명한 것은 오네시모는 자원하는 마음으로 바울을 찾았다는 겁니다. 우연히 바울을 만난 것이 아니라 자기 발로 바울을 찾은 겁니다. 이런 적극적인 자세가 그를 살렸습니다.

요즘 불신자들을 보면 적극적으로 복음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복음을 피하려고만 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신앙에 대한 관심이 없고 그저 이 세상에서 어떻게 하면 더 편하게, 더 화려하게 살 지에만 관심이 많기 때문입니다. 너무나 편한 세상을 살다보니 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절실함이 부족합니다. 요즘은 복음을 듣지 못해 못 믿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불신자들도 신앙이 무엇인지 대충은 알고 있지만 복음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그 사람입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복음에 대해 관심이 없었다면 일부러 감옥까지 찾아가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약 그랬다면 그의 인생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잡혀서 죽었을 수도 있겠죠. 

하지만 그에게는 뭔가에 대한 목마름이 있었습니다. 그 목마름이 그저 세상적인 목마름이었다면 오네시모는 더 세상 깊숙한 곳을 향해 나아갔을 겁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영적인 목마름, 하나님을 향한 목마름이 있었기에 바울을 찾았고, 바울을 통해 복음을 듣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는 빌레몬과의 화해 이전에 하나님과의 화해를 이룬 겁니다. 물론 지금 우리는 이미 복음을 받아들이고 예수를 믿은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여전히 필요한 것은 신앙에 대한 절실함입니다. 더 많이 하나님을 만나고 말씀을 듣고자 하는 열정과 목마름입니다.

마지못해 끌려가듯이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신앙생활을 하겠다는 절실함이 필요합니다. 그런 절실함과 그런 믿음이 있을 때 우리 삶이 변화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갈등의 문제도 해결점을 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과의 화해부터 이루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과의 화해는 구체적으로 어떤 방법으로 이루어지는 겁니까? 하나님을 절실하게 찾는다고 저절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화해를 이루려면 먼저 회개가 선행되어야 합니다. 오네시모가 예수님을 만나면서 그는 자신이 지은 죄들을 회개했을 겁니다.

그 다음에 필요한 것은 나 때문에 피해를 입은 사람에게 회개하는 겁니다. 오네시모는 빌레몬에게 저질렀던 잘못을 우선적으로는 하나님께 회개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 화해를 이룬 것으로 멈추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과정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오네시모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려면 더 이상 도망가지 말고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빌레몬에게 돌아가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바울이 원했던 것은 오네시모가 빌레몬에게 돌아가 다시 빌레몬의 종으로 사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오네시모를 복음의 일꾼으로 만들길 원했습니다.

그러나 법적으로 오네시모는 아직도 빌레몬의 소유였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미 이 스토리의 결론을 알고 있지만 당시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무조건 용서해주리라는 보장은 없었습니다. 그래도 돌아가는 것이 옳은 선택이었습니다. 설령 빌레몬에게 맞아 죽는다고 하더라도 오네시모의 선택은 빌레몬에게 돌아가는 것이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야만 진정한 화해가 가능해집니다.

이것은 우리에게도 해당되는 일입니다. 우리가 만약 하나님 앞에서 죄를 짓는다면 하나님께 진심으로 회개해야 용서를 받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지은 죄가 있다면 하나님께 우선적으로 회개를 한 후 사람들에게도 회개를 하고 배상할 것은 배상해야 합니다. 만약 목사가 간음죄를 저질렀거나 성폭행을 저질렀다면 하나님께 회개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고, 관련된 사람들과 교회 앞에 회개해야 합니다.

그리고 피해를 입은 사람이 있다면 최대한도로 보상을 해주어야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고 상처받은 교인들과 피해자들에게는 진정어린 사과를 하지 않고 그저 하나님께 회개를 해서 용서받았다고 말한다면, 그런 자세가 교인들에게 더 큰 상처를 줍니다.

그러니 말로만 회개하지 말고 결단해야 할 일이 있다면 결단하십시오.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주고 피해를 입혔다면 하나님께 회개하고, 그 사람에게도 찾아가십시오. 욕을 먹고 창피를 당하더라도 감당하겠다는 자세를 가질 때 진정한 화해를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지금까지는 가해자 측에서 보여야 할 진정한 화해를 위한 노력이었다면, 피해자 측에서 보여야 할 노력도 있습니다. 피해자가 신자라면 신앙적인 방법으로 이 문제를 풀어야 합니다. 어떻게 말입니까? 한 마디로 하면 용서겠죠. 먼저 용서함을 받고 사랑을 받았으니 사랑으로 용서해주라는 겁니다.

본서를 보면 바울이 일반적인 순서를 바꾸면서까지 강조하고 반복한 말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사랑입니다. 1절에서 바울은 빌레몬을 사랑을 받는 자라고 소개했습니다. 사랑을 많이 받은 네가 사랑을 베풀라는 겁니다. 사랑을 베풀되 오네시모까지 사랑하라는 겁니다.

이런 뉘앙스의 말씀이 5절에도 나옵니다. “주 예수와 및 모든 성도에 대한 네 사랑과 믿음이 있음을 들음이니”5절은 바울의 일반적인 인사말로 볼 수도 있는데, 주목해야 할 것은 언급하고 있는 단어의 순서입니다. 바울은 다른 서신서에서는 일반적으로 믿음을 먼저 언급했습니다. 엡1:15절, “너희 믿음과 모든 성도를 향한 사랑을 나도 듣고” 골1:4절을 봐도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너희의 믿음과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을 들었음이요”

꼭 그렇게 하라는 법은 없지만 일반적으로는 믿음 다음에 사랑 순이었습니다. 그런데 빌레몬서에서는 믿음보다 사랑을 먼저 언급합니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된 것일까요? 빌레몬이 얼마나 사랑이 많은 사람인지 이번 기회에 증명해 보이라는 겁니다. 배신자이자 도망자인 오네시모를 용서하는 것이 그 증거라는 겁니다.

사랑으로 용서하는 것이 사랑을 받고, 사랑을 하는 자의 삶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들에게 사랑을 많이 받은 사람입니까? 우리가 정말 사랑을 많이 받았고 사랑이 많은 사람이라면 나에게 해를 끼친 사람까지도 사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물론 내 앞에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이 없다면 용서가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오네시모와 같은 사람이 태클을 걸면 용서가 어려움을 깨닫게 됩니다.

제3자의 입장에서는 용서를 하는 것이 너무나 로맨틱하고 당연한 일이지만, 용서를 해야 하는 당사자에게는 피를 말리는 일일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물질적인 손해 그 이상을 끼쳤다면 어떨까요? 빌레몬의 가족에게 해를 끼쳤어도 용서가 가능하겠습니까? 이 문제는 다음주일에 더 살피겠습니다.

2절은 빌레몬의 가족에 대한 소개입니다. “자매 압비아와 우리와 함께 병사 된 아킵보와 네 집에 있는 교회에 편지하노니”학자들은 압비아를 빌레몬의 아내로, 아킵보는 빌레몬의 아들로 봅니다. 빌레몬의 집안은 다들 신실하게 예수를 믿었는데, 신앙의 내공이 대단했습니다. 빌레몬은 자신의 집을 교회로 만들었고, 바울의 동역자였습니다.

게다가 그의 아들 아킵보는 바울과 함께 병사 된 사람, 즉 영적인 전우였습니다. 바울이 이들의 이름을 거론한 것도 다 이유가 있습니다. 빌레몬의 아내의 이름을 거론한 것은 오네시모가 돌아갔을 때 빌레몬의 아내가 중재 역할을 해주기를 기대했기 때문으로 해석합니다.

빌레몬의 아들도 사역자였을 텐데 사역자 가정이라면 오네시모의 케이스도 사역자 가정답게 해결하라는 겁니다. 네가 그렇게 사랑이 많은 자이고, 너희 집안이 그렇게 믿음의 집안이라면 이번 문제도 사랑으로 잘 처리하라는 겁니다. 자발적으로 용서하라는 겁니다.

빌레몬서에는 세 명의 사람들이 주로 등장하지만 사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분은 예수님이십니다. 그러니 예수님을 빼고는 본서의 스토리가 진행되지 않습니다. 만약 오네시모가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빌레몬에게 돌아갈 생각을 했을까요? 더 멀리 도망가면 도망갔지, 자발적으로 빌레몬에게 돌아가려고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만약 빌레몬이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오네시모를 용서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오네시모를 합법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데 굳이 배신자이자 도망자를 용서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만약 사도바울이 예수 안에 있지 않았다면 굳이 남의 일에 끼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까요?

그러니 바울과 오네시모, 빌레몬 중 어느 한 명이라도 예수를 믿지 않았다면 본서의 목적을 이루지 못했을 겁니다. 그렇다면 오네시모가 바울을 찾지도 않았을 것이고, 빌레몬에게 돌아가지도 않았을 것이고, 빌레몬도 오네시모를 용서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극단적인 변화의 결정적인 계기는 결국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를 믿고 변화를 받아야 우리 삶도 새롭게 변하게 될 줄 믿습니다. 그럴 때 오네시모처럼 도망자가 아니라 다시 새로운 삶을 살 수 있고, 그럴 때 빌레몬처럼 원수까지 용서하고 사랑할 수 있습니다.

그럴 때 바울처럼 예수님이 하신 중재사역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 오늘 우리가 살핀 내용입니다. 오늘 우리도 용서를 하고 사랑을 베푸는 삶을 살고,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삶을 살려면 예수 안에 있어야 합니다. 다른 것으로는 안 됩니다.

화해를 원한다면 안일함이 아닌 절실함으로 주님을 붙드십시오. 하나님과의 화해를 먼저 이루십시오. 사랑을 받았다면 사랑을 베푸십시오. 그것을 용서를 통해 보여주십시오. 그럴 때 진정한 화해를 이루게 될 줄 믿습니다. 신자답게 신앙을 통해 진정한 화해를 이루길 바랍니다. 진정한 화해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앞에서 이루어지는 줄 믿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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