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믿음(Faith)과 지식(Understanding)
글 : 한삼현 목사 (뉴저지 빛과 소금교회)
세상이나 반기독교적인 성향에 속한 자들은 예수 믿는 자들(신자)의 믿음에 대하여 흔한 오해를 가지고 있다.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죄 용서와 의롭다 함을 얻는다’(이신칭의)는 교리를 맹렬히 공격한다. 자신이 행한 바에 대해서 스스로 책임지지 않고 잘못이나 죄를 타인에게 전가하는 비열한 근성을 가졌다고 비난한다. 그렇기 때문에 신자는 올바른 생각을 하지 않는 자, 이성적이고 합리적 사고에 미치지 못하는 자, 미신적 신비적 기적적 관습에 빠진 자라고 매도한다. 이런 오해와 비난에 대해 우리 신자는 항상 돌이켜 스스로 어떤 편견이나 맹신에 빠져 있지 않은지를 점검해야 한다. 일찍이 바울이 인종적 관습적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는 고질적인 인습에 대하여 일깨웠던 말씀을 우리는 기억한다. “유대인은 표적(signs)을 요구하고 헬라인은 지식(wisdom)을 찾더라.”(고전 1:22)고 하는 바울의 일침을 신자는 항상 되새겨야 할 것이다.
한편 신자들은 일반적으로 ‘지식’에 대한 성경의 고전적 정의를 잠언 1:7에서 찾는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신자들은 인간 지식의 근본과 출발점이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신자들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지식’을 얻는 것이 가능한 방식이라고 받아들인다. 이런 관점으로 히브리서 저자 역시 다음과 같이 말씀한다. “믿음으로 우리가 아는 것은(By faith we understand that…)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졌고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히브리서 11:3) 명백하게 성경은 ‘지식’ 그 자체만을 소개하지 아니할뿐더러 ‘지식’ 앞에 ‘믿음’을 우선순위에 두고 있다는 점을 확인시켜 준다.
또 다른 한편으로 학문의 엄격성 내지 엄밀성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지식’에는 결코 ‘믿음’(또는 어떤 전제)이 들어가면 안 된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학문이나 지식 추구에서 불확실한 요소(믿음이나 어떤 전제)가 개입된다면, 학문의 근거나 지식의 질이 떨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들은 가급적이면 학문과 지식 추구에서 믿음이나 어떤 전제를 배제하려고 한다. 그러나 아주 냉정하게 ‘믿음’(또는 어떤 전제)을 배제하고서 과연 순수한 학문이나 지식 습득이 가능할 것인지 우리는 의심을 품지 않을 수 없다. 일반적으로 세상에서는 ‘지식’에 대한 고전적 정의를 대부분 고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에게서 찾고 있다. 놀랍게도 플라톤은 ‘지식’(knowledge)을 이렇게 정의한다. ‘justified true belief’(정당하게 여긴 또는 근거 있는 참된 믿음)이라고 하였다(Theaetetus『지식론』이라고 한다, 201 c-d). 이렇게 본다면 결국 우리는 믿음과 지식은 근본적으로 뿌리가 같다는 것을 확인하게 된다. 나아가서 모든 지식은 믿음(또는 어떤 전제)에서 출발하고 기초한다고 생각할 수 있다.
1. 인간의 타락한 본성으로는 온전하고 참된 ‘지식’이 불가능한 이유는?
성경은 사람의 타고난 성품을 가리켜 일반적으로 “육신”(the flesh, 육체)이라고 부른다. 인간(Adam)이 범죄 한 이후로 본래부터 지음을 받았던 선한 성품이 왜곡되고 변질된 것을 두고 사용하는 말이다. 즉 죄로 말미암아 더러워지고 부패하여 쓸모없게 된 육적 기질을 말한다. 쉽게 말한다면, 아담 이후로 사람들이 “육신으로”(귀, 눈, 입, 머리, 손재주… 몸의 지체들로) 죄악을 저지르는 도저히 떨쳐버리지 못하는 기본적인 성향을 가리킨다. 아담이나 하와의 경우 창세기 3:4∼6을, 노아시대 하나님의 아들들(셋 계열의 후손들)의 경우 창세기 6:2∼3을, 출애굽을 경험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경우 출애굽기 32:4을 참고하라. 사람이 지니고 있는 성품의 모든 측면이 다 그렇지만, 성경은 그 중에서도 사람의 지적인 기능에 대하여 가장 먼저 일깨워주고 있다. 바로 죄로 오염되었기 때문에 본래의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오히려 진리를 거짓으로 바꾸거나 둔갑시키는 오류를 범한다고 꼬집고 있다. 인간 스스로 지혜롭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은 진리와 거짓을 분별하는 것조차 제대로 감당하지 못한다고 폭로한다(로마서 1:21∼25, 디도서 1:15).
이런 이유 때문에 로마서는 신자를 향하여 권면하기를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끊임없이 변화를 받아 제일 먼저 nous([헬] the mind or intellect, 한글은 ‘마음’이라고 번역함)를, 즉 깨달아 아는 기능을 날마다 새롭게 하라고 강조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일깨워준다(로마서 12:1∼2).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며 성령을 따라 행하는 신자에게서 일어나는 변화에는 이렇게 깨달아 알게 되는 지적인 기능이 포함되어 있음을 알리고 있다. 죄로 오염되어 더러워진 것을 날마다 끊임없이 씻어 새롭게 하는 성결한 변화에는 분명하게 무엇(사물과 세계)을 파악하여 이해하게 되는 지적인 기능을 포함하고 있다(누가복음 24:45을 참고하라).
2. 믿음으로 깨달아 아는 지식(By faith we understand)이 온전할 수 있는 근거는?
믿음으로 깨달아 아는 지식은 일반적인 차원의 믿음이나 지식과는 차원이 다르다. 그 이유는 이렇다. 신자가 지적인 기능을 사용하더라도 죄로 오염되고 더러워져 손상된 기능을 성령님께서 친히 정결하게 하시고 온전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믿음을 통해서 깨달아 하는 지식을 추구할 뿐만 아니라, 성령께서 본래의 목적과 기능에 따라서 진리를 파악하며 깨달아 이해하게 하시기 때문이다. 바로 성령께서 죄로 망가진 우리의 지적인 기능을 온전하게 하여 깨닫게 하시는 지식이기 때문에 얼마나 확실하겠는가? 또한 누가 감히 그 지식의 참된 것을 문제 삼겠는가?
그렇다면 신자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깨달아 아는 그 지식에 대하여 얼마만큼 신뢰할 수 있는가? 모두 틀림이 없는 진리이다 혹은 확실한 진리라고 장담할 수 있는가? 이 질문에 대답하기 전에, 우선적으로 신자가 믿음으로 깨달아 아는 그 지식의 성격을 규정해야 한다. 신자가 믿음에 있어서나 받아 누리는 은혜에 있어서 그 과정은 항상 점진적이라는 사실이다. 즉 항상 자라나고 성숙하는 과정에 있다는 뜻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모든 부분들, 지적 부분을 포함해서 정서와 감정과 행실에 이르기까지 모든 부분을 죄의 더러움에서 씻어 정결케 하시며 죄로 오염되고 손상된 것들을 고쳐 온전하게 하시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것이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한평생에 걸쳐서 점차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어떤 신자라고 할지라도 그가 깨달아 아는 지식에 있어서 더욱 자라나고 성숙해야 할 부분이, 아직 모자라고 불완전한 모습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하여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우리가 지금은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하나 그 때에는 얼굴과 얼굴을 대하여 볼 것이요 지금은 내가 부분적으로 알지만, 그때에는 주께서 나를 아신 것같이 내가 온전히 알리라.”(고전 13:12)
결론적으로 일반적 세상 지식(worldly knowledge)과 믿음으로 깨달아 아는 지식(By faith we understand) 사이의 근본적인 차이점을 우리는 이렇게 요약할 수 있다. 일반적인 세상 지식은 죄로 오염된 사람의 이성에만 의존하기 때문에 왜곡이나 오류를 피하는 것이 원칙적으로 불가능한 반면에, 신자가 믿음으로 깨달아 아는 지식은 성령께서 죄로 훼손된 것들을 고쳐 온전케 하면서 동시에 깨닫고 헤아리게 하신다는 것이다. 바로 그 부분에 있어서만큼은 온전하여 세상의 어느 누구도 그 진리성을 문제 삼을 수 없다는 것이다.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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