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오랜만에 눈다운 눈이 내렸다. 제설차가 분주히 오가고 있으며 빗자루와 눈삽을 든 아이들이 용돈 마련을 위해 열심히 이웃을 방문하고 있다. 이들 중에는 순전히 선심으로 하는 아이들도 물론 있다. 그런데 눈다운 눈이란 무엇일까. 내가 말하는 눈다운 눈이란 잠깐 얼굴만 비친 눈이 아니라 우리 주변의 모든 사물을 포근히 덮을 수 있는 분량의 눈을 말한다.
겨울눈의 덕목은 무엇일까. 그것은 위대한 흰 빛깔이요, 모든 것을 자비로이 덮어 주는 포근함이다. 그러므로 흰 눈이 고요히 내리는 날이면 더 할 수 없는 마음의 평온을 느끼게 된다.
내가 글로서 처음 만난 흰 눈은 고등학교 1학년 때 배운 현대국어의 <백설부>란 수필을 통해서였다. 이 작품은 청천 김진섭 님의 것으로 수필 속의 흰 눈은 고요한 모습이 아니라 만 리 허공에 뒤얽히고 설켜서 휘날리는 그야말로 백설 난분분의 눈이었다.
그 때 함께 배운 <신록 예찬>, <낙엽을 태우며>, <산정무한> 등의 작품에선 우리말의 신선함과 정갈성을 대할 수 있었다면, 청천의 수필에선 우리말 문장의 화사함이 각 문장을 구성하는 내밀한 언어의 의미론적 깊이와 넓이를 무한으로 뒤엉키게 하며 마침내 질서를 찾아가는 신비한 황홀감을 주기도 했다. 어쨌든 청천의 눈은 고요한 날의 포근한 눈은 아닌 것만은 틀림이 없으나, 웬일인지 나는 눈이 오는 날엔 백설부가 생각난다. 그 때 우리를 가르쳐 주셨던 남 자, 석 자 쓰시는 김 선생님의 추억도 새롭다. 그 후 10년쯤 후에 나는 이 어른을 문인 협회에서 잠깐 뵈었다. 그 때 그 분은 어느 유명 대학의 교수 명함을 내게 주셨었다. 그러나 나는 곧바로 이민을 왔고 따라서 그것이 그 분과의 마지막이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우리는 상황에 따라 여러 정서의 눈을 대할 수 있으나 그 중에서 한국의 저명한 시인이신 정현종 님의 눈은 또 다른 의미의 세계로 우리를 인도한다. 찬찬히 이 분의 시속을 살피며 거기 쌓인 눈발을 한 번 걸어 보자.
우선 이 분의 눈은 대낮에 만인이 보는 가운데 내리는 눈발이 아니다. 정현종 님의 눈은 고요한 밤에 아무도 안 보는 시간에 내린다.
보아라 깊은 밤에 내린 눈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아무 발자국도 없다.
아 저 혼자 고요하고 맑고
저 혼자 아름답다.
<시 부질없는 시>에서 인용
이 시 속의 흰 눈은 우리들의 빤한 수식을 거부한다.
혼자 맑고 홀로 아름답다. 하여 인간의 시선이 머무는 것조차 허용이 아니 되는 밤중에 내린 눈이다. 도무지 아름다움이란 무엇일까? 참 고요함이란 무엇일까? 내가 무엇을 아름답다, 선하다 할 때 과연 그것들이 참 일 수 있을까?
엄밀히 말하면 그것은 내 기준의 아름다움이요 선함이 아닐까? 한마디로 <도가 도비 상도>요 <명가 명비 상명>의 가르침이 옳은 소리 아닐까? 한 번 더 생각해보자.
참 고요함이란 무엇일까? 그것은 인간의 언어가 넘어갈 수 없는 곳, 다시 말해 언어가 생성되기 이전, 설명이 필요 없고, 할 수도 없는 그 곳의 상태를 고요라 하지 않을까? 그런 곳에서는 모든 것은 홀로 의미를 가지며, 홀로 맑고, 홀로 아름다울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깊은 밤에 내리는 아무도 본 사람이 없는 눈
저 혼자 맑고 저 혼자 아름다운 눈을 한 번 보고 싶다
나는 언젠가 눈 내리는 깊은 밤 내가 항상 찾던 그 숲을 찾으리라
밤이 새어 돌아오는 길엔 결코 내 발자국을 남기지 아니할 것이다.
설렘- 짜증- 잊음 - 설렘의 사이클로 돌아가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