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윤석] 확실한 우리의 오늘과 내일

복음뉴스 1 2022.06.25 18:22

요한복음 살펴보기 13

제목 : 확실한 우리의 오늘과 내일
본문 : 요한복음 11-6, 10-18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성경 전체의 메시지를 어떻게 간략하게 요약할 수 있을까? 그것이 요한복음의 서문(11-18)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 알 수 없는 미래를 앞두고 있다. 세상 속에 살며,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지 못하지만, 확신과 자신감을 가지고 오늘과 미래를 맞이하는 유일한 방법을 말씀드리려고 한다. 세상은 문제와 고통과 죄와 악과 당혹스런 일들로 가득하고 불확실하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 사람들과 완전히 다른 위치에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미래를 맞이하는 방법은 오직 한 가지, 자신이 믿는 바를 확실히 붙잡는 것이다. 이것을 제대로 알고 인정하고 그에 따라 살면, 우리의 현재와 미래가 어찌 되든 두려워하거나 불안해하지 않고 맞이할 수 있는 줄 확신한다. 차분하고 침착하게 평안과 기쁨으로 맞이할 수 있고 흔들리거나 방해받지 않고 안식할 수 있는 위치를 가지자! 그것은 요한복음의 이 서문이 그 내용들을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요한복음의 이 서문은 성경 전체의 메시지가 요약되어 있다. 성경의 중대하고 특별한 특징은 66권이 다 한 메시지를 전한다는 것이다. 형태는 다양하지만, 동일한 하나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이 진술하는 말씀을 확실하게 짚어보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이것을 모르면 미래가 불확실해지고, 불행해진다. 그렇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이 아니다. 우리 기독 신앙은 애매모호한 감정이 아니다.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은 철저하게 진리에 기초하고 있다. 필자는 이제까지 10회에 걸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는 진리 중에서도 율법에 대한 여러 가지 내용을 살펴보았는데, 이 진리를 굳게 붙잡아야 할 것이다. 우리 자신이 교회에 와서만 행복감을 느낀다면, 그것은 심리적인 것이지 결코 기독교적인 것이 아니다. 기독교는 절대로 심리학적이거나 철학적인 것이 아니다. 참 기독교는 진리를 이해하고 진리를 적용하고, 우리 안에 활발하게 역사하시는 성령을 힘입어 능히 적용하고 해야 하는 진리의 신앙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확실하게 하는 이 진리의 신앙을 소유해야 한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원리이다. 요한복음의 원리는 다음의 네 가지로 말할 수 있다. 이 진리의 내용을 확실히 알고 적용하자!

 

1. 이 세상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다.

 

1태초에 말씀이 게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1)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지 결코 우연히 생겨난 것이 아니다.

과학적 인본주의자들이 말하는 진화론은 엉터리들이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런 입장을 지지한다. 그들은 이 세상이 실제 물질적인 구조와 역사를 포함한 모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있어서 세상은 의미도, 목적도 없다. 그저 최선의 경우를 기대할 뿐이다. 그래서 대다수 사람들의 생각은 아무 의미도 없고 이유도 없는 세상에 태어나서 사랑받고 성공하고 행복하게 살다 편안하게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의 확신은 결코 그렇지 않다. 모든 피조물은 의미가 있고, 하나님의 목적을 가지고 창조하셨다. 모든 우주와 사건과 역사에는 의미가 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창조하셨다고 말할 때 바로 뒤따르는 결론이 바로 이것이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다. 이 세상이 하나님의 소유이기 때문에 결코 무의미한 인생과 피조물이 아니다. 자기 인생이 목적이 없다고 느끼는 것보다 불행하고 저주스러운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는 목적을 가지고 우리를 창조하셨고, 우주 전체를 창조하셨다는 하나님의 확신을 확신하는 사람들이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소유라는 것을 분명하게 고백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린 아이들은 주변에서 무슨 일어나는지 잘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모가 다 안다는 것을 알고 그것을 믿기 때문에 아무 걱정이 없고 태평하다. 우리도 이와 같다. 우리가 역사 안에 일어나는 사건들에 대한 전체 의미를 잘 몰라도, 세상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하나님의 용도에 따라 설계하심을 믿는다.

 

2) 어떤 사람은 세상에 중요한 것은 인간이며 인간의 위대한 발견을 내세운다.

그래서 몇 가지 것을 발견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그것을 과신하며 우쭐댄다. 인간이 권력과 통제력을 가지고 있디고 주장한다. 그러나 결코 아니다. 모든 것이 실제로는 인간의 권한 밖에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인간의 비참한 실패를 보면서 빛이 있으라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세상을 만드셨다는 사실에 감사를 느끼고 감사하는 삶을 살게 된다. 왜냐하면 그 모든 것은 인간이 통제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며, 이 사실과 확실함을 통하여 우리는 위로를 받고 감사하게 된다. 만일 미래가 인간의 권력과 통제력에 달렸다면, 인간에게는 소망이 없다. 그래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현재의 하루를 출발하면서, 모든 창조물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라는 분명한 확신과 위로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오늘 하루의 출발에서 우리는 모든 일이 다 하나님의 손안에 있다는 생각에서 출발하자!

 

2. 하나님은 허용적인 뜻을 가지고 계신다


5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파악, 이김, 극복) 못하더라. 곧 어둠이 존재한다는 말씀이다.

 

1) 그런데 현실은 어떤가? 하나님이 소유자이시니 평안할까? 아니다. 세상은 문제투성이로 가득찼다. 이런 문제들에 대해 어떤 사람들은 심리적 자기 암시와 방법으로 그것을 해결하려고 한다(coueism). 그런 사람들은 신앙을 상상에 빠져 행복하게 느끼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것은 결코 진리가 아니다. 세상에는 어둠이 분명히 존재한다. 이 어둠과 악함에 대해 하나님은 허용적인 뜻을 가지고 계신다.

 

2) 하나님께서 왜 악을 허용하셨는가? 이것은 신비에 속하는 것이다.

누군가 완전하다라고 말할 때, 그 말에는 선택과 의지의 자유가 포함된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기계적으로 만드신 것이 아니라, 인격체로 만드셨다. 여기서 자유라는 말이 들어가면 악과 잘못된 선택을 할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의 완전성을 나타내시기 위해 악이 들어올 여지를 만드셨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악을 만드신 것이 아니라, 악을 허용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악하고 해롭고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셨다는 말씀이다. 이런 것이 현재와 미래를 앞둔 우리에게 참 위로를 주는 생각이다. 우리는 미래를 제대로 바라보아야 한다. 악한 일은 일어나게 되어 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의 통제를 넘어서는가? 결코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고 허락하시는 것이다.

 

3) 우리에게 적용해보자!

예를 들어 누군가에게 자전거 타는 것을 가르치려 할 때, 처음에는 뒤에서 붙잡아 주다가 얼마 후에는 안장에서 손을 떼고 때로는 넘어지게 내버려 두어야 한다. 그래야 제대로 배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여러분이 그렇게 넘어지도록 허용한 것이다. 그렇다고 통제력을 잃은 것인가? 안장을 잡아줄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을 뿐이다. 우리의 상황이 자전거에서 떨어질 정도로 나빠진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잠시 컨트롤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상황이 나빠지도록 허락하신다는 뜻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시는데는 중대한 목적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우리를 가르치시려는 것이다. 과거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데도 말을 듣지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곤경에 빠지도록 하용하셨다. 그 주위에서 대적들이 일어나게 그냥 두셨다. 나중에는 하나님의 백성인 그들이 바벨론에 사로잡히기까지 당하게 되었다. ? 하나님께서 그렇게 되도록 허용하셨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허락하시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통제력을 넘어서거나 벗어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하나님께서 그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시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이 무엇인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이런 상황에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고, 그런 최악의 상황에도 하나님의 허용적인 뜻을 기억해야 한다.

 

- 댓글난으로 계속 -

Comments

복음뉴스 2022.06.25 19:02
- 본문에서 계속 -

4) 이것을 안다면 이 확실한 것이 우리에게 위로가 될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자! 우리가 그리스도인이 되면 더 이상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그것은 오해이다. 우리 주님을 보라! 주님이 세상에서 어떤 대접을 받으셨는가? 하나님이신 그분이 말씀이 육신이 되셨는데, 그분은 머리 둘 곳조차 없으셨다(마 8:20). 우리 주님이 무슨 일을 겪으셨는가?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악이 자신의 아들을 대적하도록 허용하셨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악하고 해롭고 불쾌한 일들이 일어나도록 허용하신다. 그래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무슨 일이 일어나도 낙심하지 않고 절망하지 않을 수 있다. ‘나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생기는가! 과연 하나님이 계시는가?’ 라고 묻는 사람이 있다. ‘저 사람은 저렇게 잘 나가는데, 나는 하나님이 사랑하지 않는 것인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허용적인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잊어버린 것이다! 나는 하나님의 자녀이니까 내게는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거야!’라고 생각하는가?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우리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되지 않지만, 분명한 목적이 있고 목표가 있다는 것을 기억하자. 성경은 이에 대하여 분명히 말씀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9)”이 말씀이 우리의 낙심과 절망과 스트레스와 무력감에 대한 중대한 해독제인 것을 믿으라!

3. 하나님께서 세상에 관계하시고 돌보신다!
6절 하나님께로부터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있으니 그의 이름은 요한이라!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 이렇게 하나님께서 계속 행동하셨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이 세상에 관계하신다는 말씀이다. 만일에 이 말씀이 없었더라면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가 지금 이 자리에 있지도 못할 것이다. 미래에 소망을 품지도 못할 것이다. 그러나 기독교 메시지의 핵심은 세상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시지 않는다는데 있다. 오히려 역으로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다. 세상에 이처럼 사랑으로 관계하신다고 말씀하신다.

1) 세상은 하나님의 것이지만 사람들은 반역하고 죄를 지었다.
타락하고 저주를 받아 악해지고 더러워지고 온통 어두워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해결책을 두시고 여전히 세상에 관심을 쏟으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애초에 세상을 다 쓸어버리실 수도 있으며, 한순간에 멸망시켜 버릴 수 있다. 세상에 등을 돌리시고 ‘나 없이 살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아라’하실 수도 있다. 실제로 어느 정도는 그렇게 하셨다. 그래서 노아의 시대에 대홍수가 온 것이다. 그러나 그 대홍수 속에서도 하나님께서는 세상을 버리지 않으셨다. 우리가 보기에는 버리신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버리지 않으셨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때, 자신이 원하는 시점에 개입하셔서 세상에 관심을 보이시고 궁극적으로 방치하지 않으셨다.

2)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셨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하나님의 구원계획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구원계획을 다루는 책이다.
14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며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모세를 세우시고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셨다는 것 자체가 이스라엘 자손의 존재가 하나님께 계획되었음을 보여주는 표시요 증거였다. 자기들끼리 즐겁게 살게 하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들을 통해 온 세상에 말씀하시기 위해서이다. 그들을 통해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 그렇게 하셨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표였다. 그래서 그들은 말씀을 맡은 자가 되었다. 왜? 증인이 되기 위함 때문이다.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증언하는 유일한 증인으로 삼아주신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읽어보면, 율법을 주시고, 약속의 땅으로 보내시고, 왕을 주시고, 선지자들을 보내주셨다. 하나님이 모든 일을 하셨다. 이 사실이 얼마나 우리에게 위로를 주는가! 그만큼 관심을 가지시고 자신의 목적을 행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해당되는 말씀이니 이 얼마나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인가!

3)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큰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께 이르러 더 분명하게 나타난다.
17절 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하나님은 아들을 친히 보내실 정도로 세상에 관심을 쏟으셨다. 가장 큰 관심이다. 태초에 하나님이셨던 성자 하나님이 육신이 되어 인간 무대에 등장하셨다. 그래서 우리와 같은 사람이 되셨다는 엄청난 선포가 오늘의 말씀(14절)이다. 이토록 큰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계셨고, 보이셨다는 말씀이다. 사람들은 인터넷이나 신문이나 역사책이나 드라마를 보면서 말한다. '인간 만사 허무하고 그저 모든 것이 돌고 돌 뿐이다’그런가? 그렇지 않다. 우리 그리스도인이 내놓을 답은  ‘그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역사를 보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해가 바뀌어 새해가 올 때마다 이런 저런 결심을 한다. 새해에는 완전히 달라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정치, 경제, 교육과 전반적인 삶에 대해서 그렇다. 그러나 실상 그것은 애초부터 소망이 없고 절망적이다 보니 그런 지푸라기라도 잡으려는 마음과 느낌 뿐이다. 세상이 이렇게 허황된 기대를 가지고 사는 것은 하나님이 세상에 관심을 쏟으신다는 진리를 모르기 때문이다.

4. 세상이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은 확실히 이루어진다
이것이 본문에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우리에게 주시려는 최종적인 위로이다.
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1) 이것이 무슨 위로일까?
사람들이 거부했다는데 무슨 위로인가?  성경은 하나님이신 아들이 세상에 와서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고 말한다. 세상은 다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다(3절)고 말씀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신 하나님께서 자기 땅, 자기 백성, 자기 소유지에 왔어도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않았다. 이처럼 자기 백성들이 거부했어도 이 땅에 오셨다. 자기 백성이 능욕하고 거절했어도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까지 해도 오셨다. 세상이 그토록 거부하고 싫어하고 죽이려해도 오셨고, 지금도 세상에 일하고 계시고 곧 다시 오실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은 우리 때문에 주시는 것이 아니라, 우리와 상관없이 주시는 것이다. 그래서 행위로 의롭다 하심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 결정적인 이단이다. 우리가 괜찮은 사람이기에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고 복을 주시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그는 그리스도인 됨에서 멀리 떨어진 사람이다. 우리는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구원받는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하나님께서 자기 땅에 왔는데도 영접하지 않았다는 것은 충격적인 말씀이다. 그렇다고 달라졌는가? 달라진 것이 전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계획은 계속 진행되었다. 구약에 나타난 비참한 이스라엘을 보라! 그것은 오늘날 비참한 어떤 교인들들과도 같을 수 있다.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불리워졌다. 그런데 무슨 짓을 했는가? 원망하고 불평했다.  오히려 세상의 좋아하는 것들, 곧 세상의 신들을 따르고 세상 사람처럼 살고 싶어 했다. 늘 하나님을 거스려 하나님의 계획을 방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아들을 세상에 보내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그들의 상태에 죄우되지 않았다. 그들의 반발과 고집, 어리석음과 상관없이 계획을 실행하셨다.
  하나님의 계획은 우리가 아닌 하나님께 달려 있다. 인간들의 무익함과 상관없이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나가신다. 그 계획이나 절차가 조금의 흔들림이 없으시다. 이것이 참으로 놀라운 진리이다. 하나님께서 그 계획을 따라 우리에게 보내시는 소식은 단 일 초도 어긋남이 없다. 정확히 언제 홍수를 보내실지 정해놓고 계셨다. 그래서 노아에게 방주를 지으라 하셨다. 그렇다고 해서 사람들이 듣고 받아들일 완전히 준비가 되었을 때까지 기다리신 것은 아니다. 또한 상황이 최악일 때가 더 많다. 모세를 보라. 그는 한없이 절망적인 시기에 태어났다. 그러나 상황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어떤 상황에서든지 하나님은 그분의 계획을 이루어가셨고 또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의 역사와 우리의 일에도 마찬가지이다. 여러분은 정말 그렇게 믿고 사는가? 본문에 세례요한이 보내심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때가 언제인가? 누가복음 3장에 보면, 디베료 황제가 통치한 지 15년, 본디오 빌라도가 유대 총독으로, 헤롯이 갈릴리의 분봉왕으로, 그 동생 빌립이 이두래와 드라고닛 지방의 분봉 왕으로, 루사니아가 아빌레네의 분봉 왕으로, 안나스와 가야바가 대제사장으로 있을 때에 하나님의 말씀이 빈들에서 사가랴의 아들 요한에게 임했다(1-2절). 이렇게 구체적으로 밝히는 것은 최악의 불한당들이 적혀 있다는 뜻과 같다. 그런데 그런 시기에 말씀이 세례요한에게 임한 것이다. 세기의 불한당들이 세력을 잡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 자신의 종 요한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을 생각해보라.

3) 이것은 항상 그렇다! 언제 말씀이 육신이 되었는가?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서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에 나게 하신 것은(갈 4:4).
정확하게 때가 찼을 때 하나님께서 육신이 되셨다. 하나님은 늘 이렇게 일하신다. 세상을 위한 하나님의 큰 계획을 좌절시키기 위해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지옥이 온갖 짓을 다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계획은 계속 진행된다. 세상이 무슨 짓을 해도 달라지지 않는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계획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이것을 믿고 사는 사람들이다.

4) 이런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 하나님의 백성을 하나님이 어떻게 사랑하시는가?
17-18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
예수 그리스도! 독생하신 하나님께서 우리와 우리의 유익과 우리의 복을 위해, 그리고 궁극적으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오셨다 그분이 오셔서 참아내셨다. 죄인들이 그토록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셨다(히 12:3). 왜 참으셨는가? 우리를 불쌍히 여기셨고, 우리의 연약함을 공감하시기 위함 때문이다.

[나가는 말]

우리는 금년에도 코빗이란 전염병과 전쟁이라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미래에도 우리에게 무슨 일이 닥칠지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미래를 위해 요한복음의 서문에서 주셨던 이 사실을 확실하게 기억하자! 하나님의 아들 우리 주께서 우리를 위해 그 모든 것을 참으셨다. 예수께서 우리의 죄악을 직접 담당하셨다. 우리로 하여금 그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시려고 죄를 알지도 못한 이를 우리를 대신하여 죄로 삼으셨다(고후 5:21). “우리가 원수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롬 5:10). 하나님께서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주시면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것을 주셨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롬 8:32). 하나님은 우리의 위로, 행복, 평안, 기쁨, 최종적인 영화, 천국의 완성과 영원한 영광 가운데 얻을 충만한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주신다. 금년 내내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고 가게 하실 풍성한 진리를 붙잡자! 우리의 현재와 미래에 대해 확실한 것에 대한 하나님의 확신을 가지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보내주신 하나님을 찬양하고 감사하며 오늘과 내일도 확신을 가지고 걷는 발걸음이 되자!

* 2022년 6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3호에 실린 글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182 [이종식] 새해를 시작하는 우리가 가장 힘써야 할 것, 예배 복음뉴스 2022.04.14
181 [조원태] 눈 내리는 날 함께 커피숍 가고 싶은 모세 형 복음뉴스 2022.04.13
180 [김동욱] 복음뉴스 창간 5주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복음뉴스 2022.04.13
179 [양희선] 새해에는... 복음뉴스 2022.04.13
178 [권캐더린] 새로움이 주는 의미 복음뉴스 2022.04.13
177 [김용복] 죽 쑤는 공주 복음뉴스 2022.04.13
176 [배성현] 사랑 고백 복음뉴스 2022.04.13
175 [이윤석] 율법은 우리를 은혜로 인도한다 복음뉴스 2022.04.13
174 [양춘길] 시내버스의 추억 복음뉴스 2022.04.13
173 [한준희] 기도란 무엇인가? (2) 복음뉴스 2022.04.13
172 [강유남] 누가 천국의 열쇠를 주는가? 복음뉴스 2022.04.13
171 [김현기] 찬양 하는 기타리스트, 김명민 전도사 복음뉴스 2022.04.13
170 [유재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 (2) 복음뉴스 2022.04.13
169 [유재도] 가르쳐 지키게 하라 (1) 복음뉴스 2022.04.13
168 [김경수] 상처 입은 성격 드려다보기 복음뉴스 2022.04.13
167 [이종식] 앞날을 바라보며 청년들을 일으켜야 한다 복음뉴스 2022.04.13
166 [박인혜] 새해 복음뉴스 2022.04.13
165 [송호민] 신자의 삶의 목적 복음뉴스 2022.04.13
164 [조희창] 아버지가 마음으로 주신 기도문 복음뉴스 2022.04.13
163 [오종민] 어떤 마음으로 한 해를 사시겠습니까? 복음뉴스 2022.04.13
162 [김혜영] 새로울 것 없는 새해에 세우는 새로운 계획 복음뉴스 2022.04.13
161 [이민철] 메이첸 박사 저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셨는가? 복음뉴스 2022.04.12
160 [문갈렙] 바울처럼 그렇게 살 순 없을까? 복음뉴스 2022.04.12
159 [한삼현] 안식일에 합당한(lawful) 일이라! 복음뉴스 2022.04.12
158 [박시훈] 시선을 바꾸면 인생이 바뀐다 복음뉴스 2022.04.12
157 [조원태] 해피 뉴 이어, 모세 형 복음뉴스 2022.04.12
156 [이선경] 이스라엘 백성처럼, 시온의 영광을 사모하자 복음뉴스 2022.04.12
155 [김동욱] ‘은혜’가 아닌 ‘법’이 판단의 잣대가 돼야! 복음뉴스 2022.04.12
154 [박인혜] 아름다운 크리스마스 복음뉴스 2022.04.12
153 [배성현] 나의 남은 날 계수하게 하소서 복음뉴스 2022.04.12

 




 
 
Facebook Twitter GooglePlus KakaoStory NaverBan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