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이윤석]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라

복음뉴스 0 2022.08.13 09:33

제목 : 예수님의 인격을 신뢰하라(요한복음 21-5절)

: 이윤석 목사(NY 부르클린제일교회)

 

 

I. 사도요한의 총체적인 목적은 무엇인가?

2031절에 선포하듯이 생명이다. 이것은 어떤 생명인가? 1010절에서 말씀한대로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의 생명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심으로 세상이 넘치는 풍성한 생명을 누리게 되었다는 것이다. 1장에서는 세 부분으로 나누어서 예수님의 인격을 소개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가장 먼저 해야만 될 분명한 일은 나사렛 예수께서 어떤 분인가를 이해하는 것이다.

 

1. 1장이 그 이야기를 분명하게 선포하며, 이는 성경의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1) 제일 첫 번째 부분에서 그가 누구신가를 선포하는 여기서부터 복음이 시작된다

11절부터 이 분을 소개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이 하나님이시니라.”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라는 심오한 진리를 선포하신다. 여기서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분명하게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에게 주려고 오셨던 그 생명에 대해 아무 것도 알 수 없다. 그래서 우리가 반드시 경험하도록 그 목적을 따라 우리를 초청하신다: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1:11,12). 바로 그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그의 생명을 충만하고 풍성하게 즐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117절에 이 분과의 비교가 나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이것이 바로 신약의 핵심이기도 하다.

 

2) 1장의 두 번째 부분 19-34절에서는 주님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셨다는 것을 강조한다

세례요한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주어진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나를 보내어 물로 세례를 주라 하신 그 이가 나에게 말씀하시되, 성령이 내려서 누구위에든지 머무는 것을 보거든 그가 곧 성령으로 세례를 주는 이인 줄 알라 하셨기에, 내가 보고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였노라 하니라” (1:26, 33,34).

 

3) 1장 마지막 부분에서는 우리 주님께서 자신을 어떻게 부르셨는가를 말한다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 요셉의 아들 나라셋 예수니라”( 1:45). “또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이 열리고 하나님의 사자들이 인자 위에 오르락 내리락 하는 것을 보리라 하시니라”(1:51). 그리고 뒷 부분에서는 하늘나라로 올라가신 후에 그들에게 주신 메시지를 전할 사람을 어떻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는가를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건축될 교회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이를 위하여 다양한 복음 전파자를 부르신다.

 

2. 이제 우리가 2장을 살펴보면서 마음 속에 간직할 것이 있다

1) 성자 예수께서 지금도 활동하신다

우리 주님께서 이 땅에 육체로 계실 때 가르치시고 활동하셨던 것처럼, 오늘날도 그가 계속 가르치시고 활동하신다는 사실을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 이것은 2천 년 전에 일어난 사실이 아닙니까?" 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이것은 성경을 하나의 역사로 읽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약의 총체적 관점은 예수께서 이 땅에 그 일을 행하셨으며, 또 그 일을 시작하셨을 뿐 아니라, 지금도 마치지 않으셨다는 것을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천국에 승천하사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우편에 앉아 계셔서 지금도 계속 활동하신다!

 

2) 사도행전이 역사의 현장 속에서 그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들은 사도행전을 성령행전이라고 부르길 원한다. 성령이 행하신 것이기에 그렇게 불릴 수 있다. 그러나 사실은 부활하신 주님의 행전으로 부르는 것이 더 적합하다. 오순절 성령께서 임하신 바로 다음(3),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고쳐주었을 때, 사람들이 놀라서 베드로와 요한에게 경배하려 할 때, 베드로가 뭐라고 말하는가? “이스라엘 사람들아 이 일을 왜 기이히 여기느냐? 우리 개인의 권능과 경건으로 이 사람을 걷게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주목하느냐?”(3:12). 대답은 무엇인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 곧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그 종 예수를 영화롭게 하셨느니라”(3:13). 그리고 다음 장에서 말한다: ”그 이름을 믿음으로 그 이름이 너희 보고 아는 이 사람을 성하게 하였나니 예수로 말미암아 난 믿음이 너희 모든 사람 앞에서 이같이 완전히 낫게 하였느니라“(3:16). 너희가 십자가에 못박고 거절했던 바로 그분이 이 일을 하셨다고 선포한다. 이것은 지금도 살아계신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강조하고 있다.

 

3) 그래서 우리가 성경을 읽고 들을 때, 목적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어떤 목적인가? 예수께서 그때 어떤 일을 행하셨기 때문에, 지금도 그 일을 행하고 계시며, 나아가 우리를 위해 어떤 일을 하실 수 있는가를 우리에게 말씀해주고 있다는 분명한 지속성을 가지고 읽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때나 지금도 동일하시기 때문이다. 오히려 지금 예수 그리스도는 영화롭게 되셨기 때문에 우리를 통해 더 많은 일을 하신다. 성경은 결코 역사만이 아니라, 오늘도 우리를 조명하시고 설득하시고 믿게 하시는 그리스도의 영의 활동하심이다. 우리 문제와 곤란한 상황에 빠졌을 때 살아있는 말씀으로 다가온다는 것을 믿자!

 

II. 그러면 이제 갈릴리 가나 혼인잔치에서 주께서 어떻게 문제를 해결하셨는가?

이 사건을 읽을 때, 우리 주께서 갈릴리 가나에서 있었던 결혼식에 참석하시어 모든 상황을 변화시켰듯이 오늘날 이곳에서도 무한히 크고 엄청난 그 무슨 일을 우리를 위하여 행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여기서 주님의 의도가 무엇인가? 요한이 밝히듯이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갈릴리 가나에서 행하여 그의 영광을 나타내시매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하는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주님이 자신의 영광의 표적으로서 물로 포도주를 만드신 것이다.

 

표적(기적)은 예수님의 인격에 완벽한 예증을 주고 있다

기적은 초자연적인 활동이다. 자연법을 파괴하지는 않지만 초월적인 영역 활동이다. 기적은 더욱 빠른 순간에 모든 일이 완성되는 것이며, 전 과정이 빠르게 단축된 것이다. 그런데 기적에는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 그것은 창조의 요소가 있다. 왜 그런가? 주께서는 물을 가지고 포도주로 변화시키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초자연적이며 창조적이시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신 모든 것은 믿는데 기적은 믿기 힘들다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은 결코 믿음이 아니다. 만일 우리가 하나님을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으로 믿는다면, 그분에게는 결코 제한이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믿는 것이다. 그분은 정상적이고 질서 정연한 방법으로 행동하시기를 선택하시지만, 그가 원하실 때 자신의 영광과 능력을 나타내시되 특별하고 예외적인 방법으로 하신다. 우리는 물로 포도주를 만드는 기적에만 묶일 수 없다. 더 큰 것을 보아야 한다. 주님께서 이것을 행하신 것은 자신이 누구인가를 보여 주시고 어떤 일을 행하실 수 있는가를 알게 해주신 것이다.

 

2. 주님의 인격에 대하여 기독교는 단지 교훈들을 모아놓은 것이 아니다

1) 기독교는 인격과의 관계이다. 우리는 늘 이것을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다. 중요한 문제는 항상 주님과 우리 자신과의 관계에 대한 것이다l. 그래서 2절에 "예수와 그 제자들도 혼인에 청함을 받았더라"는 말씀이 나온다. 예수께서 그곳에 계셨다. 사도 바울이 이것을 강조한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을 알려 하였노라(3:10).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3).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니”(1:21). 성경의 핵심 내용은 언제나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님이시다. 신약 전체의 목적은 우리 앞에 계신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분을 우리 앞에 나타내 주시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늘 질문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와 어떤 관계에 있는가?“

 

2) 그러므로 우리는 2장에서 그 인격을 발견하는대로 그를 바라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위대함을 살펴보자. 그는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오셨다. 목수의 일을 하셨다. 일반적인 훈련을 받지도 못하셨다. 그러나 그분이 자신을 나타나실 때마다 모든 상황을 압도하셨다: “예수께서... 아무도 모르게 하시려 하나 숨길 수 없었더라”(7: 24).

 

3) 또 그 인격에게는 신비가 있었다

그분을 아는 것이 실질적이며 또 우리가 그분에게서 축복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실질적이며 우리가 오늘도 그분께 복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3. 본문을 살펴보자

예수님은 마리아에게 나셨다. 그런데 어머니라 부르지 않는다. “여자여(숙녀여)!” 라고 르셨다.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하셨다(4). 이것이 과연 무슨 뜻인가?

 

1) 예수님은 자신이 메시야 의식으로 충만하셨다

자신이 누군지 아셨다. 무엇 때문에 이 땅에 오셨는지, 자신이 특별한 분이심을 아셨다. 그분은 참 인간이셨다. 그러면서 완전히 다르셨다. 주님이 자신에 대하여 어떻게 말씀하시는지 잘 들어보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20:17). “너희는 아래서 났고 나는 위에서 났으며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아니하였느니라”(8:23).

 

2) 예수님은 우리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알고 계신다는 사실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각과 욕구와 상상력까지 다 알고 계신다. 그래서 요한은 분명하게 말한다: 유월절에 예수께서 예루살렘에 계시니 많은 사람이 그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믿었으나, 예수는 그 몸을 저희에게 의탁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친히 모든 사람을 아심이요 또 친히 사람의 속에 있는 것을 아시므로 사람에 대하여 아무의 증거도 받으실 필요가 없음이니라(23-26). 여기서 어머니가 예수님께 저희에게 포도주가 없다고 말씀할 때, 예수님은 마리아의 마음 속에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을 즉각적으로 아셨고, 그녀는 숨길 수가 없었다.

 

3) 그분은 우리들을 매우 친밀하게, 개별적으로 모든 것을 아신다

우리의 두려움과 염려, 문제와 불안과 우리 안에 들어 있는 것을 다 아신다. 여기에 우리의 위로가 있다. 동시에 주님께서 말씀으로 우리를 향해 역할을 하신다. 무슨 역할을 하시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 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을 판단(감찰)하시나니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우리의 결산을 받으실 이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4:12). “주께서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시며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통촉하시나이다”(139:2). 당신은 삶에서 그것을 의식하면서 살아가는가? 당신의 신앙은 어떤 것인가? 당신이 가진 전제들, 주장들, 생각들에 대해 이와 밀접한 관계를 가졌는가? 그가 지켜보시는 가운데 살고 있다는 의식이 있는가? 당신이 상상하는 그것까지 알고 계신다는 것을 의식하며 오늘을 사는가? 이것이 우리 신앙생활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4) 더 나아가 그분은 우리에게 큰 관심을 가지고 계신다

우리 주님은 그의 어머니를 교정시켜 주셨다. 이제 우리를 교정해 주신다. 그는 언제나 우리를 바라보고 계신다. 그리고 책망과 징계를 하신다. 오늘도 우리를 유익하게 하시려고 이런 일을 행하고 계신다. 그런데도 이 말씀을 들으면서도 그것을 못 알아 들으면 이것은 정말 어리석은 것이다. 이렇게 주님은 책망하고 교정하실 뿐 아니라, 동시에 우리에게 용기를 주신다. 예수께서 대답하신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4). 그에 대한 마리아의 답변이 무엇인가? 그녀가 재빨리 알아차렸기에, 어머니는 종들에게 말한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5). 마리아는 책망을 받아들였다. 그녀는 무엇인지 큰 일이 일어날지 알았다. 주님이 그렇게 하신 목적은 무엇일까? 예수님의 동생인 유다는 분명하게 밝힌다: “능히 너희를 보호하사 거침이 없게 하시고 너희로 그 영광 앞에 흠이 없이 즐거움에 서도록 하는 것”(24)이 지금도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이다.

주님께서 이 땅에 내려 오사 살다가 죽으시고 장사되신 후 3일만에 다시 살아 승천하셨다. 무엇 때문인가? 우리를 흠없게 하여 하나님 앞에 인도하시려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를 징계하시고 그의 받으시는 아들마다 채찍질 하신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12:6). 우리는 그분의 손 안에 있다. 그러므로 책망 받을 준비를 해야 한다. 그분은 우리를 밀기도 하고 또 멈추게도 하실 것이다. 오늘도 말씀을 대하면서 우리가 이런 방법으로 살고 있는가?

 

5) 마지막으로 우리는 주님의 능력이 놀랍다는 사실을 목격하게 된다

우리는 그것을 전파한다. 우리는 결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지금 믿고 있는 우리에게도 여전히 복음은 믿는 모든 사람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1:16). “그리스도 예수는 하나님의 능력이시고, 하나님이 지혜시다”(고전 1:24).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인가? 그분이 지금 여기에 계시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거룩하신 구세주의 영광 가운데 소망이 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안에서 사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왜 그 풍성한 생명을 즐기지 못할까? 잘못에 빠져 있기 때문이다. 우리 주님께서 모친 마리아의 잘못을 반복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책망하고 계심을 들으라!

 

4. 예수님의 인격을 마리아와의 관계 속에서 살펴보자

1) 마리아는 주님의 능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무엇을 말씀하시든지 그대로 하라고 말했다. 어떻게 마리아가 잘 알았는가? 이미 천사가 30년 전에 다 말해주었다. 마리아는 누가복음 1-2장의 놀라운 사건들과 말씀을 마음에 지키어 생각했다(2:19). 세례요한의 신기한 출생 이야기도 안다. 시므온의 에언도 마음에 간직하고 있다. 안나의 말도 기억한다. 마리아는 이 모든 것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 예수께서 12살 되셨을 때, 요셉과 마리아는 예수님을 책망했지만, 도리어 예수께서는 뭐라고 하시는가?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2:49). 마리아는 이 사실들을 결코 잊을 수 없었으리라!

 

2) 나아가 마리아는 그의 능력을 확신했지만, 문제가 있었다

포도주가 떨어지고 모자랐을 때, 마리아는 예수님의 능력을 확신했다. “반드시 예수는 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확신한 것이다. 그래서 요청한 것이다. 문제는 마리아가 여기서 주제 넘는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무엇인가를 해 주기 바란다.” 이 때 예수님은 즉시 어머니를 책망하신다: “여자여! 숙녀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3) 여기서 주님이 강조하신 것이 내 때라는 말로 강하게 표현되었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당신의 때와는 다릅니다.” “당신이 생각할 때 제가 이것을 부탁하자마자 즉시 이행해야 하겠지만, 아직 나의 때는 이르지 못하였나이다.“ 여기 주님의 때라는 것은 물론 죽음의 때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이 때는 모친이 제시한 것을 자신이 실천해야 할 때가 아직 이르지 않았다는 뜻이다. 마리아는 그가 누구신지를 기억하는 이상, 먼저 깨달았어야 했다. 그분은 마리아 자신의 태를 빌리신 하나님이시다. 그분은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위하여 보내심을 받았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할 일과 일할 때를 말씀해 주셨다. 그러므로 마리아가 더 이상 간섭해서는 안 된다. 그녀는 명령할 권리가 없다. 피조물의 위치를 지켜야만 했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의 책망의 본질이다.

 

(2) 마리아는 엄청난 특권과 영광을 위해 선택된 여자이지만, 죄인이다

그녀는 죽어야 마땅한 죄인 중의 한 사람일 뿐이다. 그러나 로마 캐돌릭은 이것을 놓치고 그녀가 원죄없이 출생했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여자여!”는 모든 사람과 다를 바 없이 자연적인 영역에 속한 사람이라는 말이다. 그래서 주님은 지금 마리아에게 책망을 하고, 이것을 깨닫도록 촉구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바로 신약 전체에서 말하는 진리이다. 마리아는 겸손하게 자기를 알고 겸비하게 가만히 있어야 했다.

그런데 우스꽝스럽게도 그 책망받는 내용을 천주교가 전하고 가르치고 있다. 그들은 말한다: ‘마리아에게 기도하세요.’ ‘마리아는 우리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습니다.’ ‘그녀는 동정심이 많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멀리 게십니다.’ ‘그러므로 그분께 아들에게 설득해 달라고 기도하세요.’ ‘마리아로 하여금 행동을 촉구할 수 있도록 기도하세요’. 바로 그런 생각이 예수님이 책망하신 내용이다. 그렇게 하지 않도록 미리 말씀하신 것인데, 로마카톨릭은 그 책망받을 내용을 가르치고 행하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이것은 제가 할 일입니다. 저에게 남겨 두세요. 방해하지 마세요. 어떤 일을 하라고 강요하거나 말씀하지 마세요.”

 

3) 주님은 마리아의 의사와는 별도로, 하나님의 의지로 일하신다

그분께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며 또한 허용하지도 않으신다. 그러므로 마리아에게 기도하면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는 천주교의 말은 신성모독이다. 주님의 인격과 사역을 훼손하는 것이다. 결코 예수님 외에는 중재자(중보자)가 필요하지 않다.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고 늘 자기가 중보기도자라고 말하고, 교회마다 이 용어를 잘못되게 강조하고 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거룩성과 완벽한 구주되심의 영광을 탈선하는 것일 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땅에 계실 때나 지금이나 똑같으시다. 여전히 부드러우시며 사랑과 동정심이 많아서 우리 연약함을 어루만져 주신다(4:15).

우리는 때로 건방진 태도로 주님께 나아가 명령을 내리는 죄를 범하지 않는가? “우리에게 이것을 허락해주세요. 꼭 가지고 싶습니다우리 주님은 육신적인 모친의 무모함을 책망하셨다. 혹시 우리는 지금 응답해주시지 않고,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해주지 않는다고 괴로워하고 낙심하지 않는가? 매우 잘못된 태도이다. 마리아와 우리가 가져야 할 믿음의 태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주권자이시며, 그분은 자신의 뜻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은 활동하실 때와 방법을 결정하시는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를 위하여 가장 좋은 것이 무엇인가를 명확히 알고 게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무모한 죄를 조심해야 한다. 그의 손 안에 우리 자신을 맡기자!

 

4) 그런데 주님은 마리아를 책망했지만, 거절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당신의 요청 때문에 내가 그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라고 말했을 뿐이다.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내가 그 일을 하겠습니다. 그러나 당신의 요구, 당신의 명령 때문이 아니라, 내가 원하는 때, 내가 원하는 방법으로 그 일을 하겠습니다!” 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나아가며]

오늘도 우리 주님은 책망과 더불어 위로의 말씀을 주신다: “그러나 여호와께서 기다리시나니 이는 너희에게 은혜를 베풀려 하심이요 일어나시리니 이는 너희를 긍휼히 여기려 하심이라 대저 여호와는 공의의 하나님이심이라 무릇 그를 기다리는 자는 복이 있도다“(30:18). 우리는 주님이 힘이 있고 능력이 있음을 알고 있다. 그를 찬양하기 원한다. 그분을 더 알기 원한다. 성령충만 받기를 원한다. 그의 사랑으로 심령 가운데 충만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러나 성급함의 죄에 들어가지 않는가? 주님께 명령하는가? 이것은 우리의 축복을 늦추고 있는 셈이다. 결코 늦추도록 하지 말자.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아니하고 정녕 응하리라“(2:3). 불평하지 말자. 원망과 잘못된 요구를 멈추자. 마리아에게 주셨던 책망을 받자! 겸손하고 인내하며 그분을 바라며 기다리자! 우리는 단순히 마리아처럼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에 순종하자. 순종하며 사모하며 기도하며 기다리자! 예수께서 그의 때와 방법으로 일하시리라! 2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반드시 예수님의 인격이 드러나는 풍성한 생명을 체험하리라!

 

* 2022년 8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5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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