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네 탓, 내 탓
글 : 박시훈 목사 (뉴욕함께하는교회)
뉴욕과 뉴저지 일원의 많은 교회들이 “두 달이나 되는 긴 여름방학을 어떻게 보내야 하나?”라는 고민에 빠진 성도들의 가정에 도움을 주고자 약 5~7주간의 여름학교(Summer School)를 한다. 우리 교회도 3년 전부터 매해 여름학교를 실시하고 있다. 그리고 교회 규모가 그리 크지 않고, 돌봐야 하는 학생 수가 많으니 담임목사인 나도 예외 없이 여름학교 기간 동안은 스탭으로 섬겨야 한다.
며칠 전 여름학교 학생들을 데리고 수영장을 다녀왔다. 혹시라도 모를 사고에 온 신경을 곤두세우고 온종일 물 안팎에서 아이들을 돌봤다. 그리고 집에 돌아오니 말 그대로 녹초가 되어 입에서 나도 모르게 터져 나오는 말이 있었다. “체력이 예전 같지 않아. 아 힘들어 죽겠다.” 아내도 ‘그렇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있던 차에 같이 수영장 봉사를 다녀왔던 남자 집사님과 통화를 하게 되었다. 첫인사로 “집사님 수고 많으셨습니다. 많이 피곤하시죠?”라고 했더니, “괜찮은데요”라고 한다. “아직도 힘이 남았고, 솔직히 수영장에 더 있으라면 있을 수도 있었다”고 한다. 충격이었다. 심지어 그 집사님은 나와 나이 차이도 별로 나지 않는데 말이다. 전화를 끊고 ‘왜 똑같은 일을 하고도 집사님과 나는 체력과 피로도에서 차이가 나는지?’ 고민해 보았다. 이유를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다. ‘운동’이다. 그 집사님은 평소 꾸준히 운동을 하며 건강과 체력 관리에 신경을 쓰는 분이셨고, 난 언제 제대로 된 운동을 해봤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세월과 나이의 문제가 아니었다. 꾸준히 운동하지 않는 내 자신의 생활 태도에 문제가 있었다. 그래놓고 엉뚱한 세월과 나이 탓만 하고 있었다.
창세기 3장에 보면, 인류의 죄가 어떻게 생겨났는지 보여준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께서 먹지 말라고 하신 선악과 나무 열매를 간교한 뱀의 꼬임에 넘어가 먹게 된다. 하나님께서 범죄 후 숨어있던 아담에게 “내가 네게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열매를 먹었느냐?” 물으니, 그는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라고 대답했다. 자기 잘못만 인정하면 되는데, 교묘하게 하나님과 아내를 탓하는 못난 모습이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의 후손인 현대인들에게는 뭐든 탓하고 보는 그릇된 태도가 유전된 듯하다.
어떤 분이 쇼핑몰 주차장에서 나오면서 옆자리에 탄 아내에게 반대편 차로에서 차가 오는지 안 오는지 물어봤다. 아내는 안 오는 것 같다고 했다. 그래서 주차장에서 나왔는데 사실 차가 오고 있었다.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운전자인 남편은 아내에게 불같이 화를 냈다. “똑바로 봐야지 큰일 날 뻔했잖아.” 그런데 엄격히 따지면 그건 아내를 탓할 게 아니다. 도로를 살피는 것은 운전자의 몫이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언젠가 여성단체에서 윤락녀들을 상대로 설문 조사를 하면서 ‘자신이 타락한 원인이 어디에 있다고 생각하는지’를 물었다. 부모, 친구, 가난, 남자 등의 대답이 나왔는데 ‘나’라고 대답한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그들을 비판하려는 것이 아니다. 누구든 삶에 원치 않은 모습이나 결과에 대해서 남 탓하고 보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남편은 아내를, 아내는 남편을, 부모는 자식을, 자식은 부모를, 성도는 목회자를, 목회자는 성도를, 성도끼리, 동료들끼리 등등 수없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라고 한다.
남 탓만 하는 것이 아니다. 삶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을 탓하는 경우도 얼마나 많은가? 실제로 요즘 가장 많이 하고 듣는 말이 ‘코로나 때문에’이다. 물론 코로나 팬데믹은 우리에게 많은 피해를 주고, 또 많은 것을 앗아갔다. 하지만 코로나 이전에는 모든 삶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맘에 들었던가? 완벽했는가? 아니다. 그때도 우리는 삶의 환경과 상황과 조건이 맘에 들지 않아서 탓했다. 곧 할 수만 있으면 무언가 탓할 것을 찾고 탓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속담도 있다. “자기 집 두레박줄이 짧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집 우물 깊은 것만 탓한다.” 그렇게 누군가 혹은 무언가를 탓하는 태도는 나에게는 없을까? 정직히 돌아보면 아니라고 말하기 힘들 것이다.
그럼 왜 사람들은 탓을 할까? 탓을 한다는 것은 책임을 전가하는 것인데 그러고 나면 상황은 명료해지고, 내 책임과 잘못은 없어져 마음이 편안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기저기서 탓하는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린다. 그런데 내 마음 편하자고 탓하며 살아온 인생의 결과는 어떤가? 해결된 문제는 없고, 자기 발전도 없고, 관계만 나빠지지 않았는가? 곧 탓하는 삶은 잠시 누리는 마음의 평안 외에는 유익한 게 하나 없다. 내 탓을 찾는 게 훨씬 유익하다.
‘내 탓을 찾자’는 것이 ‘나 때문에’라며 자책하며 살자는 말은 아니다. 오히려 심리학에서는 지나친 자책은 삶을 해롭게 한다고 한다. ‘내 탓을 찾자’는 것은 자책이 아니라, 내가 소홀했던 자기 의무와 책임을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마치 내가 운동을 하지 않아서 체력이 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처럼 말이다.
건강 다이제스트 인터넷 판에 실린 부부 상담 전문가 황보유순 교수의 글에 의하면, 이혼한 부부가 이혼 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이 ‘객관적으로 배우자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던 것’과 ‘가정에 소홀했던 것’이라고 한다. 이혼할 당시에는 상대방에게 그 원인이 있다고 탓을 했는데 시간이 지나 냉정하게 돌아보니 의무와 책임을 다하지 못한 자신에게 원인이 있었다는 것이다.
성경에 나오는 사울 왕은 다윗 때문에 자신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불행하게 되었다고 탓을 하고 그를 죽이고자 쫓아다녔다. 그러나 사울 왕이 하나님께 버림을 받고 불행하게 된 것은 다윗 때문이 아니라 그가 하나님 앞에 하지 말아야 할 행동을 하고, 불순종했기 때문이다. 다윗을 탓할 게 아니라, 자신을 탓해야 했다. 반면에 다윗은 억울하게 사울에게 10년 세월을 쫓겨 다녀야 했지만, 그를 탓하지 않았다. 오히려 자기가 해야 할 일 곧 하나님을 경외하고 의지했다. 그 결과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입게 되었다고 고백한다. “주를 두려워하는 자를 위하여 쌓아 두신 은혜 곧 주께 피하는 자를 위하여 인생 앞에 베푸신 은혜가 어찌 그리 큰지요 (시편 31편 19절).”
내 아버지는 평생을 목회하다가 은퇴한 목사이다. 은퇴를 하고 한참 지난 후에 아버지가 나에게 ‘이제 목회가 무엇인지 아시겠다’고 하셨다. 무슨 말씀이신지 여쭤보니, 목회를 할 때는 쉽게 성도들을 탓하고 원망도 많이 했는데 돌아보니 내가 더 사랑으로 이해하고 품어 줬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이제 와서 후회가 되신다고 한다. 하지만 내가 지켜보았던 아버지는 누구보다 교회와 성도들을 사랑하고 품어주셨던 훌륭한 목회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더 잘할 수 있었던 지난날의 후회가 남으신 것이다. 그렇게 최선을 다한 목회도 훗날 후회가 남거든, 우리가 지금처럼 탓만 하고 내 의무와 책임을 게을리하면 훗날 더 많은 후회만 남지 않을까?
초대 문화부 장관을 지낸 ‘이어령 박사’가 남긴 유작 가운데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이란 책을 최근에 읽고 큰 감동과 도전을 받았다. 무엇보다 암과 시한부 판정이란 인생의 가장 극한 고통과 힘든 시간 속에서 탓하지 않고 끝까지 책을 쓰려는 자기 의무와 책임에 집중한 삶이었다.
죽음보다 확실한 운명이 어디에 있는가? 그런데 그 죽음의 시간은 누구도 알 수 없다. 그날이 언제 오더라도 후회가 남지 않도록 탓하는 것을 멈추고, 내 몫의 의무와 책임을 살피고 다하여 허락된 삶의 시간 속에 자기 발전과 행복을 누리는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 2022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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