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철 목사의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⑤ 우리는 축자영감을 믿는가? (Do We Believe In Verbal Inspiration?)
글: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4장 요약: 왜 우리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에 덧붙여서, 참으로 후대에 주어진 것이 아닌 성경 시대에 주어진 초자연적 계시에 대한 자료를 얻어서는 안 된다는 것인가? 우리가 그렇게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인 아주 가능한 일이다. 예를 들어, 이집트에서 사복음서(四福音書)들에 들어 있지 않은 예수님의 말씀들에 관한 참된 자료를 제공하는 파피루스 조각들이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것은 아주 가능하다. 그러나 실제로 이제까지 발견된 파피루스 조각들은 그러한 자료를 거의 제공하는 것 같지 않다. 우리는 성경에 관해 무엇이라고 생각해야 하는가?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가 생각해야 한다고 내가 생각하는 바를 아주 명백히 말하겠다. 나는 성경기자들이, 그들의 전 생애에 하나님의 섭리적인 정하심에 의해(the providential ordering of their entire lives) 그들의 사명을 위해 준비된 후(after having been prepared for their task), 그 모든 것에 더하여, 하나님의 영에 의한 복되고 놀랍고 초자연적인 인도(a blessed and wonderful and supernatural guidance)와 충동(impulsion)을 받았고, 그래서 그들은 다른 책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the errors)로부터 보호되었다. 따라서 그 결과로 생긴 책인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것이 사실의 문제에 관해 말하는 바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고(completely true) 그것의 명령들에 있어서 완전히 권위적(completely authoritative)이고 생각한다. 이것은 성경에 대한 ‘완전한’영감의 교리이다(That is the doctrine of full or ‘plenary’inspiration of Holy Scripture).
5장 우리는 축자영감을 믿는가?:
지난번 이야기에서 성경의 영감에 관해 말하였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하나님의 영에 의해 복되고 놀랍고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인도와 강한 충동(impulsion)을 받았다. 그래서 그들은 다른 책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로부터 보호되었다. 그 결가로 생긴 책인 성경은 모든 부분에 있어서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것은 사실의 문제들에 관해 말하는 바에 있어서 완전히 참되고 그것의 명령들에 있어서 완전히 권위적(completely authoritative)이라고 나는 말했다. 이것은 중요한 성경의 완전영감의 교리이다(That is the great doctrine of the full or ‘plenary’inspiration of the Holy Scripture.).
나는 내가 여러분에게 그 교리에 관해 말하고 있던 바를 중단해야만 했다. 사실, 내가 말할 시간을 가졌던 거의 모든 내용은 어떤 잘못된 개념들을 제거하는 것이었다. 이제 우리는 좀 더 그 주제의 중심으로 들어간다.
나는 만약 여러분에게 내가 생각하는 것, 비록 완전영감(完全靈感)의 교리에 대한 반론들 중의 가장 보편적인 것은 아닐지라도 아주 보편적인 것 하나를 나와 함께 일 이분 동안 생각하도록 부탁한다면 나는 여러분이 그 주제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것을 도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이렇게 반론들을 고찰하는 일은 여러 면에서 좋은 일이다. 그것은 단지 실제로 그 반론(反論)들로 고민하는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우리 모두들로 하여금 그것을 우리의 지성으로 좀 더 바르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해줄 것이다. 어떤 것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알려면 그것이 무엇이 아닌가와 날카롭게 대조시키는 것보다 더 좋은 방법은 별로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완전영감의 교리에 대한 이러한 보편적인 반론은 무엇인가? 그것은, 완전영감 교리는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들에게 기계적인 방식으로, 즉 기록자들을 단순한 기계들의 위치에로 떨어뜨리는 방식으로 역사(役事)하시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반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들은 성경의 ‘축자적’(逐字的, 문자적) 영감을 믿는가?”그들이 그것을 우리에게 질문할 때, 그들은 그들이 무서운 궁지에 몰아넣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렇다면 당신들은 어떻게 성경이 전적으로 참되다는 당신들에 대한 어떤 초자연적인 간섭을 하시지 않았다면, 그 단어들은 모든 인간적 저작들에서 발견되는 그러한 오류들을 확실히 지닐 것이다.”라고 말할 것이다. 반대로, 만약 우리가 “그렇다. 우리는 축자영감을 믿는다.”고 말한다면, 그들은 기겁하여 손을 올릴 것이다. “야 지독하다. 아니 기계적이라니!”(How dreadful, how mechanical!)하고 그들은 말할 것이다. “만약 하나님께서 참으로 단어들은 이러 이러해야 한다는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준비하셨다면, 성경 기록자들은 단순한 속기사(速記士)들의 위치로 떨어질 것이다. 사실 그들은 이 보다 한층 더 낮게 떨어진다. 왜냐하면 속기사들은 충분히 잘못을 범할 수 있고 또한 보충할 수 있는 인간이지만, 그 경우에는 단어들이, 단어들을 산출하는 인간 도구들이 단순한 기계임을 보여주는 그러한 완전한 정확성을 가지고, 산출될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기록자들이 이렇게 낮게 취급되었다고 간주될 때 성경의 놀라운 아름다움과 다양성은 어떻게 되는가?”
그것이 우리가 빠진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함정이다. 혹은, 내가 비유를 오히려 강하게 바꾼다면, 이와 같은 것이 우리가 찔려 꼼짝 못하게 된다고 그들이 생각하는 함정의 뿔(the horns of the dilemma)이다.
우리는 어떻게 피할 수 있는가? 나는 우리가 아주 쉽게 피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나에게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질문을 아주 명백하게, 빠르게 대답하겠다. 그렇다(YES). 나는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는다. 그러나 나는 여러분과 내가 ‘축자’(Verbal)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한 바른 생각을 가져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는 확실히 성경의 축자영감을 믿는다. 여러분이 만약 하나님께서 성경의 단어들이 오류에 빠지지 않도록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준비하지 않으셨다면 우리는 성경이 철저히 초자연적인 책이라는 개념을 포기해야 할 것이라고 말할 때 나의 의견은 여러분과 완전히 일치할 것이다.
그렇다. 영감은 확실히 성경의 단어들과 관계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확실히 축자영감을 믿는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축자영감’이라는 말로 영감이 ‘오직’(only) 성경의 단어들에만 관계해야 하고 또한 성경 기록자들의 영혼에는 관계해서는 안된다는 견해를 의미한다면, 나는 여러분에게 나는 그런 의미에서의 축자영감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기를 원한다. 만약 여러분이 축자영감이라는 말로 하나님께서 성경 기록자들의 손을, 점(占)장이들에 손이 점판(占板)위에서 움직여진다고 하는 식으로 - 즉, 기록자들이 기록할 때 그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알지 못했다고 하는 식으로 - 움직이셨다는 견해를 의미한다면, 나는 그런 종류의 축자영감은 성경에서 창세기로부터 계시록까지 아주 명백히 나타나는 사실에 대해 전혀 정당히 취급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성경의 기록자들은 그들이 기록할 때 그들이 기록하고 있는 내용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들이 기록하고 있었던 모든 내용들을 항상 알고 있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나는, 예를 들어, 그 영감(靈感)된 기록자들이 그들이 기록할 때 알았던 것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더 영광스러운 성취를 가지고 있었던 신비스러운 예언의 말씀들이 선지서(先知書)들과 시편들에 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러한 신비스러운 말씀들의 경우에서도, 나는 거룩한 기록자들이 단순한 자동 기계들(automata)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들은 그들이 기록했던 내용의 충분한 의미를 알지 못했지만, 그들은 그 의미의 일부는 알고 있었고 또 그 충분한 의미는 그 일부분의 의미와 모순되지 않았고 그것의 영광스러운 성취이었다.
나는 성경 기록자들이 일반적인 자료들을 사용했다고 믿는다. 그들은 문서들을 참고했고, 그들은 조사탐구를 했고, 그들은 목격자들의 말을 들었다. 참으로 그들이 그러한 자료에만 제한되었다고 믿지는 않는다. 그들은 때때로, 그들이 기록했던 바와 같이, 새로운 초자연적(超自然的)인 계시 - 즉 이전에 다른 사람들에게 주어지지 않았고 그들이 기록하는 그 순간에 처음으로 그들에게 주어진 초자연적인 계시 -를 받은 자들이었다. 나는 또한, 때때로 심지어 그들이 일반적인 자료들을 사용했을 때나 그들이 그들의 기억력을 참작했을 때에도 그러한 수단들의 사용은 초자연적인 도움이 없는 인간적 지성에 가능한 방식보다 훨씬 초월하였다고 믿는다.
물론 어떤 의미에서 그러한 자료들에 대한 그들의 사용은 항상 인간적 지성에 가능한 것보다 훨씬 초월하였다. 잘못을 범하는 것이 인간이다(To err is human.). 그런데 이 사람들은 잘못을 범하지 않았다. 그들은 항상 일반적인 책들에서 나타나는 오류들로부터 초자연적인 방식으로 보호되었다.
그러나 내가 의미하는 것은, 때때로 인간적 능력들의 그러한 초자연적인 높임은, 단지 영감 받지 않은 저자들이 어떤 개개적(箇箇的)인 경우에서 오류를 피했을지도 모를 문제들에 있어서의 오류의 일정한 방지에 뿐만 아니라, 영감 받지 않은 저자들이 아마 오류를 피할 수 없었을 문제들에 있어서의 오류의 방지에도 존재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요한복음에 보도된 예수님의 이야기들을 생각해보자.
그 이야기들을 들었던 사람이 그렇게 오랜 후에 정확하게 그것들을 기억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 그러한 긴 이야기들의 확실성에 대한 반론으로 흔히 주장되었다. 그러한 반론은 이제 그것이 전에 했던 것처럼 그렇게 나는 더 이상 괴롭히지는 않는다. 우리 주님 자신께서 이 복음서 기록자를 포함한 사도들에게 그가 떠난 후 성령께서 그가 그들에게 말했던 모든 것을 기억나게 하실 것이라고 말씀하지 않으셨는가? 이 복음서의 기록자인 그 사랑받던 제자가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땅에 계셨을 때 말씀하셨던 것들에 대해 보도한 그 보도가, 도움 받지 않은 인간적 기억력에 가능한 것보다 훨씬 초월하고 부분적으로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던 그 성령의 신비스럽고 초자연적인 역사에 기인하나고 우리가 생각 할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이러한 생각들이, 성경 기록자들이 이 땅에서 말씀되어지고 행해졌던 것들을 보도하고 있었던 곳에서 일반적인 자료를 사용하였다는 사실을 흐리게 해서는 안 된다. 사실, 그들은 흔히 그들이 그러한 일반적인 자료를 사용했다는 사실을 크게 강조하였다.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고 우리가 도움 받지 않은 인간적 기억에 가능한 것보다 훨씬 초월하는 어떤 것을 발견하는 바로 그 복음서의 저자도 그가 예수님의 생애의 목격자라는 사실을 특히 강조하였다. 그는 그가 보고 들은 것들을 보도하였다. 그는 이것들이 후에 어떤 초자연적인 경험으로 그에게 계시(啓示)되었기 때문에 그것들을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 그는 예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무엇을 행하셨을 때에 거기에 있었다. 목격자인 그는 자기는 믿을 만하다고 주장한다. 심지어, 그의 말을 듣는 자들이나 그의 독자들이 그가 받은 것에 대해 어떤 초자연적인 영감을 믿게 되기 전에도, 그들은 그가 목격자의 위치에 앉게 될 때 사람들이 믿을 만한 증인(證人)을 믿듯이 그를 믿어야 한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던 500평제들의 증거에 호소한다. 그래서 복음서 기록자 누가는 그의 복음서 서문에서 그가 행했던 역사적 조사 탐구들에 관해 말한다. 그렇다. 성경 기록자들은 일반적인 자료들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들이 목격자들이었을 때는 그들은 그들이 보고 들었던 것에 대한 그들 자신의 기억을 사용했다.
- 후반부로 계속 -
[편집자 주 : 2022년 3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0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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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 2) “성경은 신자들이 그것을 하늘로부터 내려왔다고 확고하게 여기고 거기서 하나님의 살아 있는 음성 자체를 듣는 듯이 할 때 의당히 그들 가운데 완전한 권위를 갖게 된다.” 존 칼빈, 문병호 역 『1559년 라틴어 최종판 직역 기독교 강요 1』 (생명의 말씀사, 2020), p. 236. (역주).
주 3)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 1873-1957)의 저서 『조직신학』(크리스찬 다이제스트, 2000)에 서론, 제2부 교의학의 제 원리, 4장 성경의 영감, A. 역사상의 영감 교리부분은 이렇게 첫 시작된다. “계시와 영감은 서로 가장 가까운 관계에 있다. 특별 계시에 관한 한 둘 중 하나를 다른 것 없이 생각할 수 없다. 베드로는 우리에게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벧후 1:21)고 말해 주고 있다. 성경을 하나님의 특별 계시로 인식하는 것은 성경의 저자들이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었다고 확신하는 데 달려 잇다. 그렇지만 이 둘이 아무리 가까운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이 둘을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찰스 하지는 이 둘이 그 목적 및 효과면에 있어서 서로 다르다는 사실에 올바로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계시의 목적 곧 의도는 지식의 전달이다. 영감의 목적 곧 의도는 가르침에 있어서 무오성을 확보하는 일이다. 계시의 효과는 계시 받는 자를 지혜롭게 만드는 것이다. 영감의 효과는 가르침에 있어서 그를 오류로부터 보호하는 것이다.” 사람들이 주장한 영감 교리의 형태가 늘 같았던 것은 아니므로 그 역사를 개괄해 보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p. 155. (역주).
주 4) 요한복음 14장 26절
주 5)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말씀-계시를 어떤 방법으로 인간들에게 주셨는가? 베드로는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어떤 사람 자신의 해석으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예언은 절대로 인간의 뜻에 의해 유래되지 않았으며, 함께 낳으시는 성령님에 의해 인간들이 하나님으로부터 받아 말했던 것이다(벧후 1:20-21)라고 기록한다. 베드로는 이 진술에서 먼저 예언의 저작과 관련하여 두 가지의 부정 명제를 주장 한다. 첫째,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사건의 현재 상태에 대한 선지자의 평가나 또는 미래에 대한 선지자의 이해에서 출발하지 않았다. 다시 말해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선지자 자신의 이해로부터 나오지 않았다. 둘째,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인간의 뜻에 의해 동기 부여되지 않았다. 즉, 성경의 어떠한 예언도 단순히 인간적 충동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부정 명제를 사용하여 베드로는 성경의 궁극적인 시작 원인에 있어서 인간적인 요소를 전적으로 배제한다.” Robert L. Reymond 『최신 조직신학』 A New Systemic Theology of the Christian Faith (CLC, 2010), pp. 80-81. (역주)
주 6) 아모스 7장 14절
주 7) 존 그레샴 메이첸 박사의 이 책(1936년)이 씌여질 당시를 기준으로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