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원태 목사의 러브레터 ① 모세 형에게
글 : 조원태 목사 (뉴욕우리교회)
호칭을 망설였어요. 결국 형으로~ 경망스러울까 조바심이 있었지만, 사람들은 존칭 없이 마구 부르는데 그것보다 낫진 않을까요? 이렇게 부르려는 것은 형이나 저나 하나님의 아들, 결국 형제인데 형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싶었어요. 또 하나 이유는, 모세 형에게 익숙한 틀을 깨고 더 깊은 대화를 나누고 싶었거든요. 3500년 전 형에게 펜을 잡은 제 심정은 설렘 이네요.
제가 사는 시대는 끔찍한 팬데믹으로 비대면이 일상이 되었어요. 모세 형도 고라 무리 반역으로 전염병이 돌아 14,700명의 사망자가 속출했던 팬데믹 경험이 있었지요(민 16장). 바로 곁에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그때 광야에서 치료책도 없었을텐데 어땠을까요? 제가 섬기는 교회는 팬데믹 한복판에서 “러브레터” 슬로건으로 소통의 선물을 나누고 있어요.
교회에 우체국을 신설하고, 우체국장을 임명했고, 우체통을 만들었어요. 한해 동안 1,000 통이 넘는 성도들의 편지가 교회 우체통을 통과해 배달되었지요. 편지의 육중한 진심이 만들어낸 기적을 체험했지요. 진 웹스터의 소설, [키다리 아저씨]도 주인공 주디가 얼굴 모르는 후원자에게 보낸 편지 모음집이었지요. 복음의 실크로드가 되어 준 것도 바울의 편지들이잖아요.
전자우편인 이메일이 대세였다가 더욱 간편한 소통도구들이 들어서며 진심을 나눌 편지는 찬밥신세가 되어가요. 본회퍼의 옥중서신을 비롯해 70년대 한국 민주화 과정에서 옥중서신은 바깥세상에 살아있는 교과서가 되었지요. 팬데믹으로 꽉 막혀 있는 때, 모세 형에게 첫 편지 쓰며, 물론 답장이 어렵겠지만 함께 읽는 이들과 함께 더 옹골찬 삶과 신앙을 기대할게요.
모세 형에게 몇 번이나 편지를 쓰게 될까요? 이어서 성서의 고마운 분들에게 얼마나 더 편지 쓰게 될 지 오리무중이예요. 이 편지를 쓰며 모세 형의 삶을 읽으며 기도가 깊어져요. 그런데 궁금한 것은 형의 40세 때 일이예요. 이집트 제국의 왕자였던 형이 이집트 사람을 죽여 모래 속에 암매장을 하셨지요. 히브리 동족이 억울하게 매맞는 모습을 보고 의분이 일어났었지요.
저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었고, 그 행동은 마치 미성숙한 모습처럼 받아들여왔지요. 광야 40년 훈련기간을 정당화하는 촉매역할처럼~ 그런데 형에게 감정이입을 해 봤어요. 생후 3 개월만에 갈대상자에 담겨 버려질 수 밖에 없던 유아시절을 나중에 형이 알았을 때, 어떤 마음이었을까요? 성서가 침묵하고 있는 형의 마음이 40세 때 사건에 영향을 줬던 것은 아닐 까요?
강자의 횡포에 방어기제 없이 당해야만 하는 모습을 감내하기에는 너무 깊게 패인 생채기가 형의 삶에 자국으로 남아 있지 않았을까 생각해요. 저도 어린시절 일종의 버림받은 경험이 있지요. 고아원에서 살았던 시절, 사회의 편견에 버려지고, 고아원 내부에서 버려졌던 경험이 어른이 된 내게도 긍정이건 부정이건 영향을 주고 있지 않을까 가끔 성찰하게 되거든요.
형이 이집트 사람을 암매장했던 다음 날, 도와준 동족에게 배신을 당했지요. 동족의 배신으로 탄로난 형은 그후로 무려 40년이나 도망자의 삶을 살게 되고요. 생후 3개월만에 버림 받은 아픔, 40세 때 동족에게 배신당한 쓰라림이 각각 40년마다 형을 단련하고 사고를 깊게 했을 것이라 생각해요. 시 30:11, “주께서 나의 슬픔이 변하여 내게 춤이 되게 하시며”
맞아요. 형의 삶은 슬픔을 춤이 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이 느껴져요. 제 생각을 뛰어넘어 가늠조차 되지 않는 하나님의 섭리가 켜켜이 스며 있는 형의 삶을 흠모하게 되지요. 자유와 해방을 위해 제국의 왕 앞에 당당히 선 형의 모습, 민족의 비전을 제시하며 광야 한복판에서 꺾이지 않은 희망으로 40년을 진군하는 형의 모습이 모두 신기할 따름이지요.
그런데 제게 개인적으로 형에게 가장 인상적인 2장면이 기억나요. 먼저는 형의 마지막 모습인데, 신 34:5~6, “여호와의 종 모세가 여호와의 말씀대로 모압 땅에서 죽어 벳브올 맞은 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고 오늘 까지 그의 묻힌 곳을 아는 자가 없는지라” 그렇게 찬란한 삶을 살아냈고, 수 없는 업적을 이루었는데 형의 무덤은 당당히 잊혀졌어요.
제가 사는 시대에 보기 드문 모습이예요. 낡아 없어지기보다 닳아 없어질지라도 그림자처럼 사라지며 오직 하나님이 하신 일만 올곧게 드러내는 삶을 저도 살고 싶거든요. 이 이야기는 기회가 되면 나중에 하기로 하고요. 제가 가장 인상깊은 형의 모습은 시내산 아래서 보여 준 감동적인 기도예요. 열 개의 법을 받기 위해 시내산에 오르셨었지요.
백성들은 형이 더디 내려옴으로 우상을 만들어 부패했지요. 하나님은 진노하셔서 그들을 진멸하려 할 때에 형이 기도하셨지요. 출 32:32,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백성 위한 용서 때문에 형의 이름을 생명책에서 지울 각오를 하셨더군요. 저는 탄성을 낼 수 밖에 없었어요.
이런 사랑은 바울도 고백하네요.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자신이 저주를 받더라도 누군가를 살리려고 주저 없이 기도하지요. 역시 다윗도 빼놓을 수 없지요. 대상 21:17,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의 손으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을 치시고 주의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지 마옵소서”
예수님은 그 사랑의 원조시죠. “… was crucified, dead, and buried. He descended into hell …” 사도들의 신앙고백문의 영문에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지옥에 내려가셨어요. 대신 죽고, 대신 지옥에 내려갈지라도 우리를 살리시려는 대속의 사랑은 우리 패밀리만이 갖는 특급 가풍이예요. 이것을 모세 형의 삶에서 보았거든요. 그런 사랑을 보여 주셔서 고마워요.
오늘은 여기까지 쓰고 다음에 또 찾아뵐께요. 하나님의 영원한 나라에서 그 사랑의 기도로 저희들 중보해 주세요.
뉴욕우리교회 십자가 아래에서
하나님의 가족인 아우 조원태 드림
[편집자 주 : 2021년 1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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