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밤에 11시까지 일기를 쓰고 12시까지 컴퓨터를 보다가 12시에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12시 50분에 깨어 버렸다. 잠을 자려고 애를 써도 잠이 오지 않아서 다시 일어나 컴퓨터를 키고 이미 쓴 일기를 보면서 수정하고 있었다. 내가 불을 켜고 컴퓨터를 보자 아내가 불빛 때문에 잠을 깨어 불평을 털어 놓다가 이내 잠이 든다. 나는 잠이 오지 않아 3시까지 컴퓨터를 보다가 아무래도 잠을 자야 할 것 같아서 4시 30분에 잠이 들었다가 다시 6시에 잠에서 완전히 깨어났다. 이제는 준비하고 떠나야 하기 때문에 일어나서 샤워를 했다. 아내도 일어나서 준비를 한다. 6시 30분에 morning call이 들어 온다. 7시에 호텔 식당으로 식사를 했다. 깨끗은 했지만 먹을만한 것이 거의 없었다. 짐을 정리하고 8시 30시에 Leipzig로 향했다. 라이프니찌는 동독에서 가장 큰 도시이며 독일 통일의 성지이다. 오늘 이 곳을 간다. 먼저 St. Thomas church를 갔다. 토마스 교회와 라이프찌히 교회에서 바하가 27년 동안 지휘를 했다. 바하의 생전에는 그가 인정을 받지 못했는데 그가 죽은 후에 멘델스죤이 그의 곡으로만 연주를 해서 그의 이름이 유명하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토마스 교회 안에도 멋있는 스테인 글래스가 있었다. 교회의 역사와 함께 신앙의 고백이 담겨져 있다. 교회들도 성당처럼 다 스테인글래스가 있었다. 요새 교회는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에는 성당이었다가 신교의 교회로 변해서 그렇게 된 것 같다. 토마스 교회를 나와 라피프찌히 대학으로 갔다. 이 곳은 원래 칼 막스 대학이었는데 라이프찌히 대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곧 이어 Nikolai교회로 갔다. 니콜라이 교회는 제단 위에 평화의 천사를 그리고 평화의 상징으로써 교회의 중간과 천정을 지탱하는 기둥에 평화의 종려나무를 장식했다. 이것은 평화의 기도로 이것이 30년 후에 엄청난 영향력을 주었다. 1980년 초반 매년 11월마다 평화를 위한 집회를 시작했다. 열흘동안은 젊은이들이 기도를 위한 모임을 가졌다. 서독에는 점차 증가하는 군비 확장을 반대하는 시위가 일어났던 반면에 여기 동독에서는 교회에서 뜨거운 주제들에 대해 심사숙고할 가능성만 있었다. 라이프찌히 동부 출신의 젊은 성도들이 평화를 위한 기도의 끈을 매주 계속 이어가고자 매주 월요일 오후 5시에 평화를 위한 기도회가 만들어졌다. 처음에는 퇴역한 군인들에 의해, 그리고 환경 단체에 의해 그리고 세계의 빈부의 격차로 점점 더 빈곤이 악화되고 있는 가난한 나라의 모순을 폭로하는 젊은이들에 의해 지속하다가 동독의 모든 인권침해에 대항하여 자국의 정의와 인권의 수호를 위해 헌신했던 단체들이 가담했다. 이러하던 평화의 기도회가 수백명이 모이고 10월 초 광장과 거리에 수천만의 사람들이 모였다. 니콜라이 교회의 “모든 이들에게 열려 있다" 는 명제는 1989년 가을에 놀라운 현실이 되었다.
니콜라이 목사인 크리스티안 퓌러 목사의 의해 “누구나 이 곳에 와서 이야기를 하자”는 모토로 시작한 월요 기도회가 기도 모임후에 십자가를 앞세운 시가 행진을 하였다. 이것이 매주 하는 월요 데모 기도 모임을 발전하여 나중에는 30만이 기도회에 참석하였다. 이것을 막이 위해 비밀 경찰이 니콜라이 교회의 신도석을 점령하였는데 그들이 산상수훈의 말씀을 듣는 중에 변화를 받고 철수하였다. 평화의 기도에서 비폭력 요청을 지지하는 호소문이 낭독되고 이천명 이상이 행진을 위해 교회 밖으로 나왔을 때 수만명의 사람들이 그들의 양손에 촛불을 들고 광장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비폭력 운동은 결국 당과 이데올로기적 독재정권을 붕괴시켰다. 결국에는 이것이 베를린 장벽을 무너 뜨리고 통일을 이룩하였다. 동서독의 통일은 교회가 이룩한 것이다. "이는 군대나 힘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영으로 된다"는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 진 것이다.
나는 니콜라이 교회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기도 드렸다. “하나님 니콜라이 교회의 기도회가 베를린 장벽을 무너 뜨리고 독일의 통일을 이룩하였는데 우리 대한민국도 휴전선이 무너지고 남북한이 통일 되게 하여 주옵소서! 이것을 우리 교회가 감당하는 시발점이 되게 하여 주옵소서!” 니콜라이 교회에서 특히 인상 깊은 것은 본당 맨 앞의 제단 옆에 돌아가신 역대 담임 목사님들의 대형 초상화가 그려진 액자가 붙어 있다. 현재의 담임 목사님은 목회를 하시다 돌아 가시면 붙인다고 한다. 담임 목사의 초상화를 붙일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목사님들이 존경이 받았고 그리고 교인들이 존경을 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 모습인가? 하나의 무조건적인 숭배나 추종이 아닌 한국 교회가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독일에서는 모든 목사들이 정당에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기독 민주당은 주로 목사들이 가입되어 있고 기독 사회당은 신부들이 가입되어 있다고 한다.
독일 한인 교회는 한국의 군사 정권 시대에 파견된 광부와 간호사를 통해 시작되었는데 지금은 수백개의 교회가 있다고 한다.
독일의 도시는 멋있다. 지금 우리가 다니는 지역은 동독이었지만 공산주의 사회였다는 느낌이 전혀 없다. 자유롭고 평화로운 그 자체다. 한국도 통일이 되어 북한이 지금의 동독의 모습과 같은 날이 오기를 기대해 본다.
라이프찌히를 떠나 루터가 태어난 고향이며 루터가 죽은 Eisleben으로 향했다. 아이스레벤의 독일 식당에서 루터 세트라는 이름의 식사를 하고 루터의 생가를 갔다.
루터는 여기서 태어나서 얼마 살지 않았지만 루터 때문에 이름이 알려 지고 수많은 사람들이 방문한다. 2년 전 루터의 종교 개혁 500주년에는 4만의 주민인데 7만명의 방문객이 모였다고 한다. 비텐베르크에는 4만 5천의 주민에 18만명의 관광객이 모였다고 한다. 루터가 루터와 관계 있는 도시들을 먹여 살린다. 그리고 바로 근처에 있는 루터가 난 지 하루만에 유아 세례를 받은 성 베드로 바울 교회를 방문했다. 그 당시 아이들이 어려서 많이 죽기 때문에 부모들이 아이들이 죽기 전에 세례를 받는데 너무 어린 아이를 세례주기 위해 물 속에 집어 넣다가 꺼내서 오히려 죽는 아이들이 많았다고 한다. 그 교회에서 나와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하다 죽은 안드레아 교회를 방문했다. 루터가 세례를 받은 교회나 마지막 설교를 한 교회는 입장료를 2유로씩 기부 형태로 받고 있었다. 교회가 시골에 있어 재정이 넉넉치 못해서 그렇다. 입장료가 아까웠지만 연약한 교회에 헌금을 한다는 마음으로 기꺼이 내었다. 안드레 교회를 가는데 길에 10CM정도의 정사각형의 동으로 새긴 판을 길에 박아 놓았다. 이것은 2차 대전때 독일에 의해 아우슈비치 수용소에 끌려 가서 죽은 사람의 이름과 죽은 날짜를 새겨 붙여 놓은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걸림돌로서 그 곳을 지나는 사람마다 이 돌을 보면서 반성하며 숙고하라는 것이다. 교회 뒷쪽에 광장이 있는데 그 곳에도 루터의 동상이 있다. 루터는 박사 가운을 입고 있는데 이것은 루터가 박사학위를 받으려고 성경을 공부하다가 의인은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왼손에는 성경책, 오른손에는 레오 10세가 보낸 파문서를 꾸겨서 갖고 있다. 그는 성경만을 가지고 교황의 교시만을 가진 카톨릭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루터는 할레에서 설교를 하다가 심장 마비를 일으켜서 비텐베르크로 가려다가 못가고 자기 고향으로 와서 안드레아 교회에서 5번 설교를 하였다. 그런데 1546년 2월 15일에 마지막 설교를 마치지 못하고 다시 심장마비를 일으켜 친구 집에 옮겨져 있다가 18일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다. 나는 루터가 마지막 설교를 하던 그 강대상에 올라서서 루터의 설교하는 모습을 그렸다. 루터는 자기의 시신을 자기가 세례를 받은 성 베드로 바울 교회에 묻히기를 원했지만 생전에 루터를 후원한 쟉센의 프리드리히 3세가 루터를 베텐베르크 교회에 묻혀야 한다고 해서 루터가 95개조의 반박문을 반포한 성채 교회에 묻혔다.
Eisleben을 떠나 루터가 수도 생활을 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Erfurt로 갔다. 여기는 아우구수티누스 수도원이 있다. 1495년 루터가 수도사로 생활한 곳이다. 당시에 Erfurt에는 수도원이 6개 있었는데 아우구수티누스 수도원이 가장 엄격하고 철저한 고행을 해서 루터는 여기를 선택했다. 그 곳에서 일주일에 3일을 금식하며 철저하게 고행을 하며 공부하여 사제가 되었다. 2년 전에도 우리는 여기를 방문했지만 밖에서 여기가 루터가 수도생활을 하던 어거스틴 수도원이라는 말만 듣고 갔지만 오늘은 수도원 내부와 2차 대전때 폭격에 의해 죽은 고아들을 기념하는 기념관까지 다 들렀다. 루터는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이었다. 그가 하나님 앞에서 영적으로 철저히 낮추고 자신의 죄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했기 때문에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닫고 결국에는 종교 개혁의 깃발을 들 수 있었다. 그가 사제를 받은 성 마리아 돔 교회가 Erfurt 광장 앞에 크게 우뚝 솟아 있다. 70계단을 올라가는 거대한 교회이다. 그러나 날이 이미 6시가 되어 성 마리아 돔 교회 내부는 들어 가지 못하고 우리는 숙소인 Erfurt의 Akzent Hotel로 왔다.
사진 설명(위로부터) : Leipzig 교회 ==> Nikolai 교회 ==> Leipzig 교회의 바하 동상 ==> 루터가 태어난 Einsleben 에서 루터가 죽기 전에 마지막 설교한 안드레 교회의 강단 ==> 루터가 사제로 임명 받고 첫 목회 활동을 한 Erfurt 의 성 마리아 돔 성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