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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성경 대(對) 인간 권위 (2)

복음뉴스 0 2022.07.22 17:13

제목 :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7-2성경 대(인간 권위 (2) (THE BIBLE VERSUS HUMAN AUTHORITY)

 

: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7-2. 성경 대() 인간 권위 (2)

(THE BIBLE VERSUS HUMAN AUTHORITY) 

 

7-1장 요약 : 우리는 매우 심각한 의견의 차이(difference of opinion)가 교회 안에 나타난 시대에 살고 있다. 성경에 대한 이해 또한 어떠한가! 성경은 진리(truth)에 대한 그리고 생활(life)에 대한 우리의 표준(標準, our standard)이다. 진리는 상대적(relative)이 아니고 절대적(absolute)이다. 만약 그것이 성경과 일치한다면 우리는 그것을 인정한다. 만약 그것이 성경과 불일치한다면, 그것이 어떤 외적인 성공을 이룰지라도 그리고 심지어 그것이 우리의 피상적인 인간적 판단으로 볼 때 그 신봉자들에게서 여기저기에서 어떤 외형적인 덕()(apparent graces)을 가져오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우리는 그것을 반대한다. 우리의 표준은 유동적인 표준이 아니다(Our standard is not a flexible standard). 나는 성경이라는 표준을 사용하고 있는가?

 

7-2장 성경 대() 인간 권위(2): 둘째로, 우리는 그릇되게 예수님의 교훈혹은 그리스도의 교훈이라고 불리우는 것을 우리의 표준으로 삼는 거절 거절한다. 이 점에서 나는 특히 오해를 받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참으로 예수님의 진짜 교훈은 완전히 참되다고 생각한다. 나는 예수님께서 사실에 관해 말씀하셨던 모든 것은 참되며 그의 명령들은 완전히 유효(有效)하다고 생각한다. 단지 내가 지적하는 것은, ‘성경과 구별하여예수님의 교훈을 그들의 권위로 삼는 자들은 사실 예수님의 교훈을 전혀 붙잡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만약 여러분이 성경의 권위를 거절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예수님의 교훈에 대해 참되다는 주장을 할 수 있겠는가?

성경 대신에 그들이 예수님의 교훈이라고 부르는 것을 그들의 권위로 삼는 자들의 기본적(基本的)인 생각은 무엇인가? 나는 그 질문은 대답하기에 어렵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예수님은 일차적으로 선생이셨고 우리는 그가 그의 말과 그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자기가 실행한 것과 동일한 형태의 종교를 실행하는 법을 가르치셨기 때문에 그를 존경한다는 생각이다. 이러한 사고방식에 따르면, 예수님은 첫 번째 그리스도인이셨기 때문에 기독교의 설립자이셨다. 다른 사람들은 석가모니나 공자를 위대한 선생과 모범으로 존경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석가모니나 공자와 달리 우리의 선생과 모범으로 간주하기 때문에 그리스도인들이다.

이러한 생각은 물론 성경과 근본적으로 반대된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진짜 예수님 자신의 교훈과도 근본적으로 반대된다. 예수님께서는 성경에 의하면 그리고 그 자신의 교훈에 의하면, 이미 관찰한 바와 같이 일차적으로 무엇을 말씀하기 위해서가 아니고 무엇을 행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는 우리에게 종교(宗敎)와 윤리(倫理)의 참된 일반적 원리들을 가르치기 위해서가 아니고 그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우리를 죄에서부터 구속하기 위해서 오셨다.

그의 교훈은 사실 매우 귀하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것이 얼마나 놀랍게 귀한가! 그러나 그것이 성경의 나머지 부분과 분리될 때 그 귀중성은 완전히 상실된다. 만약 우리가 그것을 창세기부터 계시록까지 성경 전체에 흐르는 초자연적 계시의 그 웅대한 흐름과의 유기적 관계를 떠나서 생각한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가 그것을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에서 절정을 이룬 그 위대한 구원 사역과 분리시킨다면, 우리는 그것의 핵심과 요지를 상실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성경과 구별된 예수님의 교훈이 권위의 좌소(座所)라는 이러한 생각을 거절한다.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 자체에 크게 욕을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예수님을 단순한 종교적 선생, 하나의 세계적 종교의 창시자의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예수님의 교훈이 그들의 권위라고 말함으로써 출발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만약 그들이 그 문제에 관해 심사숙고한다면, 그들의 입장을 수정하지 않을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참되다고 간주하지 않는 많은 것들을 명백하게 말씀하셨다. 그러나 만약 예수님께서 참되지 않은 많은 것들을 말씀하셨다면, 그의 교훈이 어떻게 권위가 있을 수 있겠는가?

이 사람들 중 매우 많은 사람들이, 더 혹은 덜 명료하게, 그것은 예수님의 교훈 그대로가 아니고 - 혹은, 그들이 표현하는 바대로, 그의 교훈의 문자’(letter)가 아니고 - 권위적이라고 그들이 간주하는 그의 교훈의 기본적인 정신’(spirit)이라고 대답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 논하고 있는 성경의 권위에 대한 세 번째의 가능한 견해에로 우리를 이끈다. 그것은 그들의 권위가 예수님의 정신이라고 말하는 자들의 견해이다.

물론 그들이 예수님의 정신()’이라는 구절을 사용할 때, 그들의 의미는 그 구절에 대한 성경적 의미와 전혀 다르다. 성경이 그 말을 사용할 때는 성령 곧 복된 삼위일체의 제 삼위를 의미한다. 그러나 그들의 정신’(spirit, )이라는 단어를 대문자로가 아니고 소문자로 말하고, ‘예수님의 정신이라는 말을 단순히 예수님의 생활의 내적인 성질(temper) 혹은 특질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한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인 것은 이 견해의 옹호자들의 의하면, 예수님께서 2,000년 전에 이루신 어떤 특별한 사건 때문이 아니고 심지어 그가 말씀하신 어떤 특별한 명령들을 우리가 복종하기 때문이 아니라 우리가 그의 생활의 내적인 정신을 취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의 생활의 정신은 여러 세대 동안 전달되어 내려왔다. 그것은 일종의 전염(傳染)이다. 그러한 정신을 지녔던 사람이 그것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한다. 그러한 정신을 가지기 위하여 그는 예수님에 관한 어떤 특정한 견해를 가질 필요가 없다. 사실 그는 예수님께서 생활하신 적이 있다는 것을 알 필요도 없다. 그가 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생활의 독특한 정신을 그의 생활 속에 취하여 들이는 것이다. 그것이 그에게 어떻게 전달되는지, 그가 어떤 특정한 그리스도인으로부터 그것을 받는지, 그가 그것이 예수님의 정신인 것을 알고 있는지 혹은 예수님에 대해 들어본 적이 있는지 하는 것은 문제가 안 된다.

그러므로 비록 어떤 선교사가 그의 말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도록 허락을 받지 못할지라도 그는 적어도 그의 생활로 그를 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전파하는 것과 구별되는 단순히 살아있는 그리스도에 의해서 참된 선교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그가 그들에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관한 혹은 예수님께서 믿으신 하나님에 관한 어떤 내용을 말하도록 허락을 받지는 못할지라도 그와 접촉하게 되는 사람들은 그로부터 예수님의 정신을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사람들이 그러한 선교사들을 통하여 예수님의 정신을 취한다면, 무엇을 더 바라겠는가?

그것의 논리적인 결론에 도달된 이상과 같은 것이 성경과 구별하여 예수님의 정신을 진리와 생활의 시금석으로 삼는 견해이다.

기독교적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이 떤 점에서 잘못인가? 의심할 것 없이 여러 가지 점에서 그렇다. 그러나 그 핵심은 그것이 죄의 사실을 무시한다는 점이다. 그것의 옹호자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정신을 취하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취한다면, 우리는 예수님께서 사셨던 그 삶을 살 수 있고 그러면 모든 것이 잘 될 것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말하는 것과 매우 다르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예수님과 달리 자신의 죄책(罪責)과 죄의 세력 아래 있다. 하나님의 의로우신 진노 아래 속하고, 아무런 선()도 행할 수 없다. 예수님께서 그의 보혈(寶血)로 그를 구속하시지 않았다면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죄를 범한 적이 결코 없는 사람들에 의해 매우 그럴듯하게 가능하다고 간주되는 식으로 우리가 예수님의 정신을 취할 수 있을까? 아니다. 우리는 우리가 허물과 죄로 죽어 있었다는 것과 오직 우리가 하나님의 영의 신비스런 역사(役事)로 살게 되었기 때문에 거룩한 예수님의 참된 제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다.

이 두 가지 사실은 독특한 기둥들이다. 우리가 그 중의 하나를 다른 것과 혼동하는 한 나는 우리의 사고(思考)에 어떤 분명함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지 않는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은 단지 예수님의 정신을 붙잡는 것이고 우리는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다는 것을 알지 못하고도 그리고 새로운 출생에서의 하나님의 영의 초자연적인 역사가 없이도 그러한 정신을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예수님을 선생과 모범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을 먼저 구주로 생각해야 한다. 그가 어디에서 우리에게 우리의 구주로 제시되는가? 대답은, ‘성경 전체에서 이다. 이것이 성경이 왜 우리에게 귀한 책인가 하는 이유인 것이다.

나는 성경의 권위의 대용물로서 제안되고 있는 다른 것들에 대해 좀 더 자세히 말할 시간이 없다. 그러나 나는 말을 끝마치기 전에 이것들 중의 한 가지에 관해 한 두 마디만 말하기를 원한다. 그것은 교회의 선언들과 규정들을 진리와 생활의 시금석으로 보는 견해이다.

권위의 좌소(座所)에 대해서 이러한 견해를 고수하는 자들은 보통 여러 말로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지 않는다. 그들이 말하는 - 어구(語句)로가 아니라면 암시로 - 바는 성경은 살아있는 교회에 의해 권위 있게 해석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실상 이렇게 말한다.: “한 사람이 어떤 교회의 목사나 회원이 될 때, 그 교회의 프로그램을 지지하는 것은 그의 의무이다. 그는 그것이 성경에 반대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걱정할 것 없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이 특별한 문제에서 그의 할 일이 아니다. 그는 교회의 회의들의 판단에 그의 판단을 복종시켜야 한다. 그는 그 회의들이 그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도록 해야 하고 그가 지지하는 메시지를 그것들의 변하는 결의 사항들에 일치시켜야 한다.”

그러한 견해와 완전히 구별하여 우리는 성경을 그리고 성경 만을 진리와 생활의 시금석으로 삼는다. 우리를 위해 성경을 해석하는 살아있는 권위란 없다. 우리는 모두 스스로 그것을 읽어야 하고 우리가 읽을 때 하나님께서 우리를 도와주시기를 구해야 한다. 교회의 결정들의 권위에 근거하여 어떤 프로그램을 지지하라고 우리에게 명령하는 교회는, 오직 하나님께만 속하는 권위를 유오(有誤)한 인간을 위해 빼앗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식의 다른 권위들을 거절하고 이 한 권의 책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거리낌 없이 복종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 아닌가? 그렇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시대의 전체적인 조류(潮流)와 철저히 충돌하게 한다. 그러나 비록 그것이 위험한 일이지만, 그것은 또한 매우 복된 일이다. 살아게신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매우 복된 일이다.

그 말씀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하는 것은 또한 매우 복된 일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그것을 다른 이들에게 전파할 의무와 큰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 의무와 그 특권은 특히 목사들에게 속한다.

여러분 목사들은 - 만약 지금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는 분들이 있다면 - 주일 아침에 설교할 때 무엇을 하는가? 여러분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종교적 경험들에 관해 말하는가? 여러분은 그들에게 여러분의 능숙한 권면으로 유익을 주는가? 여러분은 어떤 인간적 조직체를 부흥시키는 자들인가? 만약 이런 일들이 여러분이 하는 것이라면, 여러분은 매우 풍성한 보상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빠뜨린 한 가지 일이 있다. 여러분은 훌륭한 웅변가일지도 모르지만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목사들이지는 못할 것이다. 여러분은 놀라운 구변을 가지고 사람의 말을 전파할지 모르나 결코 하나님의 말씀을 전파할 수는 없다.

오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다른 종류의 목사들을 보내주옵소서! 하나님이시여, 나의 형제들을 다른 종류의 목사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이시여, 우리에게 명상과 기도의 처소로부터 그들의 강단으로 나오는 목사들을, 그리스도의 종이지 인간의 종이 아닌 목사들을, 비록 겸손하지만 만왕의 왕의 대사(大使)인 목사들을, 그들이 열려져 있는 성경 뒤에 서서 그것의 복된 말씀들을 설명하기 때문에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와 같이 진실 되게 그리고 정직하게 미가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사심을 가리켜 맹세하노니 여호와께서 내게 말씀하시는 것 곧 그것을 내가 말하리라 하고”(왕상 22:14) 말할 수 있는 목사들을 보내어 주옵소서

 

[각주] J. G. 메이첸은 1914623(33) 뉴저지 주() 프레인스보로(Plainsboro)에서 목사 임직식을 거행했다. 임직 시험과 메이첸의 설교(본문: 시편 211, 제목: “떨며 즐거워할지어다.”)1시간 30분 배정받았다. 임직식을 마치고 헤리스 E. 커크 박사는 앞날을 축복하며 글을 보냈다. “사랑하는 그레샴에게, 내가 자네의 목사 안수식에 공헌할 수 있도록 해주어서 자네에게 무척 감사하네. 우리는 모두 우리의 기도가 온전히 응답을 받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을 자네는 잘 알고 있네. 하나님이 자네를 인도하사 그 문제에 대해 호의적인 결론을 내리게 하시리라는 것을 나는 처음부터 추호도 믿어 의심치 않았다네, 그처럼 보기 드문 능력을 지닌 사람이 오늘날 설교라는 숭고하면서도 어려운 일에 헌신하는 것을 보면서 나는 크게 고무되었네. 살아 계신 주님에 대한 자네의 절대적인 충성, 역사적 기독교에 대한 자네의 예리한 평가, 그리고 자네가 학문을 대단히 좋아하는 것 등으로 자네가 교회에 엄청난 도움이 되리라는 것을 나는 확신하네. 나는 자네를 나의 친구와 교인의 한 사람으로 생각해온 것을 실로 자랑스레 여기며, 우리가 함께 하는 일에서 자네의 우정과 헤아림을 나의 가장 귀중한 축복 가운데 하나로 여길 걸세. 더없이 진심 어린 애정으로 항상 나를 믿어 주기 바라며, 헤리스 E. 커크메이첸의 전기의 책인 Ned B. Stonehouse, J. Gresham Machen: A Biographical Memoir (Grand Rapids: Eerdmans, 1955), pp. 197-201. 참고.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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