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저지장로연합회(회장 김진수 장로)는 10월 26일(화) 오후 8시에 시온제일교회(담임 원도연 목사)에서 제8차 영적 대각성 기도회를 가졌다.
궂은 날씨 때문에 뉴저지장로연합회의 임원들만 참석한 기도회였지만, 기도와 찬양의 열기는 뜨거웠고, 원도연 목사의 설교는 참석자들 모두가 반드시 가슴에 새기고 실천해야 할 명령이었다.
원도연 목사는 출애굽기 32장 15-35절을 본문으로 "이것 만큼은 하고 죽자"는 제목으로 말씀을 전했다. 원 목사는 "우리 모두, 우리가 죽기 전에, 다른 것은 못해도, 이것 만큼은, 이 세 가지 만큼은 반드시 하고 죽자!"고 호소하듯이 말씀을 전했다.
참석자들 대부분이 나이가 많은, 이 세상에서의 삶의 기간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 장로들과 권사들이었기에, 원 목사의 설교는 더 깊이 가슴속에 와 닿았다.
원 목사는 "첫째, 절대 말씀과 믿음에 타협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자", "둘째, 우리교회 담임목사님과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리라", "셋째, 생명을 건 기도로 다음 세대에 복음을 전수하리라"는 "각오를 다지며, 다진 각오대로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자"고 설교했다.
다음은 원 목사의 설교 요지이다.
제목 : 이것 만큼은 하고 죽자
본문 : 출애굽기 32:15-35
오늘 대각성기도회 설교 제목이 제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도 좀 과격한 것 같습니다.
“이것 만큼은 하고 죽자!”
이 제목이 여기 계신 분들이 연세가 있으시기에 정한 제목은 아니라는 것을 먼저 말씀 드리고 싶습니다.
‘죽자’ 라는 단어를 사용하면서까지, 좀 과격한 제목으로 정한 것은 “이제 우리 남은 인생에 꼭 그렇게 한 번 살아보자”라는 결단을 촉구해 보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분들이 잘 못 알고 있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신앙이라는 것은 전수 되는 것이 아니라 각 세대에 속한 사람이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입니다.
공부 잘 하는 것은 그럴 수 있습니다. 아버지 어머니가 공부를 잘 못했어도, 얼마든지 그런 부모 밑에서 머리가 트여 스스로 공부를 잘하는 자녀들이 나오곤 합니다.
하지만, 신앙생활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신앙생활은 전수 되는 것입니다. ‘자녀들을 온전한 신앙인으로 키우길 원한다면 먼저 부모들이 바르게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신앙은 전수 되는 것이기 때문 입니다’라고 외쳐도 많은 젊은 세대 성도님들은 그 말을 잘 받아 들이지 못합니다. 자녀들의 신앙도 학교에서 선생님이 잘 가르치면 성적이 오르듯이 교회에서 목사님 전도사님이 잘 가르치면 부모와 상관 없이 믿음이 온전히 잘 세워 질 줄 압니다.
하지만 그것은 정말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도자기 장인이 자신을 이을 후계자를 평생에 걸쳐서 본을 보이고 가르치며 키우는 것 같이 신앙도 그렇게 선조로부터 보고 듣고 배우며 자랄 때 그것이 쌓여서 온전해지기 때문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보통 한 가정에 목사나 장로가 배출 될 때 2대 3대에 걸쳐서 신앙생활을 한 가문에서 목사와 장로가 배출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기독교 가정에서 그 조부모와 부모를 통해 도제식으로 신앙생활과 믿음이 무엇인지를 보고 배우며 자라기 때문 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 죄송한 말씀이지만 오늘 날 이 시대의 다음 세대 또는 젊은 세대들이 믿음에 온전히 세워지지 못하고 있다면 어쩌면 조부모 또는 부모 된 우리가 먼저 자녀들에게 참 신앙생활의 본과 믿음의 본을 보여주지 못한 결과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진정한 뉴저지의 대각성을 우리가 원한다면 먼저 믿음의 1세대 된 저와 여러분들이 각성하고 변화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반드시 변화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단 몇 년을 산다 할 지라도 우리 남은 인생을 정말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모습으로 살아서 우리 자녀들과 후손들의 마음과 영혼에 참 신앙과 믿음의 본을 새겨주고 이 땅을 떠나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의 제목이 “이것 만큼은 하고 죽자!”인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함께 나누고자 하는 출애굽기 말씀을 통하여 우리 남은 생에 반드시 지키고 행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랍니다. 그리고 깨닫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단 몇 년이 되었다 할 지라도 그렇게 살아서 우리 자녀들에게 참 신앙과 믿음의 본을 새겨 주어 우리 다음 세대들도 믿음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자,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먼저 익히고 무엇을 우리 삶 속에 적용해야 하는 걸까요?
오늘 함께 읽으신 본문의 배경을 먼저 살펴 보겠습니다.
출애굽기 32장은 출애굽 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송아지 우상에 절하는 장면이 기록된 말씀입니다. 자신들을 이끌었던 모세가 시내산에 들어가 오랜 시간 내려 오지 않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불안해지기 시작했던 겁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아론에게 찾아가 ‘우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사람은 어디 있느냐? 그 사람이 없다면 우리를 인도할 신을 우리를 위해 당장 만들라’라고 말하며 자기들을 위해 우상을 만들라고 강력하게 종용했던 것 입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모세의 형이며, 모세와 함께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데 쓰임 받은 하나님의 종 아론이 백성들의 요구에 그만 무너져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버리는 큰 죄악을 저질러 버리고 말았던 겁니다.
출애굽기 32장 4절 : "아론이 그들의 손에서 그 고리를 받아 부어서 각도로 새겨 송아지 형상을 만드니 그들이 말하되 이스라엘아 이는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너희 신이로다 하는지라”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할 아론이 어떻게 감히 금송아지 우상을 만들어 ‘이가 너희의 신이다’라는 정말 말도 안 되는 행동을 하고 만 것입니까?
그 이유는, 아론이 하나님보다 백성들의 폭동을 더 두려워했기 때문 입니다. 우상을 섬김으로 인하여 하나님께 책망 듣고 심판 받는 것보다 지금 흥분하여 자기 멱살을 잡고 달려 드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더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이 아론의 모습을 통해 믿음의 1세 대 된 저와 여러분들에게 어떤 교훈을 배울 수 있을까요?
하나님 말씀에 자신의 목숨을 거는 담대함이 있어야 한다는 것 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의 자녀 세대, 후손 세대들이 갖고 있는 문화는 철저한 개인주의 문화 입니다.
(1) 자기 개인의 생각과 맞지 않으면 틀렸다고 생각하는 세대들 입니다.
(2) 자기와 의견 충돌이 있으면 관계를 무 자르듯 끊어 버리는 세대이며
(3) 자기 유익을 충족시켜주지 않으면 그것을 얻을 때까지 투쟁하는 세대들입니다.
한 마디로 굉장히 무서운 세대들 입니다.
이런 세대들 앞에서 많은 믿음의 선배 된 분들이 그만 주눅이 들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분명히 옳지 못한 것이고, 잘 못 된 일인데도 ‘옳지 않다고, 잘 못 되었다고’ 말을 하지 못하는 시대가 되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런 시대에 가장 앞장서서 실천한 사람들이 다른 누가 아니라 저와 같은 목사들입니다. 설교 단상에서 죄를 죄라고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틀린 것을 고치라, 잘 못 된 길은 돌아서라 말을 못하고 있습니다.
‘혹시 이 설교 듣고 성도가 상처 받아서 떠나면 어떨까?’ ‘이 설교에 악플을 달고 온 갖 거짓 모함으로 나의 명예를 실추시키면 어쩌나’ 이런 두려움 속에 오늘 날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이 부끄럽게도 목사들 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교회의 장로 권사님들도 다른 성도들 눈치를 보며 후배 성도들에게 마땅히 해야 할 말을 하지 못할 때가 있는 것 같습니다.
가정에서도 마찬 가지 입니다. 말씀에서 벋어난 삶을 사는데도 지적하지 않습니다. 고치라고 권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녀들 또는 젊은 사람들의 요구를 들어 주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물론, 다음 세대들에 생각과 그 말들을 경청 해야 합니다. 우리 2세대 자녀들의 가장 큰 불만이 1세대들의 권위적인 모습, 완고한 모습, 일방적인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자녀들의 이야기를 잘 듣지 않고 “네가 뭘 안다고 그래” 라고 무시한 적이 정말 많습니다. 이러한 부분은 정말 우리 1세대들이 고쳐야 할 부분입니다.
하지만, 제가 말씀 드리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과 믿음으로 사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러하다면 아무리 다음 세대들이 “구차하고, 시대착오적이고 완고하다” 라는 말을 하더라도 절대 타협함이 없어야 합니다.
아론은 우상을 요구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잘 못 된 요구에 밀려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미 애굽 땅에서 10가지 재앙으로, 광야에서 구름기둥 불기둥으로 자신의 살아계심과 전능하심을 나타내 보이신 하나님을 그 누구보다 아론은 잘 알고 있었고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절대 하나님을 대신하는 우상을 만들면 안 된다는 것을 아론은 알고 있었던 겁니다. 그것이 맞는 것이라면 아론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아성에 맞서서 끝까지 싸웠어야 만 했습니다.
“차라리 나를 죽일 지언정, 나는 결코 하나님 대신 다른 우상을 만들 수 없다. 하나님이 분명히 살아계시고 전능하신 하나님 이신 것을 나도 알고 너희들도 아는데 어떻게 너희는 나에게 우상을 만들라 하느냐. 차라리 나를 죽이라” 하면서 자기 생명을 걸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죄악 된 요구를 거절했어야 만 했습니다.
하지만, 아론은 그 요구를 받아 들이고 만 것 입니다. 하나님 보다 다음 세대 이스라엘 백성들의 겁박이 더 무섭게 느껴졌기 때문 입니다.
아론이 한 번 이렇게 송아지 우상을 만드는 것으로 인하여 이스라엘 백성은 자기 나라가 멸망을 당할 때 까지 믿음의 첫 세대 되었던 아론이 만든 잘 못 된 선례를 따라 우상을 만들고 또 만들고 또 만들다가 결국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 나라가 멸망을 받아 온 세상으로 모래알같이 흩어지는 비참한 존재가 돼버리고 만 것 입니다.
자녀들이 말하는 완고함, 고집, 불통 이런 것은 백번이고 포기하고 내려 놓아야 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대하여, 그 말씀 순종하는 것에 대하여,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다음 세대가 칼을 들고 위협해도 절대 물러섬이 없게 되시길 간절히 소망 합니다.
우리가 말씀에 대해, 믿음에 대해 끝까지 물러섬 없이 버티다 죽으면 자손들이 욕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할아버지 할머니는, 우리 아버지 어머니는 끝까지 말씀 순종하고, 믿음 지키며 사셨다” 하고 오히려 감동 받고 자신의 인생의 본을 삼습니다.
하지만, 다음 세대들에게 신뢰 잃을까봐 두려워 말씀에 불순종하고, 믿음에 타협하고, 죄악 된것을 지적하지 않고 방임하며 살면 나중에 저와 여러분들 오히려 원망 합니다. “내가 무엇을 보았고, 내가 무엇을 들었기에 나로 믿음으로 살라고 합니까?” 라고 말 입니다.
여러분! 이 예화 한 번 쯤은 들어 보셨을 겁니다.
아들을 너무나 사랑한 어머니가 있었습니다. 그 어머니는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이 너무 사랑스러워 그 아이가 하는 모든 일을 칭찬하고 격려 했습니다. 잘못된 일을 해도 지적하거나 매를 들어 훈육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이 장성하여 성인이 되었는데 사람을 죽여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형선고를 받고 난 뒤에 판사가 ‘마지막 할 말 없는가?'라고 물었을 때, 그 아들이 법정에서 울고 있는 '어머니에게 할 말이 있다'고, '어머니를 가까이 오게 하셨으면 좋겠다'고 요청했습니다. 그래서 판사는 허락하였고, 어머니가 그 아들에게 다가갔습니다. “어머니 잠시 귀좀” 무엇인가 비밀 이야기를 하는가 싶어 귀를 갖다 대었는데 갑자기 아들이 어머니의 귀를 사정 없이 물어 버린 것 입니다. 어머니가 깜짝 놀라 “예야 도대체 왜 그러니?” 라고 물으니 아들이 뭐라고 말 한 줄 아십니까? "어머니, 어찌 나에게 단 한 번도 잘 못 했다고 지적하지 않으셨습니까? 제가 잘 못 된 길을 가고 있다면 매를 들어서라도 그 길을 가지 못하게 막으셨어야지요? 왜 어머니는 내 어머니면서 제게 단 한 번도 그런 말씀 하지 않으신 겁니까?”라고 말하며, 자신이 이렇게 살인죄를 저지르고 사형선고를 받게 된 것이 모두 어머니 탓이라고 원망을 하였던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말씀과 그 순종하는 것에 대해 믿음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는 절대 타협함이 없으시길 바랍니다. 한 번 타협하면 우리 다음 세대에 복이 아니라 화가 되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타협하고 물러서는 그 순간 우리 자녀들은 그들이 보고 배우고 따라야 할 믿음의 본, 신앙의 기준을 잃어 버리기 때문 입니다.
지금도 늦지 않았습니다. 완고해지자는 말이 아닙니다. 다시 고집불통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아닙니다.
(1) 먼저 하나님의 말씀을 100 % 신뢰하는 삶을 살자는 것 입니다
(2) 먼저 하나님의 말씀에 생명을 걸고 순종하는 삶을 사시라는 것 입니다.
(3) 이것이 믿음을 지키는 일이라면 그 어떤 손해를 입더라도 믿음으로 살아보자는 겁니다.
이런 귀한 참 신앙인의 삶의 모습과 기준을 우리 자녀들의 눈과 귀와 마음과 영혼에 새겨 주고 마지막 유언과 같이 남겨 주어야 하는 것 입니다. 그래야, 우리 자녀들에게 소망이 생기는 것입니다.
영적대각성, 우리 1세대 들이 먼저 변해야 합니다. 오늘 이 시간 이후로, 여러분들의 남은 인생에 말씀순종과 믿음의 삶을 사는 것에 생명을 걸며 살게 되시길 다시 한 번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둘째로, 우리는 섬기는 교회의 담임목사님과 같은 마음 같은 뜻을 품고 동역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송아지 우상을 만들고 그 앞에서 절하고 뛰노는 모습과 이스라엘 백성들로 그런 패악한 짓을 하도록 우상을 만든 아론을 향해 말 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셨습니다. 뿐 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었던 모세도 똑같은 분노감을 느꼈습니다. 그 때 모세는 분노하신 하나님의 명령을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렇게 선포하였습니다.
27절 : "모세가 그들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각각 허리에 칼을 차고 진 이 문에서 저 문까지 왕래하여 각 사람이 그 형제를, 각 사람이 그 친구를 각 사람이 그 이웃을 도륙하라 하셨느니라”
이 모세를 통해 전해진 하나님의 명령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받아 들이기 힘든 명령이었습니다. 칼을 차고,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도륙하라는 명령에 누가 감히 나와 그 일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이스라엘 12지파 중 레위 지파가 나와 그 납득하기 어려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이기에 그가 내 형제라도, 내 친구라도 내 이웃이라도 나는 칠 것이다’ 라고 마음 먹고 우상숭배하는 일에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도구로 자기 자신을 드렸던 것 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여러분 각자 교회에 세우신 담임목사님을 여러분들의 교회를 이끌고 지도하는 ‘모세’와 같이 사용하고 계십니다. “우리 담임목사님에게는 모세같은 권세도, 능력도, 카리스마도 없으신데요..” 아니요, 하나님은 질서의 하나님이시라 당신의 교회를 세우신 종을 통해 가르치시고, 다스리시고, 인도하십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에 세우신 목사라면 그 분의 성품이 어떠하고, 능력이 있던 없던 상관 없이 하나님이 세우신 종 입니다. 그것을 우리 장로님 권사님 그리고 모든 성도님들이 인정하고 받아야 합니다.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께서 여러분들 교회에 세우신 담임목사님을 통해 행하시고자 하는 일에 적극적으로 동참하고 협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며 성령이 거하시는 전이기 때문에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께서 기름부으시고 안수하여 세우신 담임목사님을 통해 교회를 향한 뜻을 보이시고, 계획하시고, 인도하시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담임목사님에게 교회를 향한 특별한 마음을 부어 주십니다. 때로는 담임목사님에게 먼저 성도를 격려하는 마음을 주시기도 합니다. 그리고 때로는 성도들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거나 온전치 못한 모습으로 신앙생활 할 때에는 하나님의 분노를 담임목사님의 마음에 똑같이 부어주십니다. 그래서 담임목사님이 뜻하고, 계획하고 추진하는 일이 있으면 하나님께서 하시기 원하시는 일로 알고 적극 협력하고 동역해야 합니다. 때로는 담임목사님이 성도를 책망하고 지적할 때 “목사님 도대체 우리 한테 왜 그래?” 하고 반감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모세의 명령에 순종한 레위 지파와 같이 “아.. 담임목사님이 우리들을 향해 지적하시고 책망하는 것이 있다면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길로 가고 있구나”라고 믿고 담임목사님에게 반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인 협력자와 동역자가 되어 같은 마음으로, 같은 뜻으로 함께 해 주셔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할 때 교회가 하나님의 뜻대로 인도함을 받게 되는 것 입니다.
가끔 참으로 안타까운 교회를 보게 됩니다.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이 의견 차이가 있을 때 담임목사님을 권고사직하게 하는 경우를 보게 됩니다. 만약 정말 담임목사님의 뜻과 계획이 잘못되어서 더이상 신뢰가 되지 않아 담임목사를 권고사직하게 하였다면 그 교회는 새로운 담임목사를 청빙하지 않는 것이 맞지 않습니까? 새로운 담임목사님이 또 성도들과 다른 의견을 말 한다고 하면 그 때에도 ‘이 분은 우리 교회에 담임으로 오시면 안 될 분이야’ 라고 하며 또 권고사직 하게 하는 것이 맞습니까?
세워진 담임목사가 이단사상을 전하고, 복음을 훼손하고, 성적인 죄를 지은 것이 아니라 단순히 의견의 다름 때문이라면 그 목사님이 틀린 것이 아니라, 어쩌면 다수의 성도들이 틀린 것 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해보지 않으셨습니까? 정말 하나님을 존귀하게 여기고 경외하는 교회라면 세워진 담임목사를 통해 선포되는 말씀과 그의 계획과 뜻, 리더십은 하나님께서 역사하신 결과라는 것을 인정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이 되게 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설령 담임목사가 잘못된 판단과 결정을 했다 할 지라도 그 말에 따르고 순종하는 성도들에게 하나님께서는 반드시 복으로 갚아 주심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9절을 보십시오. "모세가 이르되 각 사람이 그 아들과 그 형제를 쳤으니 오늘날 여호와께 헌신하게 되었는니라 그가 오늘날 너희에게 복을 내리시리라” 하나님의 말씀 입니다. ‘너희 형제를, 친구를, 이웃을 도륙하라’ 이게 이스라엘 백성들이 납득 될 만한 말씀이었습니까? 아마 모두가 “저 모세가 미쳤나 보다. 어떻게 송아지 우상에 절했다고 자기 형제, 친구 이웃을 죽이라 명하나? 그리고 그 말에 순종하는 저 레위 지파도 제 정신이 아니고서야 어떻게 모세의 말에 순종하여 동족들에게 칼을 휘두를 수 있나?” 이렇게 생각하며, 모세도 레위지파도 미쳤다고 했을 겁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결론은 달랐습니다. “너희가 오늘 날 그 아들과 형제를 쳤으니 하나님께 헌신한 것이다. 그리고 헌신 한 너희를 여호와께서 복을 내리시리라’
성도 여러분! 저는 이민교회를 오랫 동안 섬기면서 교회가 찢어지고 갈라지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았습니다. 거의 대부분 담임목사님과 장로님들의 갈등, 담임목사님과 성도들의 갈등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갈등을 들여다 보면 정말 별 것 아닌 것 때문에 반목하고 다투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어느 교회는 담임목사님이 교회 카드로 개스 넣고 보고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장로님들이 화가 나 담임목사님과 반목하게 되었고 담임목사님이 사임을 하시던가 또 어느 교회는 전도사님을 빨리 모시지 않아서 자기 자식들이 영적으로 피해 봤다고 성도들이 교회를 떠나고 정말 수도 없이 말도 안 되는 본질적이지 않은 것 때문에 담임목사님과 다투고 반목하고 그래서 교회가 갈라지고 쪼개지는 정말 처참하기까지 한 안타까운 이야기들을 접하게 됩니다. 이거 정말 하나님 앞에서 부끄러운 일 아닙니까?
우리가 대각성을 위해 모였는데 진짜 각성은 여기서 기도하는 것으로 다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 우리 교회에서 우리가 말씀으로 들을 것, 기도로 고백한 것을 실천할 때 진정한 각성을 한 것이라 할 수 있는 것 입니다. 이제는 교회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살리고 세워야 할 때 아닙니까? 그러기 위해서는 여러분들 각자 교회에 세워진 담임목사님을 삼위 하나님이 불러서 세우셨음을 믿음으로 인정하고, 그 담임목사님의 위대한 동역자 들이 되셔야 합니다.
본질이지 않은 문제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께 맡기며 일단은 하나님이 세우신 종이기에 순종하고 협력하고 나아간다 라고 믿음으로 행하면 그 누구보다 하나님이 인정해 주시고 여러분들에게 한량 없는 복으로 갚아 주심을 믿으시길 축원합니다.
우리 믿음의 1세대 되신 여러분들이 남은 인생에 그 모습을 우리 자녀들에게 보여 주셔야 합니다. 집에서 아무 생각 없이 자녀들 앞에서 하는 목회자 비방, 교회 비방, 성도 비방... 속은 시원하실 지 모르지만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자녀들을 우리와 똑같은 비방하는 자로 만드는 것 입니다. 이것은 잠재적으로 볼 때 교회의 분열 요소를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목사도 마찬 가지 입니다. 집에서 장로님, 성도님 비방하면 안 됩니다. 그러면 목회자 자녀들 그 누구보다 먼저 교회를 떠나는 겁니다. 이제 정말 목사도, 장로님도, 권사님도 집사님들도 지금까지의 우리의 잘못된 악습을 버리고 정말 교회를 살리고 세우는 일에 결단하며 나아가게 되시길 바랍니다. 그리할 때 오늘 레위 지파에게 복을 내려 주셨던 하나님의 은혜와 복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와 우리 자손 세대 만대까지 흘러가게 되는 큰 은혜가 임하게 될 것 입니다.
마지막으로 우리가 죽기 전에 반드시 해야 할 일은 우리 자녀들을 위해 중보기도를 하는 것 입니다.
31절 :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32절 : "그러나 합의 하시면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않사오면 원컨데 주의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저와 여러분들이 남은 인생 동안 해야 할 일이 바로 이것 입니다. 우리 다음 세대를 위해 기도를 멈추지 않는 것 입니다.
기도는 믿음의 선조가 그 후손들에게 남겨줄 수 있는 최고의 유산 입니다. 기도는 할 수록 땅에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늘에 쌓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 기도를 들으시고 우리의 기도대로 반드시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이 그 기도를 무시할 리가 있겠습니까? 가장 존귀하고 귀하신 당신의 독생자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하는데 그리할 수 있으시겠습니까?
오늘 날 우리 다음 세대들이 믿음으로 온전히 살고 있지 못하다면 그 첫 책임은 우리가 그들을 위해 기도를 많이 하지 못한 것에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 저들이 하나님 백성이 되지 않는다면 계속해서 죄 가운데 거하며 하나님 불신하면서 살면 저의 이름을 당신의 생명책에서 지워 주소서’라는 마음과 영혼에 대한 책임감을 가지고 기도해야 할 사명이 있는 것 입니다. 왜냐하면 다음세대들을 향한 우리의 기도는 다음 세대 마음 속에 심겨진 하나님 말씀과 믿음의 씨앗을 자라게 하는 ‘물’과 같기 때문 입니다. 아무리 가장 최상급의 종자라 할 지라도 땅에 심고 물을 주지 않으면 싹도 틔우지 못하고 땅에서 죽어 썩는 것처럼 우리가 아무리 그들의 귀에 생명의 복음과, 진리의 말씀을 넣어주고 또 넣어 주어도 우리가 기도로 그들의 영혼에 성령의 물을 부어주지 않으면 그들의 믿음은 자라지 않는다는 것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시길 바라겠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회심할 때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무엇인 줄 아십니까? “내 아버지가, 내 어머니가 나를 위해 기도했다"라는 겁니다.
한 번 많은 사람들의 간증을 들어 보십시오. 거의 하나같이 ‘부모님의 기도 때문에 제가 이렇게 되었습니다’ 라고 고백할 것입니다. 다음 세대를 위한 눈물의 기도, 자신의 생명을 건 간절한 기도 그 기도만이 하나님의 마음을 감동케 하여 우리에게 베푸셨던 은혜와 긍휼을 다음 세대 자녀들에게도 동일하게 부어 주시는 하나님 축복의 근거가 되어지는 줄 믿으시길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제 말씀을 맺도록 하겠습니다. 이제 우리는 대각성도 해야겠지만 대결심도 함께 해야 겠습니다. 죽기 전에 딱 3가지만 결심하시고 그것에 순종하기 위해 힘써 주시기 바랍니다.
첫째, 절대 말씀과 믿음에 타협하지 말고 물러서지 말자
둘째, 우리교회 담임목사님과 협력하는 동역자가 되리라
셋째, 생명을 건 기도로 다음 세대에 복을 전수하리라
이 세 가지를 주님 부르시는 그 날 까지 한 번 순종해 보시고, 준행해 봅시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반드시 우리 뉴저지 모든 교회들을 살리시고, 회복시키시고 부흥시키실 것이며 우리의 자녀들은 대대 손손 하나님께 복 받는 귀한 백성들로 살아가는 은혜가 임할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하시는 결단과 기도가 그 축복의 첫 날을 여는 복된 순간이 되시길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편집자 주 : 동영상에 나오는 설교 내용과 위의 설교 요지가 약간 다를 수 있음을 양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김동욱 기자 ⓒ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