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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율법은 하나님을 알려준다

복음뉴스 0 2022.04.10 16:38

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⑤  율법은 하나님을 알려준다 - 요한복음 1장 17절 중심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I. 우리를 향한 첫째 돌판의 의도

 

우리가 율법이 우리에게 어떤 일을 해주고, 어떤 말을 해주며, 또 우리를 어떤 위치로 인도해 주는지 분명히 알지 못하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얻을 수 있는 은혜와 진리를 결코 알 수 없다. 그래서 지난 호에 율법의 역할을 말하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보다 먼저 전능하신 하나님과 대면하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준다고 했다. 율법은 우리를 자기 주관적인 관심에서 끌어내어, 하나님과 우리 관계에서 생각하게 한다. 무엇보다 율법은 하나님의 성품에 대해 알려준다. 율법의 두 돌판은 첫째 하나님에 대해 거룩하시고 공평하시고 의로우신 분이라고 말한다. 둘째는 죄와 허물을 반드시 벌하시는 분이라고 말씀한다. 왜냐하면 이렇게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을 향해 큰 목적을 가지고 계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자기가 바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만을 예배해야 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그분의 이름을 망령되이 헛되게 부르지 않아야 한다. 이 첫째 둘판은 우리가 오직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살아야 할 것을 말씀한다. 이렇게 율법의 첫째 판을 바로 이해해야,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무슨 일을 해주셨는지를 알게 된다. 곧 첫째 돌판을 알아야,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온 은혜와 진리를 파악할 수 있다.

 

II. 우리에게 주신 두 번째 돌판

 

1. 첫째 돌판과 둘째 돌판의 관계

 

둘째 돌판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인간관계를 요구하시는가 하는 말씀이다. 먼저 이것은 첫째 돌판으로부터 나오는 측면들이다. 둘째 둘판은 첫째 돌판이 말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신 주인이시기에, 우리의 대인관계가 이뤄지는 것이며, 그 관계가 중요한 것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내가 하나님을 어떻게 대하느냐에 따라 다른 사람을 어떻게 대하느냐가 결정된다. 우리가 다른 사람을 대할 때, 단순한 인간으로만 보면 되는가? 아니다. 나처럼 하나님 아래에 있는 존재로 보아야한다. 처음부터 끝까지 그런 태도로 보아야 한다. 이것이 둘째 돌판인 율법의 요구로서 제 오계명부터 십계명까지이다.

 

1) 그러면 우리가 왜 이것을 지켜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 하라”라는 맥락에서 이 계명을 주셨다(레11장 45절) 곧 우리가 거룩하신 하나님의 백성이니, 거룩하게 살라는 것이다. 이것은 거룩함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 거룩하게 사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수도자들의 삶이나 불교와 힌두교를 비롯한 여러 종교에 있는 성인들의 삶에 있는 위험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들이 추구하는 것처럼 영혼을 수양하거나 도를 닦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목적은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께 합당한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둘째 돌판의 율법은 지금도 우리에게 적용되고, 여전히 유효하다.

 

2) 이방인들도 이 율법을 지켜야 하는가? 오늘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거룩할 것을 요구하신다. 거룩이란 용어를 구약의 구체적인 삶에서 말할 때에 구별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레위기), 그런 의미에서 거룩 곧 구별은 비 그리스도인에게까지도 그렇다. 왜냐? 이 구별은 이스라엘에게만 내린 명령이 아니라, 만물의 조물주요, 만물의 통치자로서 모든 사람에게 내린 명령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들은 모세를 통해 그 민족에게만 이 율법을 주셨다고 이해한다. 과연 하나님께서 제일 처음으로 시내산에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고, 모세를 통해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시며, 처음으로 돌째 돌판의 내용을 주셨는가? 아니다. 이것은 매우 그릇된 생각이다.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이미 율법을 주셨다. 인간을 창조하실 때 이미 그 본성과 체질의 일부가 되게 하셨다. 시내산에서 율법을 주신 것은 자신의 백성에 게 그 사실을 상기시키고, 명확히 알려주신 사건에 불과하다.

그래서 바울 사도가 로마서 2장에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설명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자손에게만이 아니다. “무릇 율법 없이 범죄하는 자는 또한 율법 없이 망하고 무릇 율법이 있고 범죄한 자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심판을 받으리라...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로마서 2장 12-15절)

 

2) 그렇다면 이방인이게 율법이 있는가? 이방인에게도 율법이 있다. 유대인처럼 시내산에서 모세를 통해 분명하게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 마음에 똑같은 율법이 쓰여 있다. 그것이 바로 양심이라고 로마서는 말씀한다.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을 악하게 만들 었을까? 아니다. 의롭게 만드셨다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인간 속에 의를 심어주셨다. 모든 인간에게 그 흔적과 잔재가 있다. 모든 인간의 마음 속에는 마땅히 지켜야 할 하나님의 율법이 쓰여 있는데 그것이 바로 양심이다.

 

3) 그러면 하나님께서 시내산에서 이런 율법을 주신 것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이것은 자기 백성에게 이 사실을 상기시키신 사건이다. 율법은 누구에게나 이미 있다. 그 러나 죄와 악을 범하고, 하나님을 등진 탓에 그 사실을 잊고 무심해진 것일 뿐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십계명을 주시면서, “내 율법을 상기 시켜주마! 이미 너희 마음 속에 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치 않기에, 너희 앞에 분명하게 제시해준다!”라고 하셨다! 하나님은 우리 감각으로 표현한다면 재미있으신 분이다. 왜 그런가? 이런 것에 대하여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아예 서명까지 해서 안겨주신 것이다.

 

4) 이런 사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는가? 그러므로 태초에도 율법을 지켜야 했고, 모세시대도 지켜야 했고, 지금도 그렇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 시대 사람들은 갖은 핑계를 대며 율법을 회피하려 든다. 이 시대의 생각은 규율 같은 것은 믿지 않는다고 하며, 마치 사사시대의 사람들처럼 저마다 자기 좋을대로, 자기가 옳다 생각하는대로 행동하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 본성과 체질에 새겨진 근본적인 율법을 거스리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이 것은 모든 사람들의 양심에도 새겨져 있다. 그러므로 이런 계명들을 부인하는 것은 곧 양심을 부인하는 것이다. 사람이라면 모두 스스로 이것을 안다. 그런데도 어떻게 하든지 심리학을 동원하여 양심을 누르려고 하지만, 그렇게 될까? 아니다. 바울 사도는 말한다; “율법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 사람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되나니,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보갈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롬 2:14-15).

 

5) 율법의 둘째 판의 요약이 지향하는 것은 무엇인가?

예수께서 [네 이웃을 네 자신같이 사랑하라] 고 요약하신다(마22:39.)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의 가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것은 첫째로 우리가 모든 것을 바쳐 하나님을 영화롭게 해야할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이다. 둘째로 우리가 이웃을 자기 자신같이 사랑해야 할 존재임을 모르는 것 때문이다. 그래서 율법의 두 돌판은 우리에게 “너희가 실패했단다!”하는 것을 알려준다. 물론 우리가 지금까지 착하고 선하고 친절하게 존경 받으며 사랑 받았을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왔는가?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주 하나님을 사랑하여 왔는가? 이웃을 자신같이 사랑하고 있는가? 우리가 율법 앞에 설 때에야, 비로소 우리 자신의 죄와 실패를 보고서, “그래! 은혜가 절대 필요하구나!”하고 느끼면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가 무슨 일을 해주었는지 알게 된다!

 

2.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셔서 율법의 분명한 역할을 다하게 하셨다

 

1> 첫째 우리의 무서운 죄성을 인정하고 승복하며 죄를 절감하게 하고자 주신 것이다!

 

1) 우리가 죄와 죄성을 인정하고 승복하는 가?

이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언제든 변명할 준비가 되어 있는 변명과 거짓의 선수들이다. 합리화의 선수이다! 어떻게든 변명을 하고 핑계를 대서 빠져 나가려 한다. 이것은 아주 명백한 사실이다. 바울 사도가 말하듯이, 우리는 항상 남을 비난하고 판단한다(롬2:1-3). 똑같은 짓도 남이 하면 정죄하고, 자기가 하면 상황이 다르다며 빠져나간다. 흔히 말하듯, ‘내가 바람피우면 로맨스고, 다른 사람 전부가 바람피우면, 불륜이라’고 생각한다. 다윗의 경우를 보자. 다윗이 밧세바 일로 심각한 죄를 지었다. 하나님은 나단 선지자를 보내 그를 다루셨다. 선지자는 매우 현명하게 다윗의 죄를 곧장 지적하는 대신, 한 비유를 들었다. “이것은 왕의 나라에서 일어난 일이죠. 어떤 자가 자기 이웃에게... 하면서 시작한다. 다윗은 어떤 부자가 이웃의 하나밖에 없는 양을 빼앗았다는 선지자의 말에 분개했다. 벌떡 일어나 그 악독한 죄를 혹독히 처벌할 것을 명령했다. 그러자 나단이 다윗을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당신이 그 사람이라!“ 다윗은 단지 양 한 마리를 훔친 정도가 아니라, 남의 아내를 훔쳤고, 남편을 살해했다. 그러면서도 남의 죄는 보고, 자기 죄는 보지 못했다. 모든 사람의 문제가 여기 있다. 우리가 자기 스스로의 죄성을 깨닫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가 얼머나 큰지 모르는 것이다. 자기 죄성의 심각성을 깊이 깨달은 사람만 하나님 은혜를 감격스럽게 기뻐하고 찬양하며 살 수 있다.

 

2) 세상은 이 어둠에 대해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자기 죄성을 보지 못하는가? 그것은 형식적이고 피상적인 교인으로 남을 뿐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리스도인답게 살지 못하는 원인이다.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물론 지성이 있는 사람이면, 자기의 어둠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 조금만이라도 철학 서적을 읽어본 사람이라면, 인간의 본성과 세상의 삶 속에 있는 어둠에 대해 알고 있다. 도덕과 윤리에 대한 서적을 읽어본 사람은 그 어둠에 대해 안다. 심리학도 이 어둠에 대해 어느 정도 알려준다.  인간의 본성과 정신, 그리고 내면의 본질적인 영역을 분석하고 조사해서 그 속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더럽고 추한 것들을 찾아낸다. 심지어 프로이드의 심리학도 어느 정도 그 역할을 하고 있다. 인간본성이 얼마나 형편없는지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그 정도만 아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우리는 여전히 자기를 방어하려 들며, 대개 자기 이야기보다 남 이야기를 하려한다. 이런 점에서 자기 자신을 가장 모르는 사람들이 바로 심리학자들이다. 심리학자들은 다른 사람들을 그렇게 잘 파악하면서 정작 자신은 평가하지 못한다. 어떤 심리 학자가 그리스도인들은 불면증이나 신경쇠약에 걸리지 않는다고 발표했다. 그런데 막상 그 심리학자 자신이 불면증과 신경쇠약으로 고생 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심리학과 철학은 어느 정도의 도움만 줄 뿐, 충분한 도움을 주지 못한 다. 그러나 우리의 방어기제를 뚫고 들어오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곧 하나님의 율법 뿐이다! 율법은 모든 것을 드러내 보여주는 신성한 엑스레이와도 같다.

 

3) 그렇다면 율법은 어떻게 우리의 방어기제(self-defense)를 뚫고 들어올까?

바리새인이며 율법 전문가였던 바울 사도가 이 일에 대해 말씀을 많이 한다. 그는 율법에 대해서는 목적과 근본부터 매우 잘 알고 있는 사도였다. 율법의 가치는 죄를 규정하는데 있다. 죄는 반드시 규정되어야 한다! 모든 법이 일정 정도 수행하는 역할도 죄를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는 법이 필요하다. 예를 들어 우리 이웃집 아파트에서 소리를 너무 크게 낸다면 그것을 막을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어느 곳이나 소음 기준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또 운전하거나 길을 갈 때, 누구에게 우선통행권이 있는가? 사람마다 자신에게 있다고 주장할 수 있다. 그래서 그렇게 하지 못하도록 분명히 정해져 있다. 이런 것들은 개인 각자에게 맡길 수 없다. 왜 그럴까? 사람들은 악하고, 자기 주장만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교통 법률이 개입해서 규정해 주어야 한다! 바울 사도는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롬3;20)라고 했다. 율 법은 아무도 구원하지 못한다. 왜? 율법은 구원을 위해 주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4) 율법의 목적과 하는 일이 무엇인가? 죄를 규정하는데 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는 것이다.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법도 없느니라.(롬4:15) 근거가 되는 법이 없으면 아무도 기소할 수 없다. 예를 들어, 누군가 법정에 기소할 때, 반드시 ‘ 이 사람은 무슨 법의 몇 조, 몇 항을 위반하였으므로...‘ 라고 밝혀야 한다. 사람들은 양심이 있어서, 대부분 자기가 잘못했다는 것을 대부분 인정한다. 바람직하지 못하게 살았다는 부분들과 잘못된 부분이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확하게 짚어서 말하면? 매우 싫어한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반발한다. 그런데 율법이 바로 그런 역할을 한다. 구체적으로 죄를 지적해준다. 율법은 단순히 ‘착하게 살아야 한다. 하나 님과 사람을 사랑해야 한다’ 말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의 실상을 알기 때문에  “남의 것을 훔치면 안된다, 널 귀찮게 했다고 네 맘대로 처벌하거나 상해하면 안된다‘라고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다. 율법은 일반적으로 말씀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말씀한다. 왜 그럴까? 죄는 감정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율법은 우리를 붙잡아 구체적인 문제에 직면시킨다. 우리를 찾아와 ‘너에게 질문한 것이 많다!’라고 말한다. 그래서 이것 저것을 질문한다. 그 시간에 정확하게 어디에서 무엇을 하고 있었느냐? 라고 묻는 경찰과 같다. 율법이 우리의 방어기제를 뚫고 들어오는 첫 번째 방법이 바로 이것이다. 곧 죄를 규정함으로 승복시키는 것이다.

 

2> 둘째 죄와 관련된 우리의 욕망 전부를 들 춰내기 위해 주셨다

 

1) 율법은 우리의 동기를 드러낸다.

이것이 율법의 무서운 점이다. 바울은 이것을 ‘정욕, 탐심, 욕망’이란 단어를 사용해서 말한다. “그런즉 우리가 무슨 말을 하리요?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롬7:7). 이것이 율법의 가장 큰 역할 중 하나이다! 누가복음에 바리새인이 기도한다: ‘하나님이! 나는 다른 사람들, 곧.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눅18:11,12).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는 자기가 문제가 없다는 것이다. 어떤 잘못도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잠깐!”하고 제동을 걸면서 “탐 내지 말라”고 하신 법조문을 밝혀준다. 이 진리를 서명하신 분은 복되신 주님이시다. 주님은 항상 이 점을 지적하심으로 바리새인들을 승복시켰다. 그래서 드러내어 죄를 구체적으로 밝힘에 대해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과 다른 이들이 공모해서 주님을 반대한 것이며, 결국 십자가에 못박아 버린 것이다.

 

2) 주님은 율법을 통해 탐심의 죄를 드러내셨다.

“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하지 말라 누구 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 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혀 가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5:21,22) 그 다음에 무슨 말씀을 하시는가? “간음하지 말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음욕을 품고 여자를 보는 자마다 마음에 이미 간음하였느니라”(27, 28). 주님 말씀의 내용은 무엇인가? “너희는 율법을 오해 하고 있다. 율법이 행동만 다루는 줄 알고, 그에 못지 않게 생각과 욕망과 열망도 다룬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구나! 행동으로 옮기지 않았더라도, 이런 생각이나 마음을 품은 적이 있다면 죄를 지은 것이다.“ 이렇게 율법은 탐심의 문제를 들춰낸다.

 

3) 바울 사도 자신도 탐심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발견했다.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으니 곧 율법이 탐내지 말라 하지 아니 하였더라면 내가 탐심을 알지 못하였으리라. 그러나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온갖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율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라”(롬7:7,8) 탐내는 것은 훔치는 것 못지 않게 저주받을 죄이다. 악한 욕망은 악한 행동 못지않게 나쁜 것이다. 교회를 다니면서도 탐심 가득한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실을 자기가 깊게 느끼는 사람은 율법을 아는 사람 밖에 없다. 이것을 모르니까 다른 사람 물건을 탐하고 교회의 사소한 물건을 탐하여 취해도 죄의식이 별로 없다. 물론 이 땅의 법이나 일반적인 도덕이나 윤리는 그렇게 판단하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은 다르다.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 서 있다.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마음의 의도를 아신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하나님 말씀은 살아 있고 활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판단하나니”(히4:12)라고 말씀한다.

 

4) 하나님께서 이것을 밝히 드러내셔서 승복하게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 생각과 욕망에 관심을 가지시고 꿰뚫어 보신다. 죄의 행동 뿐 아니라, 탐심이란 마음을 분명히 보고 계신다. 돌판 끝 부분도 탐심에 관한 말씀을 한다! 예를 들어 “이웃의 아내를 탐내지 말라!”라는 말씀은 이웃의 소유를 취하는 것은 물론, 탐내는 마음 마저도 이웃을 올바로 사랑하지 않는 것임을 밝힌다. 율법은 이 점을 똑똑히 보여주며, 우리의 죄성, 욕망과 탐심, 정욕과 욕심, 욕정을 인정하고 승복하게 만드는 것이다.

이것을 이해했던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라! “주께서는  중심이  진실함을  원하시오니(시 51:6)”그는 자신의 무서운 범죄에 대해, 단지 간음과 살인만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진정한  문제는 그런 욕망을 품었다는 것이며, 그 자신의 속이 그 정도로 부패했다는 것을 고백한다.  그래서 다윗의 기도는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51:10)라고 고백한다. 단순히 바른 행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새 마음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죄를 미워 하는 마음을 갖고 싶다는 것이다.  다윗은 하 나님께서 무엇보다 중심의 진실함을 원하신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내가 나의 마음에 죄악을 품었더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66:18)라고 했다.

우리가 겉으로 아무리 훌륭하고 도덕적 삶을 살아도 마음에 죄를 품으면, 듣지 않으신다! 마음으로도 죄악을 쳐다보지 말아야 하고 어루만지지 말아야 한다. 욕심을 깨끗이 버려야 한다. 오직 율법만이 이렇게 우리를 정죄하며 실상을 보여준다. 그래서 현대인들이 미친 듯이 이 법을 없애려 한다.

 

3>  셋째로 죄의 심히 죄됨을 들춰내기 위해 주셨다

 

1) 죄를 더욱 죄로 드러나게 하신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 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위장막을 치우고, 베일을 걷어 울려 죄를 폭로하기 위하여, 율법이 존재한다. 사람이 회심하기 전에는 율법 때문에 선해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악해졌다. 하나님의 율법 자체가 우리 속에 있는 정욕을 자극하고 복돋우며 일깨운다(7:8-11) 그래서 바울은 이렇게 결론을 맺는다.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7:12,13) 율법에는 아무 잘못이 없다. 그런데 왜 나는 더 악해졌는가?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7:13). 죄를 지은 인간은 하지 말라는 말을 들을수록, 오히려 더 하고 싶어하는 부패한 상태에 빠져 있다. 실제로 그렇지 않은가?

 

2) 왜 율법을 알려주는데도 더욱 죄를 범할 까?

바울사도는 “깨끗한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깨끗하나 더럽고, 믿지 아니하는 자들에게는 아무 것도 깨끗한 것이 없고 오직 그들의 마음과 양심이 더러운지라"(딛1:15)라고 말씀 한다. 그래서 죄를 짓지 말라고 주신 율법이 오히려 우리 속에 있는 정욕과 악한 욕망을 자극해 더 죄를 짓게 만드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학교에서 성도덕이나 성교육만큼 잘못되고 위험한 것은 없다. 그런 성교육의 결과로 성병이 더욱 확대되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교사들이 어린이와 청소년들에게 성을 이야기하기 때문이다. 교육과 심리학은 이것을 모르고 있다. 그러니 얼마나 한심한 노릇인가! 그 동기는 참 좋다. 성문제의 해악과 위험과 결과를 잘 가르치겠다는 것이다. 교육자들은 성교육을 통해 청소년들이 절대 그런 짓은 하지 않고 꿈도 안 꿀 것이라고 챡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좋은 의도와는 달리 청소년들에게 오히려 호기심을 부채질하여 성적 관심을 일으키고 자극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라고 말씀한다. 인간이 부패했기 때문에, 율법조차 죄의 자극제가 된다는 말씀이다. 이것은 율법이 잘못이 있어서가 아니라, 아이들과 내 속이 그 만큼 부패해있기 때문이다. 내 욕심과 악한 욕망을 채우기 위해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왜곡할 정도로 부패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철학자들과 과학자들과 교육층 인사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모른다. 그래서 세상은 오늘도 이런 도덕적 문제들과 혼란에 직면해 있는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인 부모들은 학교에서 성교육 신청을 받거나 강요할 때, 그것에 대해 부모가 반대하고 자녀와 주위에 이런 진실을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4> 넷째 율법의 역할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 앞에서 정죄와 유죄 선고를 받은 죄인임을 보여준다.

 

“우리가 알거니와 무릇 율법이 말하는 바는 율법 아래에 있는 자들에게 말하는 것이니, 이는 모든 입을 막고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 함이라.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19-20)

세상 어느 것도 모든 사람을 정죄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율법만이 정죄한다. 도덕적 가르 침이 무엇인가? 환란을 즐기는 사람은 정죄하지만, 존경받는 사람은 정죄하지 않는다. 도덕적인 사람들은 절대로 건드리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율법은 도덕군자도 정죄한다. 유죄를 선고한다. 그들의 악한 생각과 악한 상상과 상상들을 드러내신다. 이 점에서 무죄한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성경은 분명히 말씀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에 있게 하려함이라”(롬 3:10). 그리스도의 은혜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그 자신이 늘 선하게 살았고 아무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다고 말하는가? 그렇다면 그는 율법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다. 교인이면서도 탐심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기 마음을 점검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들은 성경을 부인하는 자요, 자신을 전혀 모르는 자이다. 누구보다 큰 죄인이다. 신을 씻어주고 구원해 줄 보혈의 필요성을 모르는 죄인 보다 더 큰 죄는 없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진리가 임했는데도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최고의 복음이 왔다: “[ 그러나]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22).

 

<나아가며>


우리는 자신의 마음이 얼마나 추하고 더럽고 어두운지 알아야만, 죄의 심히 죄됨을 알고, 그래야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도 알고 받는 것이다! 우리 모두 그리스도인이 되자! 우리는 율법을 더 깊이 알자! 그래서 은혜를 받자! 아무리 오래 교회 다니면 뭐하는가? 자기 죄를 깨닫지 못하고 자신이 얼마나 추하고 더러운지 모르는 사람은 교회에 와서 앉아 있어도 아무 희망이 없다. 우리 모두는 이것을 깊이 깨닫고 나를 위해 값없이 피 흘리신 주님을 믿고 고백하고 의지함으로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진리에 대해 더욱 뜨거운 감사와 감격과 기쁨으로 이웃을 섬기며 살되,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자!

 

[편집자 주 : 2021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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