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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구자들" 18 - 아름다운 기부자 세브란스 장로

조경현 0 2017.12.26 17: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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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기부자 세브란스 장로

 

한국에 직접적으로 내한하여 복음을 증거 하는 선교사는 아니었지만, 복음을 효과적으로 증거 하기 위한 수단으로서 병원을 설립하는데 물질로 헌신한 한 사람, 세브란스를 기억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것이라 생각한다. 아무리 복음을 전하기 위한 뜨거운 가슴이 있더라도 물질이 없이는 매우 불편하고 더디다. 그런 의미에서 미국의 부호 세브란스(Louis H. Severance, 1838-1913)를 나누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물질의 복을 얻는 이들은 어떤 신앙과 자세로 주의 나라를 위해 사용해야 할 것인가를 바르고 가르쳐 주는 표본이라 할 수 있다. 특별히 그는 한국의 세브란스 병원과 연결되어 있으며, 뿐만 아니라 자신의 일생을 주의 복음을 위해 아름답게 기부하다가 간 하늘의 천사였다. 우리는 먼저 그의 일생을 중심으로 한국에서의 기부와 그의 삶 후반의 기부의 삶의 흔적으로 찾아 볼 것이다.

 

세브란스는 183881, 오하이오주 클리블랜드에서 아버지 솔로몬 세브란스와 어머니 메리 헬렌 롱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조상들은 예로부터 의사집안으로서 의술을 가지고 공익을 위해 살았던 사람들이었다. 그의 외조부 데이비드 롱 2세는 미동부 매사추세츠에서 외증조부의 뒤를 이어 의사훈련을 받고 의사로서 생활을 하였다. 그의 친조부 로버트 세브란스도 역시 의사로서 루이스의 외증조부 밑에서 의사훈련을 받고 의사가 되었으니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아마 이런 연유로 루이스의 아버지와 어머니가 서로 결혼을 하게 되지 않았나 싶다. 기록에 의하면 세브란스의 조상은 로마시대부터 의사 집안이었다고 하니 실로 가풍은 무시할 수 없는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한편, 루이스의 가계도를 보면, 의사뿐만 아니라 사업가, 은행가 출신들이 많다. 이는 루이스의 삶의 미래를 나타내 주는 것이리라.

 

루이스의 집안은 사회 공익을 위해 일하는 것과 또한 정착하는 곳에 교회를 세우는 일에도 앞장섰다. 예켄데, 그의 외조부 데이비드 롱 2세는 1817년 클리브랜드의 올드스톤교회(Old Stone Church)를 세우는데 창립멤버였다. 루이스는 특별히 아버지가 아닌 의사집안 분위기와 자선단체 사업을 소중히 여겼던 어머니 밑에서 성장하였다. 왜냐하면 그의 아버지 솔로몬 세브란스는 루이스가 태어난 해인 1838년 결핵으로 일찍 소천 하셨기 때문에 유복자였다. 사실 그의 아버지 역시 클리블랜드에서 커틀러-세브란스 상회란 상업일을 하였고, <클리브랜드 노예제도 반대단체>를 조직하여 총무일을 보기도 하였다. 루이스의 어머니는 22세에 남편을 일찍 여의고 홀로 루이스와 한 살 위인 그의 형, 솔론 세브란스를 키웠던 것이다. 그녀는 평생 독신녀로 살면서 두 아들을 키우고 기독교 사회봉사로 일생을 마쳤으니 대단한 여인임이 틀림없다. 그러나 루이스는 독실한 기독교 집안에서 자랐기 때문에 평생 술, 담배, 도박 등은 손에도 대지 않았다.

 

루이스는 자연스럽게 그의 어머니의 영향을 받으며 자랐음이 틀림없다. 성장한 루이스는 대학에는 진학하지 않았으며, 1856년 클리브랜드 상업은행에 취직하여 8년간 일하고, 1864년 필라의 티투스빌로 이주하여 10년간 사업을 하다가 1876년부터 1895년까지 스텐다드 석유회사의 회계 담당자로 일하면서 많은 돈을 벌었다. 그는 세계적인 부호 록펠러의 절친한 동료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이 회사의 대주주로서 자신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는 블리브랜드의 우드랜드가 장로교회 시무장로였다. 그는 뉴욕의 미국 북장로교 해외선교부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1900년 이후에 약 50만불을 선교를 위해 기부하였다. 그리고 오하이오주 우스터대학과 오벌린대학, 그리고 웨스턴 리저브대학교 재단이사였다.

 

바로 이러한 때에 한국에 의료선교사로 와 있었던 캐나다 선교사 애비슨(O. R. Avison)1899-1900년까지 안식년을 얻어 미국에 갔다가 병원 설립을 위한 강연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하였다. 당시 서울에는 제중원을 비롯한 보구병원, 시병원 등 병원은 있었지만 재래식이고 의료시설 자체가 빈약하여 한계를 느끼고 새로운 근대병원을 설립하고자 하는 계획을 세운 상태였다. 이 병원 프로젝트 담당자가 바로 에비슨이었다. 그는 먼저 토론토에 가서 그의 친구인 건축가 고든(Henry B. Gordon)을 만나 도면을 얻었으며, 1만 달러의 기금을 모으기 위해 19004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만국선교대회에 참석해 <의료선교에서 우의>란 제목으로 강연을 하였다. 이때 그 강연을 세브란스가 듣고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 어디서 일어날지 모른다.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입을 열 때, 우리 주님은 역사하는 것이리라. 강연을 통해 감동을 받은 클리브랜드의 거부, 세브란스는 에비슨의 연합 의료기관 설립에 동의하고 1만 달러를 기부하기로 약속하였다. 이때 에비슨이 감사의 인사를 건넸을 때, 독지가 세브란스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말을 남겼다. “You are no happier to receive it than I am to give it." 받는 당신의 기쁨보다 주는 나의 기쁨이 더 크다라고 했다. 1만 달러를 받아 온 에비슨은 먼저 필요한 대지를 장만하려고 했지만, 마땅한 곳을 찾을 수 지체되기도 하였다. 하지만 세브란스 병원이 오랫동안 자리 잡고 있었던 남대문 밖에 대지를 장만하여 건축하는 일만 남았다. 하지만 이제는 또 다른 문제를 만나게 되었는데, 평양 주재 선교사들이 병원설립보다는 복음을 증거가 중요하니 1만 달러 가운데 절반인 5천 달러를 사용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 사실을 세브란스가 알고 현재 할 일은 병원 건립인데, 만일 5천 달러로 가능하다면 절반은 되돌려 주십시오.”라는 말에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다.

 

병원을 건축하는 일도 쉽지 않았지만, 그 과정 또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그러나 에비슨의 수고와 부족한 비용 5천불을 세브란스가 더 기부함으로 19021127, 추수감사절 오후 3시 주춧돌을 놓은 정초식이 거행되었다. 병원건물 건축은 자재값 인상 등으로 미북장로교 선교부에서 1만 달러를 후원함으로 1904923일 오후5시 새 병원의 봉헌식이 거행되었다. 병원시설은 입원실은 40개의 침대로 놓을 수 있었고, 격리병동 6개 침대가 놓일 예정이었다. 이 봉헌식에는 에비슨 부인이 병원문을 열쇠로 처음 열었고, 에비슨이 병원 건립에 대한 경과보고를 한 후에, 마모삼열과 원두우 목사가 봉헌식 축사를 하였고, 다시 에비슨이 건축 중에 겪은 애로사항을 설명하였다. 그리고 병원명은 기부자 세브란스의 이름을 따서 <세브란스기념병원>이라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최초의 근대식 세브란스 병원이 출발하게 되었으며, 병원에는 신분고하를 막론하고 돈 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진료를 받으러 오면 무료로 치료해 주기도 하였다. 어떤 이들은 고마움을 표하기 위해 닭 한 마리를 가지고 오기도 하고, 달걀, , , 조 등을 들고 오는 한국인들도 있었다. 새 병원에서 첫 번째로 시술을 받은 사람은 어떤 백내장 환자였다.

 

에비슨은 한국인 의사를 양성하기 위해 세브란스 의학교와 간호학교를 세워 교육에 힘쓰기 시작했다. 학생들의 학년을 정하고, 과목도 구분하여 해부학, 화학, 세균학, 약물학, 생리학 등 강의를 진행하였다. 드디어 190863, 오후 4, 7명의 졸업생이 배출되었는데, 김필순, 김희영, 박성양, 신창희, 주현칙, 홍석후, 홍종은 이다. 이들은 한국 최초로 서양의학을 체계적으로 습득하고 졸업한 의과대학 졸업생들이었다. 물론 이들 이전에도 서양의원을 개업한 이들이 있었는데, 박일근이다. 그는 1898년 일본 웅본현 의학강습소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세브라스를 졸업한 김필순, 이태준 같은 이들은 자신의 고향에 내려가서 개업을 하여 의술로 봉사하였다.

 

다시 세브란스 장로에게로 돌아가 보면, 그는 지속적으로 주의 나라를 위한 사역과 기부에 앞장서서 일했다. 세브란스는 70세 생일을 맞아 1907128일부터 16개월간 자신의 주치의와 함께 미북장로회 선교지를 순회하였다. 이때 그는 중국과 만주에서 4개월, 일본에서 2개월, 인도에서 4개월, 그리고 한국에서 3개월 동안 머물렀다. 이때 본국으로 귀국하면서 언제 안식년이 되어 귀국하느냐 질문하자 1908년 이지만 할 일이 많아 언제가 될지 모른다고 하자, 세브란스는 아무쪼록 그 해를 넘기지 말고 오십시오. 당신이나 나나 늙어 가는 사람이니 의료사업에 있어 한 가지라도 열심히 하려면 시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애비슨을 많이 걱정해 주었다. 아마 그의 나이가 그런 말을 할 수 있도록 노쇠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럼에도 그는 노년에도 왕성한 주의 일을 감당하였다.

 

1908년 장로교 해외선교본부 이사회의 이사로 피선되기도 하였고, 해외 선교사와 통신, 기독교 교육의 향상, 국내와 해외 교회의 발전을 위한 여러 가지 일들을 하였다. 그리고 장로교 대학위원회 위원, 장로교 총회 부회장의 직분을 맡아 감당하였다. 19064월에는 평신도 선교운동에도 참여하여 활약하였고, 19105월에는 영국 에딘버러 세계선교대회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그는 참으로 지칠 줄 모르는 에너지를 가지고 전세계를 향해 주의 복음을 위해 헌신한 아름다운 기부자이었다. 한 가지 더 한국선교와 관련하여 추가할 것은 1910522일에는 서울 새문안교회에 오르간을 기증하기도 하였다. 그는 그의 말년에 한국을 선전하기 위해서 동분서주하였으며, 그는 병원만 기증한 것이 아니라 한국 선교부의 자금을 모아 보내기도 하고, 20명의 신임 선교사를 한국에 파송하는데 앞장서기도 하였다. 그는 한국교회를 위해 음으로 양으로 보내는 선교사로서 그 책임을 다 하였던 것이다.

 

세브란스는 1913625일 밤, 1015, 유크리트가 811번지 사위 알렌 박사 집에서 멋지게 서거하였다. 그리고 레이크 뷰 공동묘지에 먼저 간 가족들 품으로 돌아갔다. 이 날 그의 형수 에밀리의 일기를 보면,

 

“625, 수요일. 가족들은 <루이스>의 마지막 아침이 되리라 느꼈다. 잠시 후에 루이스의 증세가 약간 나아지는 듯 했지만 희망은 없었다. 밤에 엘리자베스의 집에 갔다가 (에밀리)의 집에 잠시 자러 왔다. 그때 전화가 울렸다. 우리가 도착하기 전에 심지어 엘리자베스가 침대에서 나오기도 전에 루이스는 다른 세상으로 가 버렸다. 한숨도 나오지 않고 성모 마리아만 찾았다.”

 

갑작스런 죽음이었다. 복통이 좀 있었지만 편안하였고 유언은 없었다. 그의 나이 75세였다. 그가 남긴 주식은 어마어마한 액수였다. 스탠다드 석유 뉴저지 회사 주식만 5,070주였고, 이것을 현금으로 환산하면 14,774,458불이었다. 그밖에 은행예금이 267,529, 약속어음 151,110불 등. 그의 재산은 외아들 존과 외동딸 엘리자베스에게로 분배되었다. 그러나 세브란스가 약속하고 기부치 못한 것은 아들이 대신 지불하였다. 그 액수가 196,096불이었다. 마지막으로 그의 자선 액수의 범위를 알 수 있을 뿐이다. 그는 국내 뿐 아니라 중국, 일본, 인도, 필리핀, 태국 등에 걸쳐 이루어졌다. 그는 참으로 기부의 사람이었으며, 그것을 기쁨으로 알았던 하나님이 보내신 천국의 기부천사였음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의 세브란스 장로는 동시대에 하나님이 세우신 멋진 기부의 달인이었다. 그의 기록을 통하여 보면, 그는 하나님이 주신 물질을 자신을 위해 사용하기 보다는 전세계에 흩어진 주의 일꾼들과 세우신 교회, 그리고 주의 복음을 위하여 사용하길 기뻐하였으며, 오늘날 우리는 그런 기부의 달인이다. 주어진 물질을 내 것으로 여기는 것이 아니라 물질의 통로서 나를 사용해 달라는 기도와 실천이 필요함을 느끼게 된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사명으로 여긴 사람이었다. 장로의 신분으로서 그는 전세계를 순회하며, 그리고 필요한 곳이 있으면 기부하기로 결정하고 필요한 물질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가 임종할 때에도 수 없이 많은 곳에 기부를 약속한 곳이 있었는데, 그의 자녀들이 그 약속을 모두 지켰던 것은 아름다운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우리는 비록 거부가 되기를 꿈꾸는 것 보다는 지금 있는 곳에서 작게나마 기부할 줄 아는 신앙이 필요하겠다. 

 

주님의 피 속에 믿음 소망 사랑

그리고 이를 통한 봉사 있으니

세브란스는 그 조상들로부터 주님 혈통

이어 받았네

주의 축복으로 그는 거부가 되어

받는 기쁨보다 주는 기쁨을 만끽하려고

그 옛날 서울에 세브란스 병원

우뚝 세웠어라.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그저 빈손으로

와서 병고치고, 주의 말씀 받아

영혼의 구원을 얻어 영생의 천국선물

얻었으니

이 모든 것 세브란스, 당신의 아름다운

기부로 가능한 것이었소.

물은 흐르고 흘러 낮은 곳으로 가듯이

기부는 또 다른 기부로 이어지니

, 2의 세브란스 되어 이 나라,

저 열방을 향해 나아가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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