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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를 통한 진정한 화해

복음뉴스 0 2018.02.17 17:39

[편집자 주] 복음뉴스는 남일현 목사(든든한교회 담임)의 화해를 주제로 한 주일 설교를 독자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첫 번째 설교 "진정한 화해"(본문 : 빌레몬서 1장 1-7절)에 이어, 두 번째 설교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면"(본문 : 빌레몬서 1장 8-14절)을 제공했다. 첫 번째 설교에서 "진정한 화해는 법정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제단 앞에서 이루어진다"고 결론을 지었던 남 목사는 두 번째 설교에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루려면 인간적으로는 사랑하기 힘든 사람도 용서하고 품어주어야 한다"고 말했다. 남일현 목사의 화해를 주제로 한 세 번째 설교를 제공한다. "용서를 통한 진정한 화해"라는 제목의 설교에서 남 목사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화해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진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없다. 제가 본서를 무겁게 전했던 이유는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였다."고 끝을 맺는다.


 

 

제목 : 용서를 통한 진정한 화해

본문 : 빌레몬서 1장 15-25절

설교 : 남일현 목사

 

본문 : 빌레몬서 1장 15-25절 
제목 : 용서를 통한 진정한 화해

 

지금은 폐지되었지만 ‘진짜 사나이’라는 제목의 한국의 예능프로가 있었는데, 연예인들이 군사훈련을 받으면서 점점 진짜사나이로 변해가는 모습을 보여준 TV 쇼였습니다. 그렇다면 그 프로그램에서 보여주려는 진짜 사나이는 어떤 모습일까요? ‘사나이’는 “당당하고 떳떳함을 강조하여 남자를 이르는 말”인데 훈련을 통해 진짜 사나이가 될 수 있다는 겁니다. 단어의 정의대로 하자면 진짜 사나이는 당당하고 떳떳한 모습이 있을 겁니다.

 

그렇다면 진짜 그리스도인은 어떤 모습일까요? 예수를 잘 믿는 모습일 텐데 예수를 잘 믿는 모습이라는 것이 너무나 포괄적이지만 기독교의 대표적인 이미지가 사랑과 용서의 종교 아닙니까? 그러니 진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랑과 용서의 모습이 삶에서 나타날 것 같습니다. 게다가 빌레몬의 이름의 뜻은 ‘사랑을 간직한 자’입니다. 그런 빌레몬 앞에 진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줄 기회가 생겼습니다.

 

빌레몬의 노예였던 오네시모가 도망을 쳤습니다. 오네시모의 이름의 뜻으로만 보면 유익한 사람이어야 했는데 그는 무익했던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당시는 노예가 도망을 친 것만으로도 죽을죄에 해당이 되었는데, 오네시모는 단순히 도망만 친 것이 아니라 돈을 갖고 튀었습니다. 자신의 주인의 돈을 말입니다. 그러니 오네시모는 용서받기 힘든 죄를 지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로마에서 바울을 만났고, 복음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빌레몬과의 진정한 화해를 위해 용서를 빌러 오고 있던 상황이었습니다. 그런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는 것이 쉽겠습니까? 용서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빌레몬에게 준 미션은 그 정도 차원을 훨씬 뛰어넘어 용서보다 훨씬 더 어려운 미션이었습니다. 이것이 16절에 나옵니다. “이 후로는 종과 같이 대하지 아니하고 종 이상으로 곧 사랑 받는 형제로 둘 자라 내게 특별히 그러하거든 하물며 육신과 주 안에서 상관된 네게랴.”

 

용서하는 것으로 끝나는 미션이 아니라 그 사람을 사랑해야 하고, 형제로 받아주어야 한다는 겁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용서하지 않는 상황에서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도 막히게 됩니다. 혹시 어떤 사람에 대해서 분노를 하고 있는 상황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한 적이 있습니까? 내 마음이 어떤 사람만 보면 부글부글 끓으면 그 안에 은혜가 들어갈 틈이 없어집니다. 잠시 순간적으로 은혜를 받을 수는 있겠지만 용서 못할 그 사람만 생각하면 은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그러니 그 사람 좋으라고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내 영혼이 잘 되기 위해서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그렇기에 이기적으로 생각하면 오히려 용서가 쉬워집니다. 내 영혼이 잘 되고 평안하기를 정말 바라는 사람은 용서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그 사람을 용서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그 사람을 사랑할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물론 논리적으로 생각하면 용서도 했는데 사랑하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경험상으로는 그것이 힘듭니다. 나를 배신한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신자의 마땅한 일이기에 해야 하지만, 그 사람을 사랑하고 형제로 받아주는 단계까지 간다는 것은 정말 힘든 미션입니다. 사실 우리의 수준은 아직 용서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단계 아닙니까?

 

빌레몬의 미션이 너무 어렵다고 말하는 이유가 또 있습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하고, 사랑하고 형제로 받아주는 것도 너무나 어려운 미션인데 17절에 더 어려운 미션이 나옵니다. “그러므로 네가 나를 동역자로 알진대 그를 영접하기를 내게 하듯 하고”빌레몬이 바울을 영접하는 것처럼 오네시모를 영접해야 하는 미션이니, 정말 어려운 미션이었습니다.

 

빌레몬에게 있어서 바울은 생명의 은인이었습니다. 바울이 빌레몬에게 예수님을 소개시켜줬으니 빌레몬은 바울을 통해서 예수님을 만난 겁니다. 그래서 빌레몬은 바울을 영적 아버지로 여겼습니다. 그런 바울이 온다면 빌레몬이 얼마나 정성스럽게 영접하겠습니까? 그런데 당장 죽여도 시원치 않을 도망자 노예를 영접하라는 겁니다. 그것도 바울 수준으로 영접을 하라는 겁니다. 환영받을만한 사람을 환영하는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두 번 다시 만나고 싶지 않은 사람을 극진히 영접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게다가 빌레몬이 오네시모를 받아주면 현실적으로는 복잡한 상황에 처하게 됩니다. 당시 빌레몬에게는 노예들이 더 있었을 텐데 빌레몬이 배신자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형제로 대접해주고, 극진히 환영한다면 다른 노예들이 그것을 보며 무슨 생각을 하겠습니까? 제가 빌레몬의 또 다른 노예였다면 저도 분명 돈을 갖고 튀었을 겁니다. 그렇게 해도 나중에 예수만 믿고 돌아오면 나도 빌레몬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수 있겠다는 생각이 충분히 들 수 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빌레몬 주변의 이웃들은 빌레몬의 이런 선택을 과연 이해해 줬을까요? 설령 그들이 신자라도 빌레몬 때문에 자기 노예들도 헛바람이 들 것을 염려해서 빌레몬의 행동을 미련하다고, 하극상이 벌어졌는데 제대로 막지도 못한 멍청이라고 빌레몬을 자극했을 겁니다. 그러니 본문에 나오는 바울의 미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처럼 단순한 미션이 결코 아니었다는 겁니다.

 

용서해야 할 첫 번째 이유 : 이것이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기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답은 이미 나왔습니다. 우리는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어주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왜 우리는 용서하고 품어줘야 합니까?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용서하고, 사랑하고, 품어주는 삶을 살아야 할 첫 번째 이유는 그것이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이제까지 빌레몬과 같은 큰 배신을 당하지는 않았더라도 믿었던 사람으로부터 배신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배신자를 용서하기 싫은 것은 인간으로서는 당연한 마음입니다. 하지만 신자로서 우리는 그것을 당연하게 여기면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용서해주고 사랑해주고 형제로 받아주고 극진히 영접하는 것이 신자로서의 당연한 모습이기 때문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찬송가 310장 1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아 하나님의 은혜로 이 쓸 데 없는 자 왜 구속하여 주는지 난 알 수 없도다.”

 

죽을 수밖에 없던 쓸 데 없는 죄인인 우리를 하나님이 그 은혜로 용서하시고 구원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한 번만이 아니라 지금도, 앞으로도 우리가 회개하면 용서해주실 겁니다. 그런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우리가 서로 사랑으로 용서해주고, 형제로 받아주는 것인 줄 믿습니다.

 

용서해야 할 두 번째 이유 : 우리에게 사랑의 빚이 있기에


우리가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용서해야 할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사랑의 빚이 있기 때문입니다. 19절. “나 바울이 친필로 쓰노니 내가 갚으려니와 네가 이 외에 네 자신이 내게 빚진 것은 내가 말하지 아니하노라”빌레몬은 바울에게 빚진 것이 있었는데, 물질적인 빚이 아니라 영적인 빚이었습니다. 빌레몬이 바울을 통해 예수님을 영접한 것이 바울에게 진 영적인 빚이었던 겁니다.

 

바울은 빌레몬이 자신에게 진 빚을 기억하길 원했습니다. 채권자는 채무자가 자신에게 진 빚을 기억하길 원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울과 빌레몬 사이에 있는 빚은 사랑으로 진 빚이기에 사랑으로 갚으면 좋겠는데 그것을 바울 자신에게 갚지 말고 오네시모에게 갚으라는 겁니다. 빌레몬은 바울 때문에 영생을 얻게 되었으니 죽을죄를 지은 오네시모를 이번에 살려줌으로 생명의 빚을 진 것을 생명을 살려줌으로 갚으면 좋겠다는 겁니다.

 

우리는 하나님은 말할 것도 없고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의 빚을 지면서 이제까지 살아왔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갚아야 할 사랑의 빚이 없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어떤 빚이라도 있는 사람이라면 그 빚을 갚아야 할 의무가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사랑의 빚이라면 꼭 그 사람에게 갚을 필요는 없습니다.

 

물론 내게 사랑을 베푼 그 사람에게 갚는 것도 좋지만 내가 또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주는 것도 사랑의 빚을 갚는 길입니다. 우리가 부모님께 받은 그 큰 사랑을 부모님께 효도로 돌려드릴 수 있지만 그 큰 사랑의 빚을 다 갚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그런 사랑을 우리의 자식들에게 주면 됩니다. 그러니 내게 있는 사랑의 빚을 생각하며 사랑의 빚을 갚을 수 있길 바랍니다.

 

그것은 바로 내 앞에 있는 오네시모를 용서하고 사랑하는 겁니다. 나에게 오네시모가 있습니까? 지금 내 생각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주제와 관련해서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분명히 나에게는 오네시모일 겁니다. 그에게 사랑의 빚을 갚길 바랍니다.

 

용서해야 할 세 번째 이유 :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명령이기에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도저히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용서해야 할 세 번째 이유는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21절. “나는 네가 순종할 것을 확신하므로 네게 썼노니 네가 내가 말한 것보다 더 행할 줄을 아노라”바울이 빌레몬의 순종을 확신했던 이유는 이것이 진짜 신자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옵션이 아니라 진짜 신자라면 용서를 선택해야 합니다.

 

화병이라는 것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생각으로는 나를 배신한 사람을 합법적으로 처벌하면 화병이 나을 것 같지만 하나님은 용서하고 사랑해야 화병이 낫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것은 용서를 해본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일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용서하고 사랑하는 것인데 용서하지 않고 사랑하지 않으면 내 안에 평안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용서가 모두를 살리는 길입니다. 용서가 하나님의 뜻임을 깨닫고 힘들더라도 용서함으로 둘 다 살아나길 바랍니다.

 

용서해야 할 네 번째 이유 : 이런 행동들이 공동체 전체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기에


우리가 인간적으로는 용서하기 힘든 사람이라도 용서해야 하는 네 번째 이유는 이런 행동들이 다른 사람과 공동체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20절. “오 형제여 나로 주 안에서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게 하고 내 마음이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하게 하라”빌레몬이 오네시모를 용서해주는 것이 바울에게 기쁨과 평안을 주는 일이었는데, 바울에게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부부싸움을 하고 냉전일 때 집안 분위기가 어떻습니까? 서로 싸우고 있는 동안 그 집안에서 기쁨의 웃음이 나올 수 있을까요? 그 집안이 평안할 수 있을까요? 성도들끼리 싸우고 목사와 성도가 서로 싸운 후 용서도 없고 사랑도 없는 교회 안에 기쁨과 평안이 있을까요? 제 경험상으로는 그런 적이 한 번도 없었습니다. 반대로 서로 싸웠는데 극적으로 화해를 하고, 용서를 하고, 사랑을 회복한 가정이나 교회에서는 다시 웃음소리가 들립니다. 우리는 서로 용서하고 사랑함으로 기쁨이 떠나질 않고 평안하여 든든히 서가길 바랍니다.

 

우리는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진짜 그리스도인이 보여야 할 사랑은 말로만의 사랑이 아니라 행함이 따르는 사랑입니다. 사랑의 사도였던 요한은 요일3:18절에서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바울은 행함과 진실함이 따르는 사랑을 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랑을 몸소 실천했습니다. 18절에는 바울의 행함이 따르는 사랑과 책임을 지는 사랑이 나옵니다. 18절에는 두 종류의 책임이 나옵니다. ‘불의를 하였거나 네게 빚진 것’을 나누지 않고 하나로 본다면 오네시모가 빌레몬의 돈을 훔친 죄만을 의미하는 것이겠죠.

 

하지만 ‘불의’와 ‘네게 빚진 것’을 각각 나누면 오네시모가 도망간 것 자체를 불의로 보는 것이 분명하지만, 혹시 또 다른 죄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빌레몬이 입은 경제적인 손실을 갚는 것은 물론이고, 오네시모가 형사법을 어겼다면 그를 위해 대신 책임을 지고 싶다는 겁니다.

 

예전에 바울의 심정과 비슷한 재판을 기사로 읽은 적이 있습니다. 어떤 24살 된 청년이 부모의 재산을 노리고 후배를 시켜 도둑질을 하게 했습니다. 그러다가 잡혀서 1심에서 실형을 받았는데 그 부모는 아들을 위하여 모든 것이 부모인 자신들의 책임이라는 탄원서를 제출했습니다.

 

돈을 버느라 정신이 없어서 아들을 제대로 키우지 못한 자신들의 책임이 크니 벌을 주려면 차라리 자신들에게 주라는 내용의 탄원서였습니다. 결국 판사는 적극적으로 자식을 위해 탄원서를 쓴 부모의 마음을 헤아려 실형을 선고하지 않고 집행유예로 판결을 내렸다는 기사였습니다.

 

아마 바울의 심정이 이랬을 겁니다. 내가 오네시모를 위해서라면 대신 벌을 받을 수도 있겠다는 마음이었죠. 그리고 바울은 빌레몬에게 손해를 갚겠다고 18절 마지막에서 말했습니다. ‘내 앞으로 계산하라’는 것은 청구하라는 뜻입니다. 19절에는 바울의 의지가 엿보입니다. 나 바울이 친필로 쓴다는 겁니다. 이것은 마치 차용증서를 써주듯이 자신의 필적을 증거로 제시하겠다는 뜻입니다.

 

이처럼 바울은 그저 말뿐인 사랑을 했던 것이 아니라 마치 부모의 심정으로 호소를 했고, 오네시모를 위해 어떠한 책임도 감수하겠다는 자세를 보였습니다.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사랑을 보여준 유명한 분이 계신데 바로 사랑의 원자탄으로 알려진 손양원 목사님이십니다. 여수순천 사건 때 좌익 청년에 의해서 손양원 목사님의 두 아들은 목숨을 잃게 되었는데, 목사님은 자식을 죽인 원수를 용서하고 양자로 삼으셨습니다.

 

빌레몬은 오네시모와 원수 관계였습니다. 하지만 자신의 재산을 훔쳐 달아난 것이지 자신의 가족을 죽인 원수는 아닙니다. 물질을 잃은 것과 가족을 잃은 것은 차원이 다릅니다. 하여간 원수라면 원수인 오네시모를 원수로 여기지 말고 형제로 여기라는 것이 미션이었습니다.

 

이것이 16절의 의미입니다. 그런데 손양원 목사님은 원수관계를 부자관계로 만드셨습니다. 이것이 진짜 목사다운 목사의 모습입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저는 아직 진짜 목사가 아닙니다. 진짜 목사가 되고는 싶지만 아직은 진짜 목사의 발톱의 때만큼도 안 되는 목사입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나는 그런 용서를 할 수 있고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습니까? 힘들더라도 용서하길 바랍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바울은 무슨 이유 때문에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일에 적극적으로 개입을 했던 겁니까? 왜 바울은 그 어려운 중재자 역할을 자청했던 겁니까? 세상 사람들 중에도 중재자 역할이나 해결사 역할을 자청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렇게 하면 자신에게 돌아올 뭔가가 있으니까 하는 겁니다. 아니면 상대방의 요청을 들을 수밖에 없는 약점이 잡혀도 그렇게 하겠죠. 그렇다면 바울은 오네시모에게 약점이 잡혔던 겁니까?

 

그래서 오네시모에게 유리한 쪽으로 중재를 했던 겁니까? 아니면 이 일이 잘 성사되면 오네시모에게 뭔가를 받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슨 이유 때문에 바울이 중재자 역할을 자청했던 겁니까? 이번 중재를 통해 바울이 개인적으로 얻을 이익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중재자로 자원했던 이유는 예수님 때문입니다. 9절. “도리어 사랑으로써 간구하노라 나이가 많은 나 바울은 지금 또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갇힌 자 되어”바울은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여 복음을 전하다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는 오직 예수를 위하여 살았던 사람입니다. 지금 그가 이 일을 하는 것도 결국 예수님을 위해서였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서였습니다.

 

이번 일이 잘 해결되어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는 것이 빌레몬과 오네시모의 삶을 변화시키는 원동력이 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오네시모는 복음의 일꾼으로 쓰임을 받을 수 있게 됩니다. 진정한 화해를 통하여 빌레몬은 진짜 그리스도인임을 입증할 수 있습니다. 또한 빌레몬은 용서와 화해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교회도 용서와 화해의 롤모델이자 아이콘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러니 바울은 오로지 예수를 위한 열심 때문에 개입하게 된 겁니다. 우리도 예수님을 위하여, 교회를 위하여 자신의 감정을 죽이고 다른 사람을 살려야 합니다. 용서하지 못하는 자신을 죽이고, 용서함으로 다른 사람을 살리는 것이 모두가 사는 길인 줄 믿습니다.

 

말씀을 맺겠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진정한 화해는 용서를 통해서만 이루어집니다. 세상 사람들이 사용하는 방법으로는 진정한 화해를 이룰 수 없습니다. 제가 본서를 무겁게 전했던 이유는 진정한 화해를 위해서였습니다.

 

빌레몬서는 이해하기는 쉬운 말씀이지만 실천하기에는 너무나 무겁고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에게는 너무나 필요하고 절실한 말씀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진정한 화해의 모습은 어떤 모습일지 생각하고 적극적으로 실천해서 진정한 화해를 이루는 진짜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을 보이길 바랍니다. 이 제단에서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지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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