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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관호] 헌금, 어떻게 드릴 ㄳ인가?

복음뉴스 0 2022.10.07 14:37

제목 : 헌금, 어떻게 드릴 것인가?

: 정관호목사(뉴욕만나교회)

 

“1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2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3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4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5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고린도후서 8:1-5)

“6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8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6-8)

 

헌금생활은 신앙의 반영

오늘의 주제는 헌금, 어떻게 드릴 것인가?’입니다. 따라서 이 주제는 헌금에 관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목사인 저로서도 주일 예배시간에 이 헌금에 대한 설교하기가 무척 망설여지기도 하고 어렵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한마디로 헌금을 주제로 설교한다거나, 헌금을 강조하는 것은 제 스타일에 맞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생활 가운데 헌금생활은 매우 중요한 것이고 헌금생활은 곧 우리 자신의 신앙을 반영하는 것이기에 그리스도인이라면 반드시 헌금에 대한 성경적인 교훈을 받는 것은 필수적입니다. 헌금에 대해서는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이는 많은 교회들이 헌금에 대해 너무 지나치게 강조하거나 아니 지나치는 것을 넘어 강요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제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서는 교회당 이전을 위해서 또는 교회당 건축을 위해서 건축헌금 작정을 한 적이 있습니다. 또한 매년 연말이 되면 새해를 위한 선교헌금을 작정하기도 합니다. 건축헌금을 작정한 경우 소수의 교인들이 사정상(?) 미납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교인들이 적극 참여해주셔서 실제로는 초과달성한 경우가 있었습니다. 사실 작정헌금은 건축헌금이건 선교헌금이건 작정할 때 신중하게 작정할 일이며(부부일 경우 부부 합의하에), 작정한 헌금은 하나님 앞에서 작정한 것이므로 최선을 다해 반드시 내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저는 목사로서 할 수 있는 대로 앞으로 교회가 바른 교회가 되도록, 그리고 성도들이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도록 그렇게 목회하려고 힘쓰고 있습니다. 개혁주의신학(칼빈주의신학)에 입각한 개혁주의 신앙, 개혁주의 교회, 개혁주의 윤리를 이루려고 합니다. 현 시대에서 이와 같은 교회를 이루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지극히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래도 이것이 제 사명이요, 우리 교인들의 사명인 줄 알고 해 나가야 될 줄 믿고 있습니다. 저는 이를 위해서 우리가 자주 쓰는 교회 용어, 그러나 잘못 사용하는 용어 몇 가지는 고쳐서 사용해야 한다고 믿습니다. 특별히 성전이란 용어는 하나님의 백성들인 성도들(교회)이라든가, 그리스도인이 된 우리 자신에 대해서 사용해야지 교회당 또는 예배당 건물을 성전이라고 부르면 되지 않는다고 믿습니다. 따라서 성전건축헌금이란 말은 잘못된 표현이 아니겠습니까? 성전은 참 성전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 자신, 그리고 성도들 곧 교회를 가리킵니다. 그러므로 교회역시 건물이 아닌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임(그리스도인들)이 교회이지 교회당 건물 그 자체가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주보에 헌금하는 교인 명단을 넣을 것인가?

지금도 저희 교회 주보 뒷면에 헌금자 명단을 싣고 있는데, 제 나름대로 그 이유와 명분을 갖고 있습니다. 2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주보에 헌금자의 이름을 실어 넣음으로 성도들 사이의 교제를 이룰 수 있다는 점과 또한 하나님 앞에 예배할 때 헌금을 드려야 한다는 것을 가르칠 수 있는 교육적인 목적 때문입니다. 더 나아가 교회헌금의 투명성을 나름대로 보여줄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반드시 주보에 그 명단을 실어야만 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반면, 주보에 헌금한 분들의 명단을 싣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헌금했는지 안 했는지에 대해 쓸데없는 관심을 갖게 하지 않을 수 있고, 또 자기가 헌금했다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보여주려는 그런 잘못된 성향을 막을 수도 있습니다. 이는 마치 예배 시간에 헌금함을 돌려 헌금하도록 하는 일이나, 예배 시간 전에 예배실에 들어오면서 헌금궤에 헌금봉투를 넣도록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일들은 담임목사의 목회 방침에 따라 실시하면 될 일이라 생각이 됩니다.

 

예배의 요소들

우리는 주일마다 교인 전부가 공동체적으로 모여 주일예배를 하나님께 드립니다. 예배는 크게 3가지 필수 요소가 있습니다. 3가지의 필수 요소란 첫째, 설교를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말씀 둘째, 찬양 셋째, 기도입니다. 여기서 하나를 더 부가할 수 있다면 그것은 헌금일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헌금을 예배할 때마다 드려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다면 구역예배, 수요예배, 새벽예배(기도회) 등에도 빠짐없이 드려야 할 것입니다. 실제로 그렇게 실행하는 교회도 있기는 있습니다. 거기다 가정예배, 노회의 개회예배, 경건회로 갖는 예배에까지 다 드려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전체 공동체로 드리는 주일 예배에서 다함께 헌금으로 헌상하게 됩니다. 물론 헌금의 종류도 매우 다양한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는 십일조, 감사헌금, 주일헌금, 선교헌금, 건축헌금과 같은 헌금이 있습니다. 이 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인 것이 십일조일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드리되 십일조 외에 다른 헌금도 드립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에 다른 것을 다 포함해서 드리는데 곧 다른 헌금 없이 십일조만 드리는 데 그것은 바람직한 일이 아닙니다. 십일조 외에 별도로 주일헌금, 감사헌금, 선교헌금 등을 드리는 것이 옳은 줄 압니다. 저는 어려서부터 헌금에 대한 그런 교육을 받았는데 그것을 기쁘게 여기고 있습니다.

 

십일조에 대하여

먼저 십일조에 대해서 말씀을 드려야 하겠습니다. 우리 교회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십일조를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 십일조에 대한 논란은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입니다. 그 논란의 핵심은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성경적인가? 신약시대에도 십일조를 드려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선 우리들이 이 십일조 제도가 구약에서 유래했다는 사실부터 확인하고 넘어가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이 십일조는 아브라함이 제사장 멜기세덱에게 그 전리품 중 십분의 일을 바친 것부터 시작해서 구약의 선조들이 십일조를 드렸고, 또한 모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십일조를 드리라고 명령 가운데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십일조를 3차례에 걸쳐서 하나님께 드렸는데, 첫째는 제사장들을 비롯한 레위인들을 위해서, 둘째는 이스라엘의 3대 절기(유월절, 오순절, 장막절)시 예루살렘 방문을 위해서, 셋째는 가난한 자들-곧 고아, 과부, 나그네들-을 위해서 십일조를 드렸습니다. (이 셋째 십일조를 매년 드렸는지 3년에 걸쳐 3번에 나눠 드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습니다.) 여하튼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들 수입(재산이 아닌)의 십분의 삼, 적어도 23.3%가량을 하나님께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신실하게 믿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렇듯 하나님께 많은 것으로 드렸습니다. (10%, 23.3% 또는 30%)

 

십일조의 오늘날의 적용

그렇다면 문제는 이 구약의 십일조 제도가 오늘을 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부활의 구속 사건이후) 신약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되느냐 하는 점일 것입니다. 마태복음 23:23에서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질책하면서 화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는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정의와 긍휼과 믿음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십일조)도 행하고 저것(십일조의 정신인 정의와 긍휼과 믿음)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우리 주님의 교훈을 따라 십일조 정신(spirit)과 십일조의 의미를 잘 새기면서 십일조를 드려야 할 것입니다. 여기서의 십일조를 제한적인 것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성취(십자가와 부활)이전의 구약 시대의 십일조로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혹시라도 여전히 십일조가 구약의 제도이므로 거기에 얽매일 것이 없다고 주장하는 자가 있다면 우리는 구약에 비추어 오늘의 헌금 생활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구약시대에도 하나님의 백성들은 십일조, 정말 신실한 자는 십분의 삼 또는 23.3%를 드렸습니다. 그들 모두 적어도 십분의 일을 드렸습니다.

 

그렇다면 구악시대를 마치고 신약시대라는 이 큰 은혜의 시대에 접어든 우리는 구약시대의 하나님 백성들보다 더 많이, 더 크게 하나님께 드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구약시대의 사람들은 오실 메시아를 바라보고 믿음을 지니고 살았지만, 이제 신약시대의 성도들은 오신 메시아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하나님 나라의 실체 가운데서 복된 은혜의 삶을 살고 있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이루어진 구속의 큰 은혜를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큰 구원의 은혜를 받았다면, 또 받고 있다면 우리는 더 크게 하나님께 더 많은 것을 드리고, 더 크게 하나님께 순종하는 삶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G. Christian Weiss는 그의 참된 그리스도인 되려면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할 때 구약시대보다 적게 드려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 어떤 그리스도인들은 부끄럽게도 주님께 겨우 십일조밖에 드리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 십일조조차 안 드리는 자도 얼마나 많습니까!) 저는 여러분에게 이렇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십일조를 드리십시오. 그러나 십일조란 이름으로 헌금하기를 원하지 않는다면 십일조 그 이상을 드리십시오.

 

한 신앙인의 십일조생활

여러분은 이 십일조에 관한 록펠러의 이야기를 들으신 적이 있을 것입니다. 록펠러가 어렸을 때 그는 스스로 일해 번 돈 $1.50을 갖고 집에 돌아왔습니다. 이때 록펠러의 어머니는 그에게 말했습니다. “네가 이 돈의 십분의 일, 10%를 하나님께 드렸으면 좋겠다. 그리고 앞으로도 버는 돈의 10%를 하나님께 드려라.” 록펠러는 어머니의 말씀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십일조를 드렸고, 평생 이 십일조 드리는 일을 지속했습니다. 그 후 록펠러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첫 수입 $1.50에서 십일조를 드리지 않았다면, 그 후 100만불 수입이 생겼을 때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드리지 못했을 것입니다. 자녀에게 십일조를 가르치십시오. 평생 주님의 청지기가 될 것입니다.”

 

바른 헌금생활

그렇다면 우리들이 이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을 어떻게 하나님께 드려야 하겠습니까?

 

첫째, 할 수만 있다면 이 헌금은 자신이 속해 있고 자신이 신앙생활하고 있는 본 교회에 드리십시오.

본 교회에 등록이 되어 있고 본 교회에 다닐 경우 어떻게 하든지 최선을 다해 본 교회를 위해 헌금하는 것이 옳습니다. 이것이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헌금생활입니다. 그러나 정말 교회 재정에 부정이 있는 경우, 특별한 교회 사정으로 헌금을 드릴 수 없는 경우 일정기간 헌금을 유보해 두었다가 교회가 정상화된 후 모아둔 헌금을 본 교회에 다시 드릴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더 악화되어 해결될 가능성이 전혀 없는 경우에는 구제 등 선한 사업에 헌금을 사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마 이때는 교회를 바꿔야 할 형편이 될지도 모릅니다.

 

둘째,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위해서는 그리스도인다운 바른 신앙생활을 하도록 하십시오.

어떤 교인들(아니 대다수의 교인들)은 헌금할 때 자신이 이렇게까지 헌금하니 하나님께서 내가 헌금하는 것의 30, 60, 100배로 되갚아 주실 것으로 믿고(?) 그렇게 헌금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일 $100을 헌금했으면 $10,000을 되받을 것으로 그렇게 믿고 헌금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헌금은 장사가 아닙니다. 투자가 아닙니다. 더 나아가 흥정이 아닙니다. “하나님, 내가 이렇게 드렸으니 하나님은 이렇게 되돌려 주셔야 합니다.”라는 하나님을 압박하는 강제적인 요구가 아닙니다.

 

이런 것이 다름 아닌 기복신앙입니다. 참된 신앙의 소유자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와 날마다 베푸시는 은혜에 감사해서 하나님께 드립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되 또한 넉넉히 채우시는 것은 하나님의 , 하나님의 주권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감사하게 하나님께 바친 후에 더욱더 하나님의 주권과 섭리를 믿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면서 살아야 합니다.

 

십일조와 기타 헌금을 드리는 일은 손쉬운 일이 아닙니다. 특별히 요즈음처럼 어려운 경제생활 가운데서, 쪼들리는 생활 가운데서 헌금하는 것은 용이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더욱 더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이여 우리의 일터, 직장을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과 건강을 주옵소서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요한 웨슬레는 이렇게 가르쳤습니다. “최선을 다해 벌고, 최선을 다해 저축하라. 최선을 다해 주라.” 우리는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여기 최선이란 말에는 바르게, 지혜롭게라는 뜻도 포함되어져 있습니다. 개같이 벌어 정승같이 쓰라는 우리나라 속담이 있는데, 여기 개같이란 뜻은 수단, 방법 가리지 않고라는 뜻으로 이해하면 정말 곤란합니다. ‘열심히, 바르게, 최선을 다해, 지혜롭게, 성실하게란 뜻으로 받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쓰는 것도, 하나님께 드리는 것도 바르게 해야 하지만, 버는 것도 바르게 해야 합니다. ‘부끄럼 없이벌어야 합니다. ‘정당한 방법으로벌어야 합니다. 그렇게 해서 자신의 가정도 든든히 세워나가고, 교회에도 힘이 되고, 이웃에게도 유익이 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자기 가정을 돌보고 책임질 수 있어야 하며, 다른 사람들에게 정직한 사람, 책임감 있는 자로 나타나야 합니다. 빌린 것 있으면 최선을 다해 갚도록 하며, 못 갚을 경우, 그에 대한 상황과 대책도 빌린 분에게 알려야 합니다.

 

다음과 같은 성경 구절을 찾아보십시오.

가르침을 받는 자는 말씀을 가르치는 자와 모든 좋은 것을 함께 하라”(갈라디아서 6:6)

우리는 기회 있는 대로 모든 이에게 착한 일을 하되 더욱 믿음의 가정들에게 할지니라”(갈 라디아서 6:10)

 

셋째, 하나님께 헌금할 때는 기쁜 마음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자원하는 마음으로 하십시오.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십시오. 마음에 정한대로 하고 정말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십니다.

 

“(마게도니아 교회 성도들은)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저희가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하였느니라”(고린도후서 8:2-3)

이것이 곧 적게 심는 자는 적게 거두고 많이 심는 자는 많이 거둔다 하는 말이로다 각각 그 마음에 정한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하나님이 능히 모든 은혜(구제)를 너희에게 넘치게 하시나니 이는 너희로 모든 일에 항상 모든 것이 넉넉하여 모든 착한 일을 넘치게 하게 하려 하심이라”(고린도후서 9:6-8)

 

우리 교회 헌금봉투 겉면에는 이런 글귀를 적어놓은 적이 있습니다. 이 글귀는 아주 오래 전에 어느 권사님이 다른 교회 주보에 실린 글을 제게 전해 주어서 제가 일부 수정하여 옮겨 놓은 것입니다. “이 헌금은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예물로 하나님의 나라와 교회를 위한 헌신의 표시입니다.” 십일조를 비롯한 헌금은 대표성을 갖고 있습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그 나머지는 내 것이니 내 마음대로 써도 된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받은 것, 우리에게 있는 것이 다 다 하나님의 것, 하나님의 소유임을 인정하고 그 일부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헌금을 드릴 때는 나의 전부를 드립니다. 내 자신을 드립니다라는 뜻으로 드려야 합니다.

 

우리의 올바른 신앙생활, 올바른 청지기생활, 올바른 헌금생활을 통해 하나님께는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를 위해 헌신과 충성과 봉사를 다하는 여러분 모두가 다 되기를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 2022년 9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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