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보 앞에 “예수님 이야기로 가득찬 교회”라고 적혀있는 한인동산장로교회(이풍삼 목사)는 연속으로 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는데 7월 26일(수) 저녁에는 바울 선교회 헌신예배를 드렸다. 바울 선교회는 한인이민교회의 추세인 고령화로 인해 젊은 일꾼들이 줄어들고 있어 더욱 주목을 받고 있는 40대 남성 성도들로 구성된 선교회이다.
한인동산장로교회는 헌신예배에는 뉴욕과 뉴저지 일원의 목회자들을 강사로 초청하는데 바울 선교회의 강사로는 유상열 목사(리빙스톤교회, 리폼드신학교 학장)를 초청했다.
유상열 목사는 마태복음 25:14-23을 본문으로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라는 제목의 말씀을 전했는데, 그 적용성 때문에 제직수련회나 헌신예배에 많이 사용하는 달란트의 비유 본문이었다. 특히 젊은 시절 음악 전문가로 활동하며 음악이라는 재능이 있었지만 하나님이 안계신 달란트는 얼마나 허망한가를 간증해 눈길을 끌었다. 다음은 말씀내용이다.
오늘 본문은 소위 달란트의 비유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입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한 달란트를 종들에게 각각 나누어 주고 먼 나라로 떠났던 주인이, 이제 다시 돌아와서 결산을 합니다.
다섯 달란트로 다섯 달란트를 남긴 사람, 또 두 달란트를 가지고 두 달란트를 남긴 사람에게 주인이 각각 칭찬을 합니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여기서 반복되는 단어 하나가 있는데 그게 바로 ‘충성’입니다. 충성은 내적인 성실성과 관련한 것으로 성도가 맺어야 할 아주 중요한 열매 중에 하나입니다.
갈라디아서 5장 22절 이하를 보면 바울이 성령의 열매 9가지를 열거합니다. 그 중에 하나가 ‘충성’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원 받고, 그분을 인생의 주인으로 모시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을 살아간다면, 마땅히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나야 할 중요한 열매 중의 하나가 바로 ‘충성’인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우리는 그 충성의 열매를 맺은 종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들은 돌아온 주인에게 칭찬을 받으며 더 큰 것을 맡겨주겠다는 약속을 받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주인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듣고, 더 많은 것을 맡게 되는 복을 원치 않을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이 보여주는 달란트 비유에서 우리가 얻어야 할 교훈이 무엇이겠습니까?
첫째로, 맡은 자로서의 자세, 곧 청지기적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14절 말씀을 다시 한 번 같이 읽겠습니다. “또 어떤 사람이 타국에 갈제 그 종들을 불러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가면서 자기 종들을 불러 그들에게 자기 소유를 적절하게 맡겼습니다. 그러니까 지금 종들이 가지고 있는 것은 자신의 것이 아닌 것입니다. 그들은 주인이 맡겨준 것을 관리하는 관리자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맡은 것이 많으냐 적으냐 하는 것은 오늘 본문의 중요한 요점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뭐가 중요한가요? 맡은 것을 어떻게 잘 관리해야 할 것인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그런데 보니까 우리가 읽지는 않았지만 본문에 이어지는 24절부터 기록된 내용을 보면, 주인으로부터 ‘악하고 게으른 종’이라는 말을 들어가며 책망을 받은 종을 보게 됩니다. 한 달란트 받은 자가 책망을 받습니다. 무슨 이유인가요? 이유가 간단합니다. 맡겨진 것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이 종이 관리를 못했을까요? 그 종 나름대로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었을 겁니다. 그런데 우리가 진짜 원인이 무엇인지를 짐작하게 내용이 있습니다. 19절 말씀입니다.
19절 시작 부분을 보면 그 종들의 주인이 “오랜 후에 돌아왔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종들의 주인이 오랫동안 타국에 있었다는 말입니다. 우리가 “세월이 약”이라는 말을 가끔 합니다. 죽을 만큼 견디기 어려운 아픔이나 고통도, 시간이 지나면 다 잊혀 진다는 의미로 사용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세월은 잊지 말아야 할 것도 잊어버리게 합니다. 세월 자체가 무슨 신비한 힘이 있어서 그럴까요? 그게 아니라 인간의 연약한 속성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바로 한 달란트 맡았던 종이 그랬습니다. 아마도 이 종은 주인이 떠나간 후에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으니까 “내 주인은 아예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이 종에게 뭘 기대할 수 있겠습니까? 바로 이 점을 우리가 주목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뿐만이 아니라 마태복음 24장 25장 전체를 읽어보면 아주 중요한 종말론적 중심주제가 흐르고 있습니다. 한 마디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사건, 즉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것입니다.
아마 자신이 기독교인이라고 말하는 사람들 가운데, 주님의 재림을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적어도 입으로는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주님의 재림을 믿으십니까? 그러나 여러분, 우리가 생각해봐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게 뭐냐면, 많은 경우 믿음의 고백과 실제적인 삶의 모습은 다르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뭐가 필요할까요?
주님이 다시 오신다는 확고한 믿음, 입술로 만의 고백이 아니라 마음으로부터의 확고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주님은 반드시 돌아오실 것이다. 그리고 내가 살아왔던 삶, 또 인류의 모든 역사는 그 분 앞에서 반드시 심판을 받고, 결산될 것이다.” 이런 확실한 믿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종말론적 신앙입니다.
이 종말론적 신앙이란 말은, 세상이 금방 끝난다고 아우성을 치며, 집도, 가정도 버리고, 무슨 산으로 도망을 가고, 한국의 어떤 이상한 집단처럼 피지 섬으로 떠나고 하는, 그런 신앙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은, 언제나 역사 속에 다시 오실 수 있는 그 분, 그리고 역사를 마침내 심판하고 결산할 그 분 앞에서, 내 개인은 물론, 인류역사의 종말이 언제 오든지, 주님 앞에 부끄럽지 않도록 준비되어져야 할, 그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 이것이 바로 종말론적 신앙의 본질인 것입니다. 여러분은 오늘의 하루하루를 어떻게 살아가십니까? 이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자, 주님은 우리에게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본문에 나타난 주인이 종들에게 맡기듯, 여러분 각자에게도 주님은 많은 것을 맡겨주셨습니다. 시간도 맡겨 주시고, 재능도 맡겨 주셨습니다. 돈도 맡겨 주시고, 은사도 맡겨 주셨습니다. 또 우리의 몸도 맡겨 주시고, 우리의 목숨, 인생도 다 맡겨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게 뭡니까? 마지막 결산의 때, 주님 앞에 섰을 때 정말 중요한 것, 그게 무엇이겠습니까? 맡겨주신 것이 많든 적든 그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내게 맡겨진 돈과 물질을 가지고 어떻게 한 평생을 살았느냐, 이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주위를 돌아보면, 가진 것이 많지 않아도 참으로 가치 있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많은 돈과 물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수전노’란 말을 들으며 한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능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얼마나 많은 재능을 갖고 있느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재능을 어떻게 썼느냐 이게 중요한 것입니다. 좋은 재능, 탁월한 재능을 그저 세상 출세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아예 별 볼일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과는 반대로, 비록 아주 작고 적은 재능이지만, 그 재능을 하나님을 기쁘게 하고, 이웃들에게도 기쁨을 주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건강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건강한 몸을 가지고 있다는 것,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그 건강한 몸을 가지고 어떻게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는가,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의 삶의 종점에서, 맡겨 주신 모든 것들을 다 관리한 후, 그 최후의 심판대 앞에서 누구나 둘 중에 하나로 결정될 것이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하나는 착하고 충성된 종, 하나는 악하고 게으른 종인 것입니다. 어느 편을 원하십니까?
여러분, 이 땅에서의 우리 인생은 짧습니다. 그 짧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 주어진 책임을 다 하실 수 있는 삶을 위하여, 맡은 자로서의 자세, 청지기적인 자세를 이 시간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진정, 충성 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가기 위해 필요한 것이 또 있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종들이 각각 다섯 달란트와 두 달란트를 남겼을 때 주님은 그들을 칭찬 하십니다. 그런데 그 칭찬을 어떤 말로 시작하십니까?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여기서 충성이란 단어의 본래 의미는 “믿음직스럽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실제로 믿음이란 단어에서 충성이란 단어가 나온 것입니다. 이 믿음직스럽다는 말은 철저하게 우리의 내적인 성실성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충성이란 말은 우리 속에 있는 성실성, 겉으로 드러난 어떤 모습이 아니라 우리 안에 간직되어 있는 내적인 성실성에 초점이 맞추어진 중요한 단어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겉으로 드러내기를 좋아하는 시대입니다. 그래서 깊은 속마음이나 그 사람의 진짜 삶의 모습을 알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런 세상일수록 세상은 성실한 사람들을 필요로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진실로 믿을 수 있는 사람, 충성스러운 사람, 성실한 사람이 될 수가 있을까요? 우리가 반드시 알아야 할 한 가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가 성실하게 살아가고자 할 때, 그 삶은 “내가 성실한 사람이 되어야지” 라는 결단을 하기 전에, 먼저 성실하신 하나님을 우리가 진실로 고백하는 데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주를 창조하시고 운행하시는 하나님, 그 하나님이 성실하신 하나님이시다. 이걸 마음으로 진실하게 고백할 수 만 있다면, 여기서부터 성실한 삶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24절 이후에서 보게 되는 한 달란트 받았던 종, 유일하게 칭찬 받지 못하고 책망을 받았던 이 종의 경우에는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인식이 잘못되어 있었습니다. 주인을 잘못 생각했습니다. 그러니 주인을 신뢰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4절을 보면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자, 주인을 향해서 뭐라고 고백을 합니까? 당신은 굳은 사람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당신은 인색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주인보고 ‘구두쇠’라고 한 것입니다. 왜 그랬을까요? 아마도 그는 이런 생각을 한 것 같습니다.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를 주면서, 왜 내게는 한 달란트 밖에 주지 않았느냐. 당신은 나에게는 짜고 인색한 사람이다.”
그런데 여러분, 사실은 금 한 달란트란 것이 적은 것이 아닙니다. 그 당시, 한 달란트를 화폐로 계산할 때 일반 노동자가 20년은 일을 해야 벌 수 있는 액수였다고 합니다. 이 말은 앞으로 20년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않고 살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굉장한 게 아닌가요? 그러면 고마워했어야죠.
“내게도 이렇게 많이 맡겨 주셨으니 내가 이것을 잘 관리해야 되겠구나.”
이렇게 생각을 해야 하는데 이 사람이 딴 생각을 했습니다. 아니 다른 사람에게는 다섯 달란트를 주고, 또 다른 사람에게는 두 달란트를 주면서 왜 내게 만 한 달란트를 주느냐? 왜 이런 불평을 가졌을까요?
비교하니까 그렇습니다. 이 비교라는 것이 항상 인생을 비참 하게 만듭니다. 비교하기 시작하면 인생이 아주 꼬입니다. 생각해 보세요.두 달란트 받았던 종도 만약 다섯 달란트를 받은 사람과 비교했다면 어땠을까요? 당연히, 네, 불평을 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 세상에는 항상 나보다 더 많이 가진 사람이 존재합니다. 그분이 지금 바로 여러분 옆에 앉아계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비교의식 버리지 못하면 어떻겠습니까? 항상 자신에게 만족감을 갖지 못하는 비참한 존재가 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여러분! 초점을 사람과 비교하는 것에 맞추지 마시고,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에게 이것을 맡겨 주셨다. 나를 나보다 더 잘 아시는 분께서, 내가 이만큼 관리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주께서 나에게 이렇게 맡기셨을 것이다!” 이런 마음이 필요한 것입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자세이며, 이런 자세로부터 우리의 성실성은 시작되는 것입니다. 앞으로 살아가야 할 인생을 내다보시면서, 여러분 모두가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는 자세를 다시 한 번 마음에 새기시기 바랍니다. 어떻게 우리가 충성 된 종으로 한 평생을 살아갈 수가 있을까요?
▲왼쪽부터 바울선교회 회장 박재흥 집사, 유상열 목사, 이풍삼 목사
셋째로, 존재에 가치를 두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존재에 가치를 두는 자세, doing 보다 being에 더 가치를 두는 것,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우리가 인생을 사는 사람들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가 있습니다. 한 종류의 사람은 소유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더 많은 소유가 나를 그만큼 행복하게 할 것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또 다른 종류의 사람은 존재에 가치를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내가 어떤 사람이 되느냐, 내가 어떤 존재가 되느냐 그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고 생각하며 살아갑니다.
오늘 본문에 다섯 달란트,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들이 칭찬을 받았던 이유가, 반드시 다섯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꼭 다섯 달란트 남겼고, 두 달란트 받았던 사람이 두 달란트를 꼭 남겼기 때문에 주인이 칭찬하셨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물론 남긴 건 사실이지만, 그것을 행하는 과정에 있어서 주께서 보셨던 마음의 태도, 그것이 칭찬의 원인이었다는 것을 또한 알 수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칭찬한 내용을 잘 보세요. “착하고 충성스러운 종아” 그 칭찬의 내용이 뭔가요? 뭘 칭찬 했나요? “착하고 충성스럽다는 것”입니다. 또 계속되는 칭찬에 뭐가 있습니까? “착하고 충성 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무슨 일에 충성했다고 하십니까? 네, 작은 일입니다. 위에서 일반 노동자가 금 한 달란트를 버는 데 20년이 걸린다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러면 다섯 달란트를 벌려면 몇 년이 걸립니까? 100년입니다. 그런데 다섯 달란트 가지고 얼마를 남겼습니까? 다섯 달란트죠. 또 100년을 벌어야 할 돈입니다. 이건 우리가 생각할 때, 엄청 큰 액수입니다. 그런데 주인이 어떻게 칭찬합니까? 내가 많이 맡겨준 만큼, 네가 그렇게 많이 남겼으니, 너는 정말 큰일을 한 대단한 종이다, 이렇게 칭찬하셨나요?
뭐라고 칭찬했습니까?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여러분, 이걸 놓치시면 안 됩니다. 주인이 보기에는 다섯 달란트를 남긴 것도 작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크고 작은 것을 나누는 것은 사람이나 하는 일입니다. 사람들은 큰 일, 작은 일, 위대 한 일, 평범한 일 등등. 계속해서 그렇게 나누지만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작은 일인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 작은 일 앞에 얼마나 충성할 수가 있었느냐 그게 중요한 겁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일을 해 나아가는 과정이나 마음의 자세에 무게를 두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하고 있는 그 일 자체, 또는 결론 자체에만 가치를 두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큰 일이 주어져야만 일을 합니다. 자신이 큰일이라고 생각되는 일만 하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알 것은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할 때 큰일을 할 수 있게 되고 또 주인과 함께 큰 기쁨도 나눌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3절이 그걸 말씀합니다. 23)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 할찌어다 하고,”(개혁)
이미 아실지 모르지만 소개하고 싶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작은 일에 충성하여 큰일을 하게 된 사람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회사’ 직원 중 “존 아치볼드”라는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평사원이었지만, 회사를 아끼고 사랑하는 것이 남달랐습니다. 출장 중에 호텔에 숙박할 때에 자신의 이름과 함께 반드시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란 말을 기록했습니다. 사람들을 만날 때도 언제나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라고 말하며 명함을 건넸습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그를 부를 때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들기 직전에 그는 호텔 숙박부에 이름만 쓰고 나온 것이 생각났습니다.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내려가 ‘한 통에 4달러, 스탠다드 오일’이란 문구를 꼼꼼히 쓰고 있는데, 옆에서 그것을 지켜보던 한 신사가 있었습니다. 신사가 물었습니다. “숙박부에 왜 그런 문구를 적습니까?” 그는 너무나 당연한 듯 대답했습니다. “우리 회사를 좀 더 많은 사람에게 알리고 싶어서요.”
며칠 후 ‘스탠다드 오일 캄파니’ 회장이 그를 불렀습니다. ‘아치볼드’는 그 신사를 보더니 깜짝 놀랐습니다. 그 호텔에서 마주친 그 신사가 바로 “스탠다드 오일 회장”인 ‘록펠러’였던 것입니다. ‘록펠러’ 회장이 말합니다. “나는 회사 일에 그토록 열정을 가지고 있는 당신을 내 옆에 두고 일하고 싶소.”
“아치볼드”는 그날로 본사로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그는 ‘스탠다드 오일회사’를 세계 최대 기업으로 만드는데 크게 기여를 했고, 세월이 흘러 마침내 ‘아치볼드’는 사장으로 선출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한해 두해 시간이 빠르게 지나갑니다. 우리의 인생도 그렇게 빠르게 지나갈 것입니다. 이 저녁 우리는 “바울선교회”가 주관하는 헌신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회원 여러분, 여러분은 바울선교회에 소속된 남자로써 지금 40대를 보내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셔야 합니다. 이제 여러분은 머지않아 50대로 접어들 것입니다. 예배에 참여하신 여러분도 예외일 수 없습니다. 흐르는 세월 앞에 남녀구별이 없습니다. 금방 60대가 되고, 70대가 되고, 80대가 되실 것입니다.
그렇게 주어진 인생을 다 마치고, 심판의 주이신 하나님 앞에 서서, 한 평생 살아온 자신의 인생을 결산할 때, 여러분은 주님으로부터 어떤 말씀을 듣기 원하십니까?
“착하고 충성 된 종아 작은 일에 충성을 다 하였구나.” 이런 칭찬의 말씀이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여러분! 여러분의 인생을 걸 수 있는 그 작은 일은 무엇인가요? “착하고 충성 된 종아” 그렇게 부르시며, 주님께서 칭찬하실 수 있는 그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위해서, 여러분 각자에게 맡겨진 작은 일에 충성을 다하시므로 마침내 하나님의 즐거움에 참여하게 되는 영광을 누리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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