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직목사기념사업회 이사장을 역임한 림인식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은 20세기 위대한 목회자 중 한 분”이라며 “한 목사님과 가까이 있어보면 나도 한 목사님처럼 닮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목사님을 가까이서 대해본 사람들의 공통적인 공감은 한 목사님은 예수님을 닮은 분이라고 했다.”고 밝혔다.
이어 “그 의미는 그의 온유, 겸손, 섬김의 영성이 닮았다는 것”이라며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가르치신 핵심은 산상수훈이다. 산상수훈은 세상 사람에겐 없었던 예수님이 세우신 생활규범이다. 한 목사님은 그 산상수훈대로 사셨다. 그러니까 우리가 볼 때 예수님을 닮았다고 말한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산상수훈을 알기 쉽게 풀이하면 십자가의 생활화”라면서 “한 목사님은 산상수훈을 실천함으로 항상 생활이 십자가 생활을 사셨다. 특별히 구령(救靈)을 위해 사셨다. 목회의 초점도 사람의 생명을 구원하기 위한 목회를 하신 것이다. 그리고 청빈한 생활을 하셨다.”고 말했다.
림 목사는 특히 “한 목사님은 강단에서 하시는 설교나 사석에서 하시는 말씀이나 차이가 없었다.”며 “그분의 말 속에서 비성경적이거나 생활에 해로운 건 아무 것도 없었다. 도덕 이상의 영적 변화에서 오는 예수님 닮은 모습을 보여주셨다. 한국 교회 후배 목회자들이 닮아야 한다.”고 밝혔다.
김명혁 목사는 “1938년 제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께서 한경직 목사님 초청으로 신의주제일교회에서 9년 간 목회를 하셨다. 제가 한 살 때 한경직 목사님이 저를 안아주셨다고 한다.”며 “1950년 6.25 전쟁 2년 전에 아버지처럼 신앙 지키면서 순교적 삶을 살 수 없을까 생각하며 신앙의 자유 찾기 위해 남쪽으로 38선 넘어 서울에 왔다. 그 때부터 평생 한 목사님 의 지극한 사랑과 도움 받았다.”고 고백했다.
이어 “(서울)고등학교 3학년 때 한경직 목사님을 찾아가서 ‘좋은 목사님 되려면 대학에서 무얼 전공해야 합니까’ 라고 여쭸더니 한경직 목사님이 역사를 전공하라고 하셨다. 서울대 사학과에 들어가서 역사를 전공했다. 서양사를 전공했는데 얼마나 잘한 일인지를 깨달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에 갈 때 한 목사님의 추천서를 받아서 미국 신학교에 지원해서 12년 동안 공부하고 돌아왔다.”고 밝혔다.
또한 “귀국 후부터 한 목사님 돌아가실 때까지 사랑과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며 “한 목사님 돌아가신 다음에 (교단은 달랐지만)장신대에 가서 한 목사님 탄신 100주년 기념 강연을 했다.”고 회고했다.
김 목사는 “한 목사님은 온유 겸손하셨다. 기독교는 말할 것도 없고 타종교 지도자들도 그 분은 성자라고 말했다.”며 “온유와 겸손의 사람만이 이런 존경을 받을 수 있다. 한 목사님은 평생 질병을 지니고 약하게 사셨다.”고 말했다.
김 목사는 “신앙의 선배들은 주님 닮은 십자가 복음적 삶을 살았는데 우리는 주님 닮지 않은 반복음적 삶을 사는 게 아닌가.”라고 자성하고 “저도 가난과 고통을 짊어지고 사랑과 섬김의 삶을 조금이라도 살 수 있기를 소원한다.”고 말했다.
개인적인 일화도 밝혔다.
림 목사는 “제가 신의주에서 학교에 다닐 때는 가끔 신의주제2교회에 가서 한 목사님의 설교를 들었다. 제가 한 목사님을 가까이 모시게 된 것은 1959년 대구 영락교회 담임목사가 되면서부터다. 그 다음에 노량진교회 (담임목사)로 부임해서는 총회에서 섬겼다. 제가 주로 전도와 선교 부서를 맡았는데, 그 어른은 위원장이고 저는 서기로 일했다.”고 말했다.
한기총 설립 때의 일화도 소개했다.
림 목사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를 창립할 때 각 교단 증경총회장 40여 명이 대전 유성에서 모여서 한 목사님께 개신교 전체를 묶어서 하나로 만드는 일에 한 목사님이 위원장을 맡고 제가 서기를 맡아 준비를 담당했다.”며 “그때 한 목사님이 ‘왜 나이 많은 맡은 나에게 회장을 맡으라고 하느냐’며 화를 내셨다. 한 목사님이 화를 내신 것을 그때 처음 봤다. 한 목사님이 계시는 동안 한국교회 모든 일은 화목한 가운데서 그야말로 은혜스럽게 잘 되었다.”고 말했다.
김명혁는 “한 목사님이 남한산성 계실 때 26년 동안 저만큼 많이 찾아뵌 사람 없을 것”이라며 “돌아가신 다음에도 외국에서도 사람들이 찾아오면 모시고 가서 (한 목사님이 기거하셨던 집으로 안내해서)방을 보여주면 감동을 했다. 청년들도 데리고 가서 한 목사님이 기도하셨던 바위에 가서 기도했다.”고 말했다.
어떻게 하면 한경직 목사처럼 산상수훈의 삶을 실천할 수 있을까.
림인식 목사는 “사선(死線)을 넘는 경험을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림 목사는 “늘 편안한 환경 속에서 사는 경우 하나님과 아주 긴밀하게 가까이 하는 시간을 경험할 수 없다.”며 “한 목사님은 폐결핵 말기에서 누구와도 가까이 하지 않고 가장 하나님과 가까이 한 시간이었을 것이다. 사선 넘을 때의 하나님과의 관계가 한 목사님을 만드신 것 아닌가.”라고 말했다.
이어 “한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은, 사선을 넘는 경험을 해야 된다.”며 “나는 죽어지고 정말 하나님 앞에 완전히 헌신하는 변화는 있어야 된다. 그런데 그런 경험이 전혀 없는 목사에게 한 목사님 이야기를 해봐야 옛날 이야기다. 그리고 동화(童話)다. 아무 감각이 없는 얘기가 될 것이다. 목회자의 길을 걸어가려면 한 목사님 같은 심각하면서도 순수한 목회자 심정과 영성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가난과 고난과 죽음을 소원하는 영성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성 프란시스는 ‘가난은 나의 애처요, 고난은 나의 스승이요, 죽음은 나의 자매’라고 했다. 한 목사님은 프린스턴신학교에서 공부할 때부터 고난을 겪으셨다. 가난과 고난과 아픔을 몸에 지닐 때 예수님처럼, 한 목사님처럼 살 수 있다.”고 말했다.
림 목사는 “한경직 목사님이 살아계셨다면 이렇게 분열되지 않았을 것”이라면서 “한기총은 교단 위에 있지 않다. 인사, 행정, 사업 모든 것을 교단이 한다. 한기총이 하는 건 한 가지다. 연합하는 것이다. 그런데 교단 위의 상위 기관으로 착각을 한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앞으로는 한 목사님 때처럼 단일화는 어려울 것 같다. 이제는 싸우지 말고 하나되지 못하더라도 연합정신을 가지고 한 마음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신앙의 선배님들을 바라봐고 배워야 한다.”면서 “지금 우리 지금 우리 교계는 선배들을 무시한다. 어떻게 하면 내 방식대로만 하려고 한다.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의 선배들을 소개하고 있다. 믿음의 선배들을 바라보고, 예수님을 바라봐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경직 목사는 북한 선교와 북한 교회 재건을 위해 힘을 쏟았다.
림 목사는 “한 목사님은 템플턴상을 받으시고 100만 달러를 상금으로 받으셨다. 그 수표를 다음 날 날 북한선교에 쓰라고 내놓으셨다. 북한 선교는 한 목사님의 소원 중에 가장 간절한 소원이셨다. 한 목사님 생전에 통일이 되었다면 북한에 가셔서 그야말로 본격적인 복음화 운동하셨을 것”이라고 말했다.
김명혁 목사는 십자가 복음을 붙잡을 것을 강조했다. 김 목사는 “나도 총신대 교수로 재직할 때까지는 반공, 반일, 반무슬림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성 프란시스를 바라보면서 시각이 바뀌기 시작했다.”며 “한 목사님은 북한을 품으셨다. 지금은 극좌와 극우가 문제다. (우리 모두) 십자가 복음을 붙잡아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