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명? 사명?
글 : 김혜영 목사 (RN @Jaisohn Medical Center)
평범한 가정주부가 늦은 나이에 신학교를 간다고 하니 ‘왜?’ 라는 질문과 함께 ‘그래, 신학공부야 해보면 좋지’라는 반응이었다. 목사 안수를 받는다고 하니 ‘선교’를 가려고 하느냐고들 물었다. 우리는 어느 정도 고정된 프레임을 가지고 상황이나 사건을 보는 경향이 있다.
그리스도인이 되고 나면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이 내게 무엇을 하길 원하시는 지,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반복해서 질문하고 고민하게 된다. 우리는 이것을 소명, 사명이라고 말한다. 소명에 대해 우리가 오해하고 있는 것은 없을까? 사역자만 소명이 있고 일반 성도들은 소명이 없는 것일까?
중세시대에 기독교가 국교화 되면서 로마사회 안에서 기독교는 핵심적 위치에 서게 되었다. 교회 지도자들은 정치권력과 결탁하면서 돈과 권력을 소유하게 되었다. 이 중세시대가 1000년 정도 지속되었다. 이때 교회지도자들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위계적 구조를 가지고 있고 이것은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라고 가르쳤다. 현실 세상은 구조가 잘 잡혀있고 로마국가도 기독교 국가가 되었으니 미래에 주어질 천국에 관심을 가지라며 지금의 삶에 잘 복종하며 살아내면(현실의 불만족을 잘 참아내면) 내세에 복을 받으니 인내하라고, 내세의 삶을 누리려면 종교지도자들의 말을 들어야 한다고 가르쳤다. 이 때 나온 것이 성속이원론, 사제-평신도 이원론이다. 즉, 교회에 관련된 것만이 성스럽고, 하나님과 관련된 것, 종교적 행위에 관련된 것은 가치가 있고, 하나님이 부르신 사람들은 바로 이런 사람들이라고 가르쳤다. 중세시대에 ‘소명’이라고 하면 성직자가 되는 것이었다. 사제, 성직을 제외한 다른 일들은 모두 ‘소명’과 관계없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며, 소명은 종교적인 일을 하는 것이 되어버렸고 소명이라는 말은 특별한 말이 되었다.
중세시대 사제들은 자신들이 하나님의 대리인이라며 절대 복종을 요구했고, 성경을 독점 해석하는 권리를 가졌고, 고해성사를 하지 못하면 죄의 문제가 해결이 안 되어 천국 못 간다고 가르쳤고, 연옥과 면죄부를 만들어 자신들의 권력을 강화했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이런 수많은 것들이 잘못된 것임을 밝혀냈다. 종교개혁이후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 앞에서 부름 받은 존재들이라는 만인제사장 교리가 등장했다. 이것은 중세 카톨릭의 모든 것, 사제의 권위를 흔드는 것이었다. 카톨릭은 여전히 사제들과 일반성도들을 구별된 존재라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교회는 어떠한가? 교회 직분은 은사에 따른 차이지 신분의 차이가 아니다. 우리가 알게 모르게 느끼고 보게 되는 교회안의 계급적인 모습들, 목사나 장로가 위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중세의 가르침을 따르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계급이 있을까? 어떤 부르심은 특별하고 어떤 부르심은 하찮은 것일까?
마르틴 루터는 “수도사와 사제의 일이 아무리 거룩하고 힘들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보시기에는 들에서 시골사람들이 하는 노동이나 여성이 하는 집안일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 모든 일은 하나님 앞에서 믿음으로만 측량될 뿐이다. 사실 종이 집에서 하는 육체노동이 때로는 수도사나 사제가 하는 금식이나 다른 모든 일보다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더 합당한데 그것은 수도사나 사제에게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고 말했다. 이 말은 어떤 종류의 일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일을 어떤 자세로 하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말이다.
영어로 성서를 번역하고 화형당한 윌리엄 틴테일은 “우리의 소원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라면 물 긷는 일과 설거지, 구두 고치는 것과 말씀 전하는 일은 모두 하나다” 고 했다.
성직자이자 신학자였던 윌리암 퍼킨스는 “양치는 목자의 행위가 바르게 수행된다면, 선고를 내리는 판사의 행위나 법을 집행하는 행정관의 행위나 말씀을 전하는 목사의 행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 앞에서 선한 것이다”고 했다.
특별한 부르심은 없다.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다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았다. 특별한 소명은 없다. 교회 일, 교회와 관련된 일만이 소명일까?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소명은 다 같다. 주어진 역할과 은사가 다를 뿐이다. 소명의 삶이 큰 일, 위대한 일을 하는 것일까? 하나님이 보시기에 일의 크고 작음은 우리가 보는 것과는 다를 수 있다. 대형병원에서 여러 환자를 돌보는 일과 집에서 한 사람을 간호하는 것, 대형교회 일을 하는 것과 시골 작은 교회의 일을 하는 것. 우리가 보기엔 크고 작음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시기에도 그럴까? 하나님은 큰 일 뿐 아니라 한 사람을 위해서도 그의 사람을 보내신다.
소명 따라 산다는 것은 내가 하고 있는 일의 종류, 일의 크기와 아무 상관이 없다. 내게 주어진 상황들, 내가 감당해야 하는 일들, 그 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일들을 어떻게 감당하느냐가 더 중요하다. 요셉은 의도적으로 꿈을 꾸지 않았다. 이집트 총리가 되겠다고 의도하지도 않았다. 요셉은 항상 어떻게를 생각한 사람이었다. 무엇을 작정하고 의도한 것이 아니라 억울하고 이해되지 않는 일상 일지라도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성실함과 신실함으로 살아낸 것 뿐 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주신 소명을 깨달은 것은 훗날이다. 요셉과 같은 태도로 살 때, 하나님은 나를 필요한 곳에 두시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실 것이다. 하나님을 위해 크고 위대한 일을 해야겠다고 하기 전에, 오늘 내게 주어진 자리에서 성실함과 신실함으로 살아낸다면, 나는 하나님의 소명을 감당하는 사람이다.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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