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는 황현조 목사가 집회 둘째 날, 첫 집회에서 전한 말씀의 요지이다.
“진정한 평화와 안식의 비결” 행 12:1-7
설교
중 찬송(새 382 구 432 주 너를 지키리)
지난 주간 우리는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 탄생을 경축했다. 우리의 구주 예수님은 평강의 왕이시다. 예수님 오시기 800년전 이사야 선지자는 오실 메시야 예수님이 기묘자,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고 예언했다(9:6). 그래서 800년 예수님이 오셨을 때 누가복음을 기록한 사도 누가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에 평화로다”라고 선포했다 (2:14). 그리고 예수님께서 3년동안 공생애 목회를 하시면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마 11:28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예수님께서 왜 하필 평강의 왕으로 오셨을까? 왜냐하면 이 세상은 죄악으로 인해 평화가 파괴되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전쟁, 다툼, 테러, 폭력, 갈등이 많아도 너무 많다. 원수 마귀는 국가, 사회, 가정, 교회마다 평화를 깨뜨리고 있다. 그래서 일찌기 성 어거스틴은 그가 쓴 ‘ 하나님이 도성. 신국론’에서 Peace is our final good –평화야 말로 인간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요, 그것은 오직 예수님안에서만 얻을 수 있다. 중세때 유명한 서사시 신곡(Divine Comedy)을 쓴 단테는 In His will is our peace라고 했다.
인간은 요람에서 무덤까지 갈 동안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리지 못한다.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위치한 한 대학교 교수 연구실에서 큰 싸움과 소란이 일어나고 창문이 부서지고 커텐이 찢어지고 책상 집기들이 창문 밖으로 던져지고 사람들이 싸우는 고함소리가 진동하여 누군가 경찰서에 신고하였다. 그래서 경찰들이 들이닥쳐 보니까 교수 연구실이 난장판이고 어떤 사람은 코피를 흘리며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경찰이 사건의 원인을 조사해 보니까,그들은 철학, 정치학, 사회학 박사들인데 “이 세상에 어떻게 평화를 유지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토론을 하다가 그런 난장판 싸움이 벌어졌다는 것이었다. 대학교수, 박사들.. 그 얼마나 창피스런 일인가? 아무리 교수, 박사, 지식인들이라 할찌라도 인간 지식의 힘으로 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 올 수 없는 것임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오늘 성경본문 행 12장에 보면 베드로 사도가 굉장히 어려운 형편에 처해 있었다. 당시 헤롯 아그립바 1세(헤롯대왕 손자)는 또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7장에서 스데반이 돌에 맞아 순교한 이후 좀 잠잠한가 했는데, 지금 여기 행 12장에서 예수님의 3대 제자 중인 하나인 야고보(요한의 형) 사도가 순교 당하게 되는 극심한 박해가 일어났다. 헤롯왕 자신도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고, 또 기독교인들을 잡아 죽이면 유대인들이 기뻐하는 것을 보고 야고보 사도도 칼로 목을 베어 죽이고 지금 베드로 사도도 체포하여 감옥에 가두었다.
그것도 그냥 감옥에 가두는 것이 아니라 얼마나 삼엄하게 지켰는가 하면, 군인 4명씩 4조를 짜서 베드로 사도를 24시간 교대로 감시 (군인 2명은 베드로 사도와 같이 쇠사슬을 손목에 채워 밀착 감금).. 그러니까 베드로가 잠잘 때도 두 군인 옆에서 자고 화장실 갈때도 같이 가고..이런 지경이니 얼마나 고통스러웠겠는가? 헤롯왕은 베드로 사도를 이렇게 잡아 두었다가 유대인의 큰 명절인 유월절이 오면 유대백성들 앞에 끌어내어 죽일 계획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이때 교회는 무엇을 했는가? 5절을 보라.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빌더라/ 기도하였더라! 행 11장에서 안디옥교회가 설립되고 바나바와 바울 사도를 이방인 선교사로 파송한 이방인 선교의 전초기지인 안디옥 교회는 선교하는 교회였고, 또한 간절히 기도하는 교회였다. 지금 옥중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위해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고 있는 것이다. 의인의 간구는 과연 역사하는 힘이 컸다. 약 5:16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 즉각 하나님께서 그들의 기도에 응답해 주셨다.
헤롯이 베드로 사도를 처형할려고 하는 그 전날 밤에 베드로가 두 군사 틈에서 두 쇠사슬에 매인채 잠 자고 있고, 파숫군들은 옥문 밖에서 감옥을 지키고 있었다. 도저히 잠을 편하게 잘 수 없는 환경인데도 베드로는 곤히 자고 있었다. 아니 얼마나 깊이 자고 있었길래 홀연히 주의 천사가 나타나서 감옥에 빛의 광채를 환히 비취었는데도 깊이 자고 있으니까, 천사가 베드로의 옆구리를 막 쳐서 깨울 정도였다. “베드로 사도여 빨리 일어 나시오. 빨리 일어나서 밖으로 나갑시다” 하니 그제서야 잠을 깼다. 바로 그때 놀라운 이적이 또 다시 일어난다. 베드로 사도의 손에서 쇠사슬이 슬… 풀어지는 놀라운 일이 일어난 거예요.
천사: “빨리 옷의 띠를 메시고 신발을 신고 겉옷을 입고 저를 따라 나오세요.” 베드로는 금방 곤히 자다가 갑자기 깨어나서 무슨 영문인지 모르고 꿈인지 현실인지, 무슨 환상을 보는가 했어요 (9절). 감옥의 파숫군이 두겹으로 지키고 있는데 천사가 앞서고 베드로가 뒤 따라 감옥문을 나가는데 첫번째 파숫군도 무사통과 두번째 파숫군도 무사통과…아마도 파숫군들이 감옥에 천사가 광채가 갑자기 환하게 비취고 천사가 나타나니 혼비백산.. 얼음같이 얼어 붙어 버렸던거지요. 감옥을 나와서 성으로 통하는 쇠문에 도착하니 성문도 저절로 열렸다. 그 성에 들어가 거리를 걸어갈 때 천사가 홀연히 떠났다.
그때서야 베드로는 정신을 차리고 “오 주님께서 천사를 보내서 철통같은 감옥에서 탈출시켜 주셨구나! 하나님의 초자연적 역사를 몸소 체험한 것이다. 그리고 마가 요한의 어머니 집의 다락방(오순절날 제자들이 이곳에 모여 간구할 때 성령이 강림하신 곳. 그때부터 제자들의 집합장소, 기도의 장소)를 찾아갔다. 베드로가 가니까 그날도 성도들이 모여 기도하고 있었다.
베드로가 문을 두드리니 로데라는 여종이 나와 베드로 음성을 알아채리고 너무 기뻐 대문을 열지도 않고 안으로 뛰어 들어가 “여러분, 베드로 사도께서 오셨어요!”
“너 정신 나갔어? 베드로 사도가 갇힌 감옥은 얼마나 경비가 삼엄한데 무슨 소리 하는 거야? 그의 수호 천사 아니야?” “아니 정말이에요. 분명히 베드로 사도님의 목소리에요.”
베드로 사도가 계속 문을 두드리니까 설마하고 모두 문을 열고 보니 진짜 베드로 사도가 거기에 서 있는 거예요. 사람들이 깜짝 놀라 안으로 모셔놓고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감옥에서 나왔어요? 베드로는 자초지종을 다 설명…야고보(주의 동생 야고보)와 형제들에게 이 말을 전하라 하고 떠나 다른 곳으로 떠났다. 헤롯왕은 그날 난리법석..소동. 파숫군들 족치고 심문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다. 다음 장인 행 13장에 보면, 얼마 안가서 베드로를 죽일려고 했던 헤롯 아그립바 왕은 하나님의 징벌을 받아 벌레에 물려 죽고 말았다.
자 그러면 오늘 이 성경본문 사건에서 베드로 사도가 어떻게 그렇게 끔찍한 감옥 환경 속에서도 전혀 하나님께 불평하거나 원망하지 않고 (그런 성경구절이 한번도 없다)..그리고 편안히 깊은 잠을 잘 수 있었을까? 여기에 촛점을 맞추고 말씀을 묵상해 보자. 진정한 평화와 안식의 비결을 우리는 여기에서 찾아 볼 수 있다.
1.하나님께서 성도들을 반드시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때문이었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환경과 염려를 다 주님께 맡겼다. 그것이 베드로 사도의 신앙의 핵심이었다. 그가 친히 기록한 베드로전서 5장7절에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 여기 권고하신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다 보호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여기서 던져 버리라 Cast 헬라어 성경 원문 에피리단테스 부정과거형 분사 (aorist능동태동사) 다 내어 던져 버리고 두번 다시 생각하지 않는 뜻을 강조하는 단어 시제이다.
Bishop Tolstoi Sheer는-- 염려를 하나님께 다 던져 맡기지 않는 것은 무신론과 같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All worry is atheism, because it is a want of trust in God.라고 했다. 그러므로 염려의 종말은 믿음의 시작이요 믿음의 시작은 염려의 종말이 되는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던져 맡겨버렸다. 염려를 많이 하면 마음의 평화를 결코 가질 수 없다.
그리고 바로 그 앞구절 벧전 5:6절에 보면 그러므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 아래서 겸손히 인내하고 지내면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시리라.
그리고 바로 그 뒤의8-9절에 보면,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킬 자를 찾을지라도 너희는 믿음을 굳세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 세상에서서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 앎이니라.
이것이 바로 베드로 사도의 신앙 철학이요 신앙의 핵심이다. 어떠한 마귀의 시험이 오고 고난이 찾아 온다 할지라도 모든 염려를 다 주께 맡겨라. 그리하면 그 전능하신 하나님의 손이 너를 보호해 주시고 보살펴 주실 것이다. 아무리 마귀가 우는 사자와 같이 삼키려고 덤벼들어도 너의 믿음을 굳세게 하여 마귀에게 항복하지 말고 대적하라. ..이와같은 확고한 신앙때문에 베드로 사도는 처참한 감옥 안에서도 평안히 깊이 잠을 자고,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찬송가 부릅시다. (너 근심 걱정 말아라 주 너를 지키리)
이 찬송은 Walter Martin 목사님 부부가 지은 은혜로운 찬송이다. 사모님 Cilvia Martin은Canada Nova Scotia에서 1904년 태어나 목사의 아내가 되었다. 몸이 약해서 병상에서 주님을 의지하며 이 시를 썼다. 남편 Walter Martin 목사님은 미국 하바드 대 졸업하고 목사와 교수로 사역을 했던 분인데 사모님이 병상에서 쓴 시에 자신이 곡을 붙여 세계적으로 유명한 찬송이 되어 많은 성도들에게 위로와 평안을 주어 왔다.
비록 감옥에 있더라도, 비록 병상에 있더라도, 어떠한 역경에 처해 있을 지라도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너를 지켜 주신다는 확고한 신앙이 있을 때 우리는 주님이 주시는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는 비결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2.두번쩨 비결은 고난을 단순히 고난으로 보지 않고 천국 상급의 전주곡으로 본 것이다.
베드로 사도의 별명은 산 소망의 사도이다. Apostle of a Living Hope 베드로 1:3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
베드로서는 이방 나라 각 지역에 흩어져 있는 나그네로서 그들의 신앙때문에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에게 산 소망을 주기 위해 쓴 서신이다. 그 흩어진 나그네 성도들이 박해와 시련을 받아 고난에 처하여 근심하지 않을 수 없는 처지였지만 오히려 크게 기뻐하는 성도들을 너희들은 금보다 더 귀한 신앙을 가졌다고 격려하고 칭찬하는 서신이다.
그래서 벧전 3:19 애매히 억울하게 고난을 받아도 하나님을 생각하고 슬픔을 참으면 이는 아름다운 것이라 했고
3:20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니라.
4:16 만일 그리스도인으로 고난을 받은 즉 부끄러워 말고 도리어 그 이름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4:12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이와같이 베드로 사도의 고난에 대한 개념은 천국 상급의 전주곡으로 보았고, 하나님께 영광 올려 드리는 기회로 보았다. 그랬기 때문에 그는 환난과 핍박가운데서도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다.
우리도 이 세상 살면서, 신앙생활 하면서, 교회 잘 다니고 봉사 열심히 할 때도 원치 않는 고난을 당할 때가 많다. 그래서 자칫 마음의 평화와 안식을 잃어 버리기 쉽다.
그러나 이때 베드로 사도의 평화와 안식을 얻는 비결을 우리도 배워야 한다.
벧전 5:10잠간 고난을 받는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건하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고 하신 약속을 믿자.
이사야 26:3 주께서는 심지가 견고한 자를 평강에서 평강으로 지키시리니 이는 그가 주를 의뢰함이니이다.
(Oyster and its Pearl) Pearl= the product of pain. 굴 껍질 속으로 모래 한알이 들어오면sensitive skin에 irritant, and so painful… oyster releases healing fluids.. 액체를 분비하여모래를 감싸 버려요. 모래가 주는 아픔과 상처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그것이 오랜 기간이 가면 값진 진주가 된다. 그래서 진주는 Symbol of Pain n Suffering, 치료된 상처의 심볼이다.
The healed wounds=Pearl 값진 진주는 시달림, 아픔, 상처의 과정을 통하여 창조된 것.
만약 이런 고통이 없었으면 진주는 생겨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어떤 굴들은 모래가 안들어와서 아무런 상처나 고통 안 받을 수 있다. 그게 반드시 좋은가? 값진 진주를 찾는 진주 장사들은 버리든지, 아니면 굴젓이나 굴 튀김으로 만들어 자기 입으로 넣고 말 것이다. 물론 맛은 있지만 생굴을 진주처럼 귀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성경은 성도가 이 세상에서 받는 환난과 핍박과 시험은 다 천국 진주가 되기 위한 과정이라고 가르친다.
바울사도는 롬 5:3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3.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는 세번째 비결은 기도이다. 특별히 중보기도이다.
본문 5절을 보라. ‘베드로는 옥에 갇혔고 교회는 그를 위하여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하더라.
이게 바로 중보기도이다. Intercessory Prayer. 물론 여기서 감옥에 있는 베드로 자신은 기도 안하고 밖에 있는 교회 성도들만 기도했다는 뜻은 아니다. 베드로도 옥에 갇혀 얼마나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했겠는가?
사실 베드로 사도는 기도의 사도였다. 행 9:40에 보면 믿음의 여성도 다비다(도르가)가 욥바에서 죽었을 때 베드로 사도가 무릎을 꿇고 간절히 기도하고 시체를 향하여 ‘다비다야 일어나라’하니 그 기도의 능력으로 다비다가 눈을 뜨고 일어났다. 행 10:9에 보면 베드로 사도는 지붕에 올라가 기도하는 중에 하늘에서 보자기가 내려오는 환상을 보고 이방인 선교의 계시를 받고 이방인 고넬료의 집에가 가서 설교하고 고넬료 뿐만아니라 많은 이방인들을 구원한 것이다.
이때도 베드로 사도는 감옥 안에서 기도하고, 성도들은 전 교회적으로 간절히 중보기도했다.
기도는 성도의 생명이요 호흡이다. 기도는 성도가 성령님과 함께 살고 있는 증거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기도를 수차례에 걸쳐 가르치시고 마 18:19에 보면 너희는 합심하여 기도하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 두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개인기도, 합심기도, 중보기도- 바로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기도이다.
지금 감옥에 있는 베드로 사도를 위해서도 성도들이 합심기도, 중보기도를 간절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럴때 예수님의 약속대로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서 들으시고 기도 응답을 해 주신 것이다. 베드로 사도는 바로 이 기도의 능력, 기도응답의 확신을 가졌기 때문에 옥중에 매여 있었고, 사형당하기 전날 밤이라도 잠을 편안히 자며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누릴 수 있었던 비결이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새벽, 진정한 평화와 안식을 얻는 3가지 비결을 말씀드렸다.
1) 하나님께서 보호해 주시고 지켜 주실 것이라는 확신
2) 고난을 천국 상급의 전주곡으로 보는 고난에 대한 신앙적 관점을 가졌다.
3) 간절한 개인기도, 합심기도, 중보기도이다.
할렐루야! 통성기도 합시다.
김동욱 기자ⓒ 복음뉴스(BogEumNew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