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6 -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 (Shall We Defend The Bible?)
글 :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6-1장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 이 짧은 연속 강연의 지난 몇 이야기들에서 여러분에게 성경의 영감(靈感)(the inspiration of the Bible)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과 그렇게 때문에 그것은 사건에 관한 내용들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고 그것이 명령들을 발할 때는 완전히 권위적이라는 것을 말하고 있었다. 확실히 그것은 말해야 할 큰 문제이다. 확실히 그것은 내가 많은 사람들이 단지 히브리인 종교 문헌의 묶음으로 간주하는 한 책을 위해 주장해야 할 큰 주장이다.
그 주장이 정당한가, 성경이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질문이 일어난다(The question arises whether the claim is justified, whether the Bible is really and truly the Word of God). 나는 그러한 질문을 제기하는 사람들과 많은 동감(同感)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피하여야 할 질문이라고 생각지 않는다. 만약 여러분이 내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Westminster Seminary)에서 지도하려고 하는 수업들에 참석한다면, 나는 여러분이 내가 그 질문을 피한다고 나를 비난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나는 우리가 성경의 영감을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을 어떻게 대할 수 있는가를 보여주기 위하여 최선을 다해 - 오직 나는 나의 최선이 좀 더 낫기를 바란다. - 노력한다. 만약 우리가 그들은 우리가 믿는 것을 이미 믿고 있다고 가정해 버린다면, 우리는 그들을 아주 많이 도울 수는 없다. 도리어, 우리는 그들의 현재의 위치를 이해하고 그 다음에 그들을 논리적으로 한 가지 사실로부터 다른 한 가지 사실로 인도하여 마침내 우리가 그들에게 성경은, 우리가 그렇게 믿는 바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만 한다.
내가 그것을 말할 때, 나는 성경의 영감을 믿게 되는 모든 사람이 그러한 논리적(論理的, logical)인 단계들을 연속적으로 통과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수많은 경우에서 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확신은 아주 더 직접적인 방식으로 온다. 어떤 사람이 복음에 대하여 참된 설교자의 말을 듣는다. 그 설교자는 강대상 위에 펴 있는 한 책의 권위에 대해 말한다. 그 책의 말씀들이 설명될 때, 그것을 듣는 그 사람은 자기의 마음의 비밀들이 드러나는 것을 발견한다. 그것은 마치 가면이 벗어지는 것과 같다. 그 사람은 하나님께서 그를 보시는 것과 같이 갑자기 자신을 본다(He suddenly comes to sees himself as God sees him). 그는 자신이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와 저주 아래 있는 죄인이라는 것을 갑자기 알게 된다. 그 다음에 동일한 그 이상한 책으로부터 놀라운 용서가 제공된다. 그것은 이상한 주권적인 권위로 온다. 그 설교자는 그가 그 책을 설명할 때, 만왕의 왕의 대사(大使)와 같이, 살아계신 하나님의 사자(使者)와 같이 보인다. 듣는 그 사람은 더 이상의 숙고, 더 이상의 논증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의 문을 여셨다. 그는 “그 책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나를 찾아내셨다. 나는 그의 음성을 들었다. 나는 영원히 그의 것이다.”고 말한다.
그렇다 어떤 사람이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신하게 되는 것은 때때로, 힘든 논증으로가 아니고 이런 식으로이다. 하지만 그것은 논증(論證)이 불필요하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가 예를 들어 말한 사람도 그가 새롭게 발견한 그 확신에 대한 비평을 만날지도 모른다. 사람들은 그에게, 그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그 책은 실은 오류들과 불합리한 요소들로 가득하다고 말할지도 모른다.
그가 어떻게 그러한 비평에 대처할 것인가? 그것은 때와 형편에 달렸다. 그는 그의 지적인 재능 때문에 그 비평에 단호히 대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그것의 근거에 근거하여 그 비평에 대처하고 실상은 성경이 오류들과 불합리한 요소들로 가득하지 ‘않다’라는 것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혹 그는 요한복음 9장에 나오는 사람이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되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소경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라고 말하는 것 외에 그가 새롭게 발견한 그 확신의 비평자들에게 무엇을 더 말할 수 없는 단순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가 예로 든 그 사람에게 가능한 일이 무엇이든지 간에, 만약 확신들을 가진 자들이, 원리상, 반론들을 계속 무시한다면 그들이 가지고 있는 확신들은 단지 불확실한 보유(保有)에 불과하다는 것은 여러분이 기독교계 전체를 볼 때, 아주 분명하다. 결국, 진리는 본질적으로 하나이다. 나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중심으로 확신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나의 이웃이 그것이 참으로 오류가 가득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각(이유)들을 인용한다면, 그러한 생각들에 무관심할 수 없다. 나는 참으로 그에게 “상신의 생각들은 그릇되다. 그리고 그것들이 그릇되기 때문에 나는 바른 양심을 가지고 나는 확신들을 고수할 수 있다.”라고 말할 수 있다. 혹은 “당신이 말하는 바는 그 자체에 있어서는 충분히 타당하다. 그러나 그것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인가 하는 질문에는 적합하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내가 다음과 같이 그에게 말할 수 있을지 모른다. : “당신의 생각들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나의 확신과 반대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것들에 관심이 없다. 만약 당신이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면 그것들을 계속 고수(固守)하라. 그러나 또한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생각하는 점에 있어서도 나와 의견을 같이 해 달라.”
참으로, 나는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이러한 마지막의 태도는 참으로 아주 모순이 된다. 두 개의 모순되는 것들이 모두 사실일 수는 없다. 우리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계속 고수하면서 동시에 우리의 그러한 확신에 반대되는 생각들의 진리성(眞理性)을 인정할 수 없다. 다른 말로 하면, 나는 기독교 변증학(Christian Apologetics)의 필요성, 즉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理性的)인 변호의 필요성과 특히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기독교적 확신에 대한 이성적인 변호의 필요성을 진심으로 믿고 있다.
몇 년 전 나는 어떤 기독교학생 수련회에 참석했다. 그리스도인의 증거의 여러 가지 방식들이 토론되고 있었다. 특히 기독교 신앙에 대한 이성적인 변호를 하는 것이 필요한가 하는 문제가 토론되고 있었다. 토론의 과정에서 학생 활동에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던 한 신사가 일어나서 자기 경험에 의하면 여러분이 그에게 논증하는 것을 중단하기까지는 한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결코 인도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그런데, 나의 친구들이여,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내가 조금도 감동되지 않았다는 것을 아는가?
물론 사람이 ‘단지’논증(論證)에 의해서 결코 그리스도께로 인도되지는 않는다. 그것은 아주 분명하다. 새로운 출생(중생)에는 하나님의 영의 신비스러운 역사(役事)가 있어야만 한다. 그것이 없다면, 우리의 모든 논증들은 아주 쓸데없을 것이다. 그러나 논증이 불충분한 것이기 때문에 불필요하지는 않다. 성령께서 새로운 출생에서 하시는 일은 사람을 증거에 관심이 없는 그리스도인을 만드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그의 눈에서 안개를 제거하고 그로 하여금 증거에 주의를 기울일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그와 같이 나는 성경의 영감에 대한 이성적인 변호의 가치를 믿는다. 때때로 그것은 사람을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데 직접적으로 유익하다. 그것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그러한 목적을 위해 은혜롭게 사용된다. 그러나 그것의 주된 사용은 좀 다른 종류에 속한다. 그것의 주된 사용은 기독교인들로 하여금, 기독교의 격렬한 반대자들의 질문이 아닌, 진리를 찾고 있고 여러 방면에서 들려오는 적대적인 음성들로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의 정당한 질문들을 대답할 수 있도록 하는 데 있다.
때때로 내가 성경의 진리를 변호(辯護)하는 강연, 예를 들면 그리스도께서 참으로 사흘 만에 부활하셨다는 것을 보여주는 생각들을 인용한 강연을 했을 때, 어떤 사람이 그 강연이 끝난 후 내게 다가와서 다음과 같은 요지로 매우 친절하게 말했다. : “우리는 당신의 강연을 아주 잘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여기에 없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여기 있는 우리는 모두 그리스도인입니다. 우리는 모두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이미 확신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사실 당신이 말하는 바를 들을 필요가 있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사람들이 내게 그것을 말했을 때, 나는 너무 많이 낙심치는 않았다. 나와 의견을 달리하는 사람들이 나의 이야기를 들을 기회를 갖게 되기를 내가 바라는 것은 사실이다. 스스로 아주 넓은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는 사람들이 그 반대자들에 의해 ‘근본주의’(Fundamentalism)라고 불리 우는 사상에 대해, 이러한 소위 ‘근본주의자들’, 이러한 보수주의자들, 이러한 그리스도인들 자신이 쓴 진지한 책들에서 발표한 바는 읽지 않고 또는 그들이 강연할 때 말하는 바는 듣지 않고, 신문의 보잘 것 없는 기사들(clippings)로부터 혹은 대적자들이 신문기사에 근거하여 쓴 ‘근본주의’에 대한 설명들로부터 그들의 자료를 취한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것 같다.
그러나 비록 내가 이러한 논쟁에 있어서 나의 반대자들이 보다 공정(公正)한 발언의 기회를 나에게 주기를 바라기는 하지만 나는 그들이 나의 강연에 참석치 않을 때 그렇게 크게 낙심하지는 않는다. 사실 내가 그러한 강연에서 하려고 애쓰고 있는 것은, 성경을 반대하는 사람들을 직접 구원하려는 것이 아니고, 참석한 그리스도인 부모들에게 혹은 주일학교 교사들에게 그들이 기독교에 등을 돌리려고 있는 자들과 함께함이 아니고 그들 자신의 가정에나 그들의 주일학교 반(班)에 있는 아이들, 그들을 사랑하고 그들이 그리스도인인 것과 같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원하지만 여러 방면에서 들려오는 기독교에 반대되는 목소리들에 의해 고통을 당하고 있는 그 아이들과 함께 사용할 수 있는 자료들을 제공하는 것이다.
그렇다. 나는 확실히 기독교 변증학의 가치를 믿는다(Yes, I certainly do believe in Christian apologetics.).
나는 확실히 성경의 진리에 대한 이성적인 변호의 필요성을 믿는다(I certainly do believe in the necessity of the reasoned defence of the truth of the Bible.).
나는, 나의 아주 제한된 능력의 최선을 다하여, 내 스스로 그 일에 관계하는 것이 나의 임무라고 느꼈다. 그러나 참으로 중요한 것은 나보다 훨씬 더 능력 있는 많은 사람들이 이 중대한 일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확실히 이 일을 소홀히 함은 수많은 귀한 영혼들의 상실(the loss of countless precious souls)일 것이다. - 후반부로 계속 -
[편집자 주 : 2022년 4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1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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