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윤 목사의 설교 전문이다.
본문 : 삼하 21:1-2 절
제목 :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요"
오늘 말씀을 생각하면서 떠오르는 두가지 장면이 있습니다. 한 번은 백인들만 다니는 가족적인 교회를 방문했었을 때입니다. 예배후 서로 인사하며 즐겁게 친교하는데, 아무도 저를 아는 체하지 않았습니다. 예배당을 지나서, 복도를 지나서, 파킹랏으로 나와 집으로 오기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을 마주쳤는데, 모두다 저를 쓱 외면하고 지나가버렸습니다.저는 제가 투명인간이 된 줄 알았습니다. 집에 와서 거울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보였습니다. 거울에 비친 제 얼굴을 보면서, 슬픔과 안타까움, 괴로움, 좌절감 그리고 약간의 뜻모를 분노 등등의 복합적 감정이 올라왔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을 보면 또 다른 장면이 생각납니다.
오래 전, 버지니아에서 개척교회를 시작한 지 얼마 안되었을 때, 한국에서 어느 권사님이 미국에 처음 여행차 오셨다가 저희 교회를 방문해 주셨습니다. 교인수가 적어서, 예배후 거의 전 교인이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식사 친교를 했는데, 그분이 갑자기 모두가 듣는데서, ‘미국에 오니, 깜둥이를 많이 봐서, 너무 무섭다’고 하셨습니다. 순간, 식탁에 앉아 있던 우리는 모두 얼음이 되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날 식탁 봉사를 해 주셨던 여집사님의 남편이 Afro- American 이셨기 때문입니다. 그 말을 들은 우리 모두의 마음속에 슬픔과 안타까움, 괴로움, 좌절감, 그리고 약간의 뜻모를 분노, 등등의 복합적인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우리는 나와 다른 사람인가요? 아니면 나보다 못하다 여기는 사람인가요? 지극히 작은 소자를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여기고 영접하고 사랑하는데 매우 서툴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오늘 성경 본문,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다윗왕 시대에, 3 년 연거퍼 기근이 들었습니다. 그 기근 때문에 다윗이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을 때에 뜻밖의 말씀을 듣게 됩니다. 삼하 21 장 1 절 말씀, ‘이는 사울과 피를 흘린 그의 집으로 말미암음이니 그가 기브온 사람을 죽였음이니라.’
원래 기브온 사람은 이스라엘 족속이 이니요, 아모리 사람 중에서 남은 자들이었습니다. (2 절) 출애굽시절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기브온 사람들은 마치 먼 곳에서 온 것처럼 변장을 하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속여서, 화친 언약을 맺고 이스라엘 땅에 남아 목숨을 구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기브온 거민들에게 속은 것을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여호와의 이름으로 맹세한 맹약을 어길 수 없어서, 저들을 나무패며 물긷는 사람들로 받아들여 그 땅에 살게 합니다. 이렇게 기브온 거민들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에서 소수민족- 마이노러티로 오늘날 3 D 업종인가요? 온갖 궂은 일을 담당하며 이스라엘 백성들과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오랜 세월동안, 기브온 거민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동등한 권리를 누리지 못하고 살았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늘 기브온 거민들을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라는 이유로 차별했고, 저들을 자기 몸처럼 받아들이지도 않았고, 그들과의 동거를 탐탁하게 여기지도 않았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중에 몇 몇은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 나라의 혜택만 받고 기여하는 바가 적다가 불평했습니다. 어떤 이는 기브온 거민들이 이스라엘 족속들의 일거리를 뺐는다고 이야기하고, 다른 이는 은밀하게 기브온 거민들이 소유한 재산을 탐내기도 했습니다.
정치가 사울왕은 이런 백성들의 마음을 잘 읽었습니다. 그는 백성들에게 인기있는 왕이 되고자, ‘맹세한 것은 해로울지로도 변치 않아야 하고, 나그네를 돌보고,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대신에, 사람들의 마음을 쫒아, 기브온 사람들을 죽이기로 음모를 꾀하여 사회적 약자들인 저들을 핍박했습니다. 저들을 죽였습니다.
최고 통치권자인 왕의 말이 법이되는 그런 세상에서, 그리고, 민주주의, 다수의 생각이 법이 되는 이 땅에서, 사울왕은 백성들의 뜻을 따라 정치를 했을 뿐입니다. 그러나, 저들이 집행한 법- 기브온 거민들을 제거하는 법은 다수가 원하는 법이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히 하나님 말씀의 법은 아니었습니다.
문제는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됩니다. 문제가 생겨도 문제 삼는 사람이 없으면 아무 문제도 되지 않습니다. 그렇게, 기브온 거민들의 억울한 죽음은 아무도 모르게 역사속에 묻혀질 뻔 했습니다. 실제로 오늘 본문까지, 기브온 거민이 억울하게 죽었다는 성경 기사는 없습니다. 그런데, 살아계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께서 아무도 문제삼지 않은 그 문제를 문제삼으셨습니다.
다윗 왕 때에 갑자기 삼년 기근이 임하게 된 것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에 시달려 죽어가자, 다윗왕은 급해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했을 때, 다윗은 놀라운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사울왕 때에, 기브온 거민들을 죽인 사건을 알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땅에 임한 기근의 재앙을 멈추기 위해선 기브온 거민을 학살하고 이스라엘 영토내에 머물지 못하게 하려고 모해한 자의 자손 일곱 사람을 내어 주어야 했습니다. (삼하 21 장 5 절) 그리고 그 일곱 사람- 사울왕의 후손들을, 여호와 앞에서 목매어 죽이니 그제서야, 그 땅에서 기근이 그치고 하늘 축복의 문이 다시 열리게 됩니다. (삼하 21:14 절)
이 땅의 권력자와 함께 사람들이 만든 법으로, 같은 땅에 함께 거하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핍박하고 억울하게 죽인 그 사건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공의의 법으로 그 주모자들을 심판하고 그 억울함을 모두 풀어 바로잡아 주셨습니다.
저는 이보교에 처음 조인 했을 때, 이런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상 법위에 하나님의 법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 의미는 ‘세상 법으로는 사람을 구하는데 한계가 있지만, 하나님의 법으로는 능치 못함이 없다’는 뜻입니다. 자칫 오해될 수 있기에 설명이 필요한 내용입니다. 사람들이 만든 법으론, 사람을 구하는데 한계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람들이 만든 법은, 통치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그리고 다수의 사람들이 누구냐에 따라서,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권력으로, 다수의 힘으로 얼마든지, 힘없는 자와 소수를 억울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다수는 소수를 투명인간으로 만들 수도 있고, 다수는 소수를 차별적인 언어로, 모욕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이 모든 차별을 심지어 법으로 제정할 수도 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마음에 말할 수 없는 슬픔과 좌절, 안타까움과 괴로움, 그리고 뜻모를 분노를 느끼게 됩니다.
한 때 이 나라의 어떤 지역에서는 흑인은 바로 지척 거리에 학교를 두고도, 먼데 있는 흑인들만의 학교를 삥둘러 다녀야 했었습니다. 당시 법이었습니다. 유색인종은, 시민권을 받을 수도 없었고, 집을 소유할 수도 없었던 때가 있었습니다. 당시, 권력과 다수가 만든 법이었습니다. 이 법들은 아무도 문제 삼지 않으면 문제가 안되는 문제들이었습니다. 그렇게 100 년이 흐르고, 200 년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다수가 문제 삼지 않는 이 법들을 하나님께서 문제 삼으셨습니다. 그리고 해아래 압박있는 곳 주님 거기 계셔서, 하나님의 법으로, 인간이 만든 잘못된 법들을 고쳐 나가셨습니다. 약한 자 힘주시고, 강한 자 바르고, 추한자 정케함이 주님의 뜻이요, 하나님 나라 법인지라, 그 뜻대로, 그 법대로, 그렇게 이 땅에 인권법이 세워졌고, 이민자의 나라 미국이 흑백 칼러 지루한 색깔이 아니라, 더욱 총천연색으로 아름다운 세상으로 달라질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세상 법위에 하나님의 법이 있습니다. 그리고 저는 이보교의 정신이 “세상 법위에 있는 하나님의 법”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나 이 말이 절대 오해가 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좀 더 정확히 설명을 드리자면, 이보교가 하나님의 법을 따른다고, 절대 세상 법을 어기는 모임은 당연히 아닙니다.
이보교는 불체자.. 불법을 저지른 분들을 보호하는 운동이 아니라, 서류 미비자. 사람답게 살고자 우리와 함께 이 땅에 머무는 거주민들을 주님의 마음으로 church is your refuge, ‘교회는 마땅히 사람들의 피난처’이어야 한다는, 그냥 성경 말씀에 나오는 하나님의 말씀 법대로, 주님이 나같은 죄인을 이처럼 사랑하셨듯이 ‘한 사람을 나와 똑같은 사람으로 대하자는 사랑의 운동’일 뿐입니다.
오늘 본문에 기브온 거민은 출애굽 당시 자신들의 신분을 속이고, 이스라엘과 화친을 맺어, 그 땅에 거할 자격을 어찌보면 거짓으로 얻어낸 이방족속입니다. 그러나, 기브온 백성들은, 비록 속여서 목숨을 구하려 했지만, 저들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리고, 외모로 사람을 판단하시지 않고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께서는 기브온 백성도 자신의 백성으로 받으셨습니다.
오늘 본문이 등장하는 다윗 때까지, 오늘 본문 말씀처럼, 기브온 백성은 이스라엘 족속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오늘 사건 이후로, 놀랍게도 더 이상 기브온 백성은 이스라엘과 구별된 호칭으로 불리지 않습니다. 저들도 엄연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존중을 받게 됩니다. 이스라엘과 기브온 사이를 가로막은 담이 허물어 지고, 저들은 모두 주안에서 하나님의 백성이 됩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 본문 말씀이 특정한 민족이나 사람에 대한 메시지가 아니라, 저와 여러분, 우리 자신들에 대한 말씀일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백인교회에서 투명인간이 되었던 경험이 있고, 우리들끼리 함께 모인 자리에서는, Afro-American 형제들을 비하하는 호칭을 들었습니다. 내 안에는 소수민족이 있지만 또, 내 안에는 나름 남을 멸시하는 기득권이 있기도 합니다. 누군가의 갑질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나도 모르게 갑의 위치에서 말하고 행동하곤 합니다. 슬픔과 안타까움, 괴로움과 좌절, 그리고 뜻모를 분노가 치밀어 오르게 하는 그런 역한 모습들이 내 안에 공존합니다.
저는 이보교가 바로 그런 모습에 대한 하나님께서 주신 길이요, 빛이라고 생각합니다. 누구 누구 할 것없이 하나님의 말씀의 법앞에서, 긍휼한 마음을 품고 정의롭게 살아가기를 원하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갈 수있는 길을 여는 사랑의 운동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말씀을 늘 마음에 새겨, 세상 법위에 있는 하나님의 가장 온전하고 정의로운 법을 따라 하나님의 의를 이 땅에 이루는 저와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작은 소자에게 냉수 한 그릇 떠준 것도 결단코 상을 잃지 않게 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의 법을 따라서, 주변 이웃들을 섬기고 사랑하여, 참 평화와 기쁨이 넘치는 아름다운 하나님의 나라를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이 땅에 이루는 일에 존귀하게 쓰임받는 우리 이보교 가족들, 그리고 이 자리에 함께 해 주신 여러분 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김동욱 기자ⓒ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