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당신은 예수를 알고 영접하여 믿고 있는가?
요한복음 1장 10-12절
글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필자는 요한복음 서문을 살피며 10회에 걸쳐서 율법의 말씀을 나누었다. 또 요한복음 전반부가 복음의 원리에 대해 확신할 내용을 말씀드린다고 했다. 그것은 성령께서 요한을 감동시켜 요한복음을 쓰게 만든 동기가 무엇인지 말씀한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마지막 부분도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라”(20:31)고 말씀한다. 이제 필자는 사도요한의 주된 관심을 따라서 그리스도의 확신에 대한 말씀을 전개하고자 한다.
1. 요한의 주된 관심은 그리스도인의 확신이다.
사도는 이 복음서를 읽는 자들이 더 깊고 심오한 자리로 나아가게 되도록, 즉 그리스도인의 삶을 누리게 되도록, 또한 강력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해 쓴다. 당시에 사람들은 우리처럼 책으로 된 신약 문서가 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거짓된 가르침이 등장했고, 마귀가 혼란을 일으켰고, 이단의 유혹이 있었다. 그래서 모든 성경은 신자들이 확신을 가지고 믿음에 굳게 설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다. 이 복음서도 불신자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신자들을 위해, 이미 믿는 바를 더 확실히 알도록 도와주기 위해 기록되었다. 예를 들어, 누가복음은 이렇게 시작된다: “그 모든 일을 근원부터 자세히 미루어 살핀 나도 데오빌로 각하에게 차례대로 써 보내는 것이 좋은 줄 알았노니, 이는 각하가 알고 있는 바를 더 확실하게 하려함이로라”(1:3,4). 누가는 확실성과 확신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고 있다.
1) 이런 점에 있어서,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은 왜 대중을 복음의 메시지로 이끌지 못하는가? 사람들이 왜 교회에 관심도 없고, 교회 밖에 머무르는가?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에게, 가장 놀랍고 훌륭한 진리를 가지고 있고, 믿고 있고, 붙잡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뿌리 깊은 기쁨과 평안을 가진 사람들로 보인다면, 그들 벌써 주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이라는 사람들이 오히려 더 불행해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그리스도인들에게 관심이 없다. 세상 사람들이 볼 때 어떤 면에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불쌍한 사람들이다. 왜냐하면 그저 말로만 기쁨과 행복을 말하지만 실제 삶 속에서는 그것이 없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 경악할만한 일이요, 변명의 여지가 없는 심각한 죄라고 할 수 있다. 왜 그리스도인들이 그럴까요? 구원의 신앙과 소망에 대해 전적인 확신이 없기 때문이다. 모든 면에서 흔들리지 않는 확실성이 없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쓴 목적도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이런 확신의 자리로 인도하려는데 있다. 우리가 확실하고 확신할 때 거기서 깊은 샘의 밑에서 나오는 기쁨과 행복이 따르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더욱 효율적이고, 강력한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 또한 이 시대의 어둠을 밝히는 하늘의 빛이 되기 위해, 그리고 또한 무엇보다 우리가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는 사람들이 되기 위해, 우리는 확실하게 알고, 또한 확신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한다.
2) 이 확신의 목적을 위해 사용한 방법이 무엇인가?
(1)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세상의 어두움이다.
당신은 지금 바로 여기에 악한 힘, 마귀의 힘, 지옥의 힘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이런 것을 분명하게 의식하지 못하고 살고 있다면 마귀의 포로로 그의 먹이감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면 내 자신이 참으로 어두운 세상에 살고 있음을 분명하게 잘 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의 씨름의 대상을 이렇게 진단한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을 상대함이라”(엡 6:12). 지금 이 나라에서 벌어지는 현실이 바로 그렇지 않은가! 성경을 무시하고, 동성애를 인정하고 참여하며, 온갖 거짓과 속임으로 꽉 차 있지 않은가! 이것에 대해 우리는 반드시 기도해야 한다. 기도하는 것은 성경의 강력한 명령이다!
(2) 다음으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이다.
우리 구원이 율법과 관련해서, 무슨 일을 해주는지에 대해 제대로 모르기 때문에 기쁨과 확신을 누리지 못하는 교인들이 많다. 우리는 이미 구원받아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은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구원의 깊이와 능력과 일관성과 기쁨이 있는가? 없을 때가 훨씬 더 많다. 왜 그럴까? 그것은 무엇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는지 제대로 모르기 때문이다. 지난 열 번에 걸쳐 율법에 대해 말씀 드렸듯이, 율법과 자신의 관계, 마지막 심판과 자신의 관계를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율법의 일이 철저히 이루어질수록, 주님과 주님의 구원이 얼마나 깊고 오묘하고 감격스러운지, 이에 대한 마음이 커지고 용솟음치게 마련이고, 거기에 따라 행복과 기쁨이 커지게 마련이다. 당신에게는 이것이 과연 있는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우리는 율법으로 우리 속을 깊이 파 내려가게 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얼마나 엄청나고 심각한 죄인이고, 얼마나 비참하고 공허한 존재인지, 아주 뿌리깊게 파고 들어가고 폭로해야만 한다. 주님이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 가셨을 때, 한 여자가 들어와 주님의 발을 눈물로 씻고 머리털로 닦았다. 여자가 이런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을 보고 놀라는 성경교사들인 바리새인들에게 주님이 말씀하셨다:“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눅 7:47). 이것은 죄를 더 많이 지으란 말이 아니다. 자기 죄의 깊이와 죄 사함의 필요성을 절실히 깨달을수록 주님을 향한 사랑과 기쁨이 커진다는 말씀이다.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확실하게 붙잡은 진리는 무엇인가?]
1. 가장 중요한 주제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의 관계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만 믿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요 14:1). 우리 그리스도인은 구약시대 유대인들이 가진 확신보다,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훨씬 더 큰 확신을 가져야 할 사람들이다. 유대인들의 감격과 확신이 무엇인가? 로마서 2장에서 그들은 율법을 의지하고,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이며,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는다(롬 2:17-20). 바울 사도는 “그런즉 유대인의 나음이 무엇이며 할례의 유익이 무엇이냐 범사에 많으니 우선은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맡았음이니라”(3:1)라고 말한다. 그래서 유대인 조상인 아브라함은 모든 것이 가장 어려운 상황에도 하나님을 믿었다. 그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랐고 확신했다. 그래서 바울은 아브라함의 믿음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믿음으로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능히 이루실 줄 확신하였으니“(롬 4:20).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떠났지만, 누가 동행해주시는지 분명히 알고 떠났다. 그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놀랍게 행동했고 기쁨이 넘쳤다. 그런데 우리는 그보다 더 큰 확신이 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아들이시오 우리 주와 구주되신 복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일로 인해 우리는 유대인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무한히 더 큰 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이렇게 무한히 더 큰 이런 확신을 실재로 가지고 살자!
1) 그리스도인이 갖는 확신의 첫 단계는 주 예수 그리스도와 자신과의 관계를 확인해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어떤 교인들은 “다른 그리스도인은 다 누리며 사는 것 같은데, 저는 누리지 못하는 것 같아요”라고 말한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으로서 기쁨과 확신, 자신감이 없다는 것이다. 왜 그럴까? 출발점 자체가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처음부터 출발해야 하는데, 중간에서 출발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요한복음 출발점 서문이 중요한 것이다. 교회와 기독교 가정과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이 특히 더 그렇다고 할 수 있다. 소위 ‘모태 신앙’이라고 부르는 것은 참 좋은 것이지만, 그들에게 있어 치명적인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이 있다. 그것이 무엇인가?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아닌데 그리스도인이라고 가정해 버리는 위험성이다. 이것은 기초 없이 건물 세운 것과 같다. 자신은 그리스도인으로 자처하는데 자기가 무엇을 믿는지 제대로 출발점에서 점검해보지도 않고, 유아세례를 받았고, 학생 때부터 교회 다녔다고 해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은 것이 문제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우리가 점검하고 확인할 것을 말씀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받은 자니라“(고후 13:5).
우리들도 처음으로 돌아 가보자. 출발점에 무슨 문제가 없는지 확인해보자. 우리가 우리의 위치를 점검하고 점검해보는 것이 아주 유익하고 올바른 일이다. 우리가 무엇인가 잘못된 것 같다면, 만족스럽지도 않고 행복하지도 않다면, 어떤 사람이 기독 신앙에서 무엇인가를 얻는데 자신만 얻지 못하는 것 같다면, 출발점부터 다시 점검해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차가 갑자기 멈추었다면 무엇을 점검해보아야 하는가? 무엇보다 먼저 가솔린이나 물이 있는지, 기본부터 차근차근 살펴보아야 한다. 이처럼 처음으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인 것이지만 자신에 대해서 쉽게 가정하지 말자!
2) 그러면 그 우선되는 기본적인 원리와 전제가 무엇인가?
(1) 먼저 감정에서 출발하면 안된다. 물론 감정도 점검해 보아야 한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무엇을 믿는지 모르는 문제인데, 감정을 느껴 보고자 오랜 시간 애를 쓰는 사람도 있다. 감정은 따라오는 것이지 앞서가는 것이 아니다. 감정 자체를 출발점으로 삼으면 결국 시간을 낭비하게 된다. 또 어떤 이는 성령의 열매를 통해 삶을 점검하는 분이 있다. 이것도 유익하지만, 출발점은 아니다. 물론 그리스도인은 자신에게 성령의 열매가 있는지 살펴봄으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알거니와”(요일 3:14). 주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 무거운 것이 아님을 경험한 사람은 참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성령의 열매나 사랑을 기준으로, 출발점으로 삼으면 안된다. 기초가 잘못된 상태에서 성령의 열매를 찾아보아야 소용이 없다. 성령의 열매는 처음이 아니라, 마지막에 확인해야 한다.
(2) 그러면 어디서 출발해야 하는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처음부터 인류를 둘로 갈라놓으셨다. 필연적으로 그럴 수 밖에 없다. 주님은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마 10:34) 하셨다. 주님은 처음부터 검의 역할로 오셨다. 예수께서 태어나실 때부터 헤롯 왕과 동방박사들을 갈라놓으셨다. 그를 제거하는 자들과 그들을 경배하는 자들을 갈라놓으셨다. 복음서에 주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는 항상 나누시는 분이셨다. 주님을 믿고 따르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돌로 치려는 자들이 있었다. 눈물로 발을 씻고 머리털로 닦는 자들이 있었다. 그리스도인과 비 그리스도인들로 나누셨다.
우리의 믿음의 기초를 점검해보는 일이 아주 중요한 이유가 또 있다. 예수께서는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1:3)라고 하셨다. 주님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제대로 알 수가 없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의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이 일은 오직 주님께 달려 있다. 그렇기에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살필 때, 어떤 부분도 당연시하고 건너뛰어서는 안된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간다. 하나님의 모든 복은 그를 통해, 오게 되어 있다. 그리스도 안에 쌓여 있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를 성령이 우리에게 전해주신다. 그러므로 우리는 지금 그리스도와 우리 자신의 관계를 분명히 확인해보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시급하다.
2. 주 예수 그리스도와 참된 그리스도인의 관계에는 세 가지 특징이 있다
1) 첫째는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다
세상은 보아도 모른다: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1:10). 주님이 자기 백성들 가운데 사셨는데 전혀 알지 못했다. 관리들, 지혜자들도 알지 못했다: 이 지혜는 이 세대의 통치자들이 한 사람도 알지 못하였나니 만일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1) “알다”라는 말의 첫 번째 의미는 누구인지 [알아본다]는 것이다
유대인 종교당국자들은 그가 누구인지 알았지만, 진정으로 전혀 몰랐다. 그들은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말씀을 뻔히 보면서도, 그들은 주님을 알지 못했다. 그러나 요한은 1장 14절에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고 한다. 보통 사람에게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닌 사람에게는 위대하신 분에 불과하다. 왜 그런가? 그들은 눈이 가리워져 절대로 볼 수가 없기 때문이다. 복음은 어떤 것인가?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고후 4:3,4)
(2) "알다"라는 말은 ‘알아본다’는 의미뿐 아니라, ‘인정한다’는 의미이다
‘안다’는 것은 이 영광에 대해 그가 누구신지에 대해, 성육신의 비밀과 경건의 비밀에 대해 안다는 뿐 만 아니라, 그것을 인정하고 놀라움과 경이감에 사로잡힌다는 뜻이다. ‘오! 크도다!’라고 감탄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내가 땅의 모든 족속 가운데 너희만을 알았나니”(암 3:2)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그저 존재를 안다는 뜻 이상, 친밀하게 아시고 관심을 쏟으시며 염려하신다는 뜻이다. 이것이 바로 ‘알다’라는 의미이다.
(3) 또 [안다]는 것은 기이히 여기며 삶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아! 하나님께서 독생자를 보내셨구나!’ 그 일을 놀라워하고 기이히 여겨는 것이다. 그래서 그를 아는 자들은 그 삶의 주된 관심을 예수 그리스도에게 집중시킨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셨다는 사실, 하나님의 영원하신 아들이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을 입고 시간의 세계 속에 오셨다는 사실이 그들의 모든 행동에 영향을 끼치게 되어 있다. 자! 이런 의미에서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모든 사고의 중심이 그에게 맞추어져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알기에, 주일뿐 아니라, 날마다 그를 생각하고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삶 전체의 토대가 되시며 삶의 방향을 결정하고 있는가? 철저한 점검과 확인과 확신이 선행되어야 한다.
2) 둘째 영접하는 것이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이것은 ‘알다’보다 더 경험적인 단어로서, 경험적인 요소가 담겨 있다.
(1) ‘영접한다’는 것은 ‘환영한다’는 뜻이다
반가운 마음을 표현한다는 것이다. 어느 누가 초인종을 울려 나가보니 친한 친구가 와있다면, 여러분은 반색하며 ‘어서 오라’고 재촉한다. 단지 친구를 알아보고 인정하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 이상으로 영접하는 것으로, 반색하며 열렬히 환영하는 것이다.
(2) 더 나아가 ‘영접하다’는 말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말이다
성경은 ‘귀신들도 믿고 떤다’고 말한다(약 2:19). 귀신들도 예수님을 정확히 알아 보았다: “나는 당신이 누구인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눅 3:34).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두려워했다. 기본적으로는 이것이 중요하다. 교인들 중에는 스스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알고 믿고 영접한다고 하는 사람들은 많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이 말씀에 대하여 정확히 진정한 의미와 핵심을 말해주고 권면하면 화를 낸다.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거듭나야 합니다!’하면 화를 낸다. ‘나는 예수님을 잘 알고 있고 영접했는데 나에게 왜 그런 말을 하시오’라고 반발한다. 그는 실재로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은 것이다. 문제는 우리는 영접하지도 않았으면서도, 항상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아보는 것으로 가정하며, 영접한 것으로 가정해 버린다는 것에 있다.
그리스도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와 관련된 모든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그분의 모든 가르침과 거기 함축된 모든 의미를 받아들인다는 뜻이다. 자신이 죄악되고 저주받아 아무 소망없는 자신을 구원해 줄 것은 세상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 그렇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십자가에서 죽으셔야만 했다는 사실을 진정으로 믿는다는 뜻이다. 그런 사람들의 고백이 무엇일까? 바울은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라고 고백한다.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많은 이들에게 거리끼는 것, 곧 걸림돌이었다. 유대인들에는 거리끼는 것, 곧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위대한 구원자요 강력한 왕인 메시아가 어떻게 사형대에 못 박힌다는 말입니까?’라고 항의하는 것이다. 또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다. 그들이 볼 때 그의 죽음은 순전히 어리석은 죽음일 뿐이다. 구원은 나무에 달려 죽는 사건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사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기 때문이다. ‘영접한다’는 것은 그가 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이고 기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을 받아들인다는 뜻이며,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그 모든 일을 하셨다는 사실을 기뻐한다는 뜻이다. 여러분은 왜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자신에게 예수 그리스도가 절실히 필요함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신의 연약함과 죄를 깨달은 사람은 주님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그는 ‘내가 주께로 지금 가오니 골고다의 보혈로 날 씻어주소서!’라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앞에 나아갈 것이다.
3) 셋째 영접한다는 것은 믿는 것이다
1장 12절 “영접하는 자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사도 요한은 각각의 다른 진리를 위해 세 가지 단어 사용한다. 처음부터 사도들이 전한 중대 메시지가 무엇인가?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할 때, 베드로는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고 했다. 여행 중에 전도자 빌립을 만난 에디오피아 내시는 복음에 대한 설명을 듣고, 바로 믿었다. 빌립과 내시의 대화가 무엇인가? “네가 마음을 온전히 하여 믿으면 가하니라!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인 줄 믿노라”(행 8:37). 이것이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1) ‘믿는다’는 말은 그 이름을 믿는 것이다. 이름은 권세와 능력을 나타낸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 뿐 아니라, 그가 행하신 모든 일을 믿는다는 것이다.
성전 미문 앞에 앉았던 앉은뱅이를 고친 후, 베드로가 분명히 밝힌다: “그 이름을 믿으므로 그 이름이 너희가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행 3:16). 여기서 ‘이름’은 주님의 권세, 생명의 권세를 의미한다.
2)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가 누구신지 알아보고 유일한 구원의 길로 세상에 오신 것을 환영할 뿐 아니라, 거룩하신 구주의 모든 영광을 절대적으로 신뢰하며, 그와 그분이 행하신 일을 철저히 의지한다는 것이다.
(1)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이유를 알고 깨닫는 것이다.
‘우리가 율법 아래 극심한 정죄를 받고, 아무 소망이 없는 존재구나!’라는 것을 깨닫고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원하실 유일한 방법으로 그리스도가 오셨구나!’라는 것을 깨닫는 것이며, ‘나는 오직 그 사실에 나 자신을 의탁합니다!’라고 믿고 받아 신뢰하는 것이다.
(2)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고백이 무엇인가? 그들은 중심으로 이렇게 찬송처럼 고백한다:
“빈손 들고 앞에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아주심 바라고 생명 샘에 나가니 맘을 씻어 주소서!” “큰 죄에 빠진 날 위해 주 보혈 흘려주시고 또 나를 오라 하시니 주께로 거저 갑니다!” 이것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고백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자신을 믿지 않는다. 다른 사람, 곧 세상의 발견을 믿지 않는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 나를 위해 갈보리의 언덕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분, 하나님 우편에 앉아계셔서 항상 살아서 날 위해 기도하시는 분이시다! 이 분 외에는 그 무엇도 믿지 않으며, 오직 나는 주를 신뢰합니다! 라고 고백하는 것이다. 그래서 자신을 버리며, 자신의 선과 의와 모든 것을 버리겠다고 선언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사랑하여 나를 위해 자신을 주셨다‘는 사실만을 철저히 의지하는 것이다.
(3) 바울사도의 고백이 무엇인가? “예수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와서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으니”(고전 1:30). ‘그리스도는 나의 전부시다!’ ‘내가 아는 모든 것은 그분이 가르쳐 주신 것이다’ ‘그는 나의 지혜가 되셨다!’ ‘나의 죄책도 형벌도 대신 받으시고 자신의 의를 내게 주셨다!’ ‘그는 나의 의, 나의 거룩함이시다!’ 라는 순전한 고백이다. 나 혼자라면 여전히 소망이 없겠지만,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능력을 공급받는다! 그래서 본문은 감격적으로 선포한다: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
(4)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는 나의 구원이요 나의 영광이시다
성도여! 그가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아나셨기에, 그 안에 있는 나 또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날 것을 안다! 그리스도께서 주신 성령님께서 이 사실을 증거해 주시길 바란다! 바울 사도처럼 강력한 확신을 가지자: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롬 8:11) 확신하자! 아멘! 나의 확신은 하나님의 아들이 나를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와서 살다가 죽으셨고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확신이다! 고백하자!
[나아가며]
나의 모든 과거를 극복하려 할 때 나의 의지할 분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현재도, 장래도, 의지할 분도 오직 내 구주 예수 그리스도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바울처럼 신앙하는 것이다: “내 안에 게신 그리스도, 영광의 소망이시다”(골 1:27). 여러분은 그리스도를 알고 있는가? 그리스도를 영접했는가? 모든 면에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있는가? 이 기초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 위에 계속 세워 나가자! 이제까지 말씀드린 모든 수원지와 샘과 근원이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육신이 되신 말씀이요, 우리 가운데 거하시는 분이요, 아버지 품속에 있는 분이요, 영원히 살아서 성부. 성령과 함께 다스리는 분이시며, 영원토록 영광스런 성자 하나님이시다! 우리는 주 예수를 알고 영접하여 믿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권세와 확신 가지고 풍성하고 넘치는 믿음의 삶을 살자!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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