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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창조주 하나님 (1)

복음뉴스 0 2022.11.17 18:14

제목 : 이민철 목사의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창조주 하나님 (1)
: 이민철 목사
(맨해튼성도교회)

 

 

 

9-1. 창조주 하나님 (1)

(GOD, THE CREATOR)

 

 

 

9-1장 창조주 하나님(1): 우리는 성경이 처음부터 끝까지 교리적이라는 사실을 알았다(We have seen that the Bible is doctrinal through and through). 교리는 단지 그리스도인의 경험이 표현되는 필연적으로 변하는 형식이라고 하는, 오늘날 대유행하는 회의주의적 생각(the skeptical notion)을 성경은 조금도 지지하지 않는다. 이러한 회의주의와는 달리, 성경은 생활의 기초를 단호히 진리 안에 둔다. 성경에 의하면 기독교는 교리와 구별(區別)된 생활이 아니다. 또 생활의 변하는 표현으로서의 교리를 가지고 있는 생활이 아니라, 교리 위에(upon a doctrine) 세워진 생활이다.

성경이 생활의 기초로 삼는 이러한 교리는 하나의 고립된 교리가 아니다. 단순한 일련(一連)의 교리들도 아니다. 하나의 교리 체계이다. 만약 성경이 많은 다른 체계들을 가지고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전체적으로 참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 장로교회에 속한 모든 목사들과 장로들이 동의한 임직서약(任職誓約)은 성경에서 가르쳐진 그 교리의 체계를 아주 정확히 표현하고 있다.

 

나는 이 사실이 크게 강조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람들이 성경의 교훈의 한 부분을 나머지 부분들과의 연관을 무시하고 취할 때 혹은 그들이 성경이 교훈하는 것을 제시함에 있어서 공백들을 둘 때, 큰 해()가 생긴다. 성경이 고립된 진리들을 제시하는 것보다 훨씬 그 이상의 일을 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성경이 하나님의 진리 체계를 제시한다는 것을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리고 이 체계를 부분적으로가 아니고 전체적으로 관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가 여기에서 함께 이 체계를 공부할 때, 무엇보다도 그것은 인간이 고안한 체계가 아니고 하나님께서 제시하신, 즉 그의 거룩한 말씀에서 은혜롭게 계시하신 체계라는 것을 기억하자. 우리는 성경이 담고 있는 계시된 진리의 이 큰 체계에 대한 우리의 공부에 있어서 어디에서 시작해야 할까? 우리는 성경이 시작하는 데서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경이 세상의 창조주와 통치자(統治者)이신 하나님에 대해 가르치는 내용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다른 곳에서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자들이 오늘날 많이 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인간적 생활에 대한 고찰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많이 있다. 사실 이러한 사람들은 흔히 우리에게 이것이 우리가 단지 시작할 뿐만 아니라 또한 마쳐야 할 곳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것이 참으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의 전부라고 말하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한다. :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비슷하시다는 것뿐이다. 우리는 우주가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혹은 우주의 운행과정에서 우주를 통치하는 어떤 하나님이 존재하시는지 하는 것을 알 필요가 없다. 이러한 것들은 형이상학(形而上學)에 속하지, 종교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가 하는 문제에는 흥미가 없고 단지 그를 선한 분으로 생각하는데 흥미가 있을 뿐이다.”

 

이상과 같은 것이 그리스도와 비슷한 하나님’(Christlike God)이라는 문구(文句)를 사용하는 자들의 견해이다. 보통 사용되는 이러한 문구는 그리스도인의 귀에 거슬린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비슷하신것이 아니고 예수님 자신이 하나님 이시다고 믿는 자들의 귀에 거슬린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그러한 견해를 제시하기 위해 사용된 용어는 놔두고라도, 그 견해 자체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아는 것은 단지 그가 인간 예수 안에서 발견되는 도덕적 탁월한 성품들을 지니고 계시다는 것뿐이라는 이러한 생각의 잘못된 점은 무엇인가?

 

적어도 두 가지 사실이 잘못되어 있다. 첫째로, 그것은 예수님께 대해 심히 모욕적이다. 이 말은 처음 듣기엔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지 하나님께서 예수님과 비슷하다는 것뿐이라고 주장하는 견해가 예수님께 대해 욕을 돌린다는 것은 이상하게 생각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그것은 예수님께 대해 극히 욕을 돌린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그것이 예수님께 대해 모욕적인 까닭은 그것이 예수님의 교훈과 모범에 있는 가장 심오한 사실들을 멸시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생활의 가장 중심에는 바로 인간 예수님의 도덕적 생활이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전부를 우리에게 말한다고 말하는 자들이 심히 경멸하며 거절하고 있는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견해가 있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하나님께서 우주의 창조주와 통치자라는 것을 믿으셨다. 그리고 그 믿음은 그가 믿는 모든 것들의 기초에 속하였다. 그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를 참새 한 마리라도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10:29)고 하셨다. 예수님에 의하면 들에 백합화를 옷 입히시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고,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햇빛을 비추는 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

 

예수님께서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었던 자들이 단지 형이상학이라고 거절하는 그러한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가지고 계셨다는 것에는 추호의 의심이 있을 수 없다. 그는 그의 교훈과 그의 생활의 가장 기초에 창세기의 첫 절에 나오는 그 거룩히 계시된 형이상학을 두셨다. 그가 말씀하신 모든 것과 함께, 그가 행하는 모든 것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1:1)는 그 큰 진리 위에 기초해 있었다. 예수님에 의하면, 하나님께서는 그의 뜻의 계획을 따라 모든 일들이 일어나게 하시는 우주의 창조주요, 절대적인 통치자이시다. 여러분은 하나님에 대한 이러한 견해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여러분이 사실 그대로를 보는 역사가라면, 여러분은 그것이 확실히 나사렛 예수님께서 가지고 계셨던 견해이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할 것이다.

 

그뿐만 아니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그가 세상에 나타나기 전에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한 참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고 생각하셨다. 그는 그들이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참된 지식을 구약성경으로부터 가졌다고 생각하셨다. 우리는 이미 이 짧은 연속 강연의 이전의 이야기들에서 예수님께서 구약성경을 하나님의 말씀’(Word of God)으로 간주하셨다는 것과 그가 구약성경에 대한 그러한 확신을 그의 교훈뿐만 아니라 그의 생활의 가장 중심에 두셨다는 것을 관찰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그러한 확신을 거절한다면 어떻게 여러분이 예수님을 높이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 만약 여러분이 구약성경에 들어있는 하나님에 대한 계시는 가치가 없고,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것은 단지 인간 나사렛 예수의 도덕적 성품에서 발견된다고 생각한다면 여러분이 호소하고 있는 예수님께서 여러분이 그렇게 존경하는 그러한 도덕적 성품의 기초에 여러분이 경멸적으로 거절하는 구약성경에 대한 견해와 하나님에 대한 견해를 두셨다는 사실을 어떻게 취급할 것인가?

 

예수님께서는 물론 자신을 하나님의 계시(啓示)하는 자로 그리고 그의 인격 안에서 하나님에 대한 계시가 되는 자로 제시하셨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확실히 지상의 우리 주님과 함께 있었던 제자들이 우리 주님으로부터 갑자기 그들이 이미 가지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라는 말을 들었다는 의미가 아니다. 우리 주님께서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가 의미하셨던 내용의 열쇠는 요한복음 1:18의 말씀에서 발견된다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1:18).

 

구약 성경을 읽는 경건한 독자들은 하나님을 알고있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볼 수 없는 분이신고로 그들은 그를 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하나님이시며 동시에 독생자 즉 영원한 아들이신 분께서 육신(肉身)이 되셨다. 그리고 그가 육신이 되셨기 때문에 그는 실제로 사람들의 눈으로 보여 질 수 있었다. 그를 보는 사람은 아버지를 본다. 왜냐하면 그 분 자신이 아버지와 실체(實體)에 있어서 하나이시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in Christ), 실제로 하나님을 보려고하는 인간들의 열망은 만족되었다.

 

여하튼 간에, 확실히 분명한 것은 모든 곳에서 예수님께서는 그의 제자들이 구약성경으로부터 가졌던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전제하셨다는(presupposed) 사실이다. 그는 그의 제자들이 그러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신다. 그리고 그러한 지식 위에 기초하여 그는 그들을 그의 교제로 말미암아 더 충만하고 더 영광스러운 지식에로 인도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에 관하여 알아야 할 필요가 있는 모든 것은 인간 나사렛 예수의 도덕적 성품에서 발견되고, 하나님께서 세상의 창조자와 통치자이신가 하는 문제는 우리가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경멸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그것은 우리가 그 분 자신께서 그의 생활과 그의 교훈의 가장 기초에 두셨던 것을 거절함을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러한 견해는 단지 예수님에 대해 모욕적인 것만이 아니다. 그것은 또한 하나님께 대해 모욕적이다. 사람들이 그들은 하나님이 능력이 있으신가, 그가 세상의 창조자나 통치자이신가하는 문제에는 흥미가 없고, 오직 그가 선하신가 하는 문제에만 관심이 있다고 말할 때 그것은 참으로 하나님에 대해 얼마나 저급한 견해인가!

 

하나님에 대한 그러한 견해가 참으로 정당한가? 우리가 광풍들과 시련들과 수많은 대적들 가운데서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8:31)라는 성경말씀을 인용했을 때 우리 하나님의 무한하신 능력을 믿는 우리의 모든 믿음은 잘못된 것이었는가? 이사야가 별이 총총한 하늘을 바라보며 너희는 눈을 높이 들어 누가 이 모든 것을 창조하였나 보라 주께서는 수효대로 만상을 이끌어 내시고 각각 그 이름을 부르시나니 그의 권세가 크고 그의 능력이 강하므로 하나도 빠짐이 없느니라”(40:26)고 말했을 때 그가 잘못되었는가? 예수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들의 백합화를 옷 입히시는 그 분을 믿게 하셨을 때 그리고 그가 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12:32)고 말씀하셨을 때 그는 잘못되셨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철학자들은 이런 혹은 저런 대답을 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인의 가슴 속에 있는 대답은 명백하다. 그리스도인의 가슴(Christian heart)은 이러한 모든 창백한 추상적 개념들(all these pale abstractions)을 집어 치우라고 외친다. 하나님의 선하심에 대해서는 말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그의 능력을 박탈하는 이러한 이상한 이론을 집어 치우라!

 

각주 1) 미국 웨스트민스터 신학교 변증학자 코넬리우스 반틸(Cornelius Van Til, 1895-1987) 교수는 모든 학문분과가 하나님을 전제해야만 하고, 동시에 전제(presupposition)는 최선의 증명이다. 변증학은 이것을 밝히려는 특별한 노력을 기울인다. 이것이 변증학의 주된 과제라고 할 수 있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렇게 하므로 변증학의 방법론이 (신학의) 다른 분과의 방법론보다 더 중립적인 것이라 할 수는 없다. 변증학의 주된 목적들 중의 하나는 중립성(neutrality)이란 불가능하며, 사실상은 그 누구도 중립적이지 않다는 것을 밝히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변증학이 조직신학에 의해 우리에게 주어진 체계적 진리의 원의 바깥 주위에 있어서 그 체계적 진리를 변호하기 위한 것이라고 결론짓는다.”(All the disciplines must presuppose God, but, at the same time, presupposition is the best proof. Apologetics takes particular pains to show that such is the case. This is its chief task. But in so doing, it is no more neutral in its method than are the other disciplines. One of its main purposes is to show that neutrality is impossible and that no one, as a matter of fact, is neutral. We conclude then that apologetics stands at the outer edge of the circle of systematic truth given us by systematics in other to defend it.) Van Til, Edited William Edgar, An Introduction Systematic Theology, NJ, P&R, 2007. p. 19. 참조.

 

각주 2) 이러한 질문에 대한 이하의 취급은 메이첸의 책 믿음이란 무엇인가?What Is Faith?, 1925, p. 60이하의 내용을 참조.

 

* 2022년 10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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