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⑥ 율법은 세상을 진단한다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우리가 율법에 대해 계속 살피는 것은 기독교의 삶과 복음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를 주기 때문이다. 실제 세상과 모든 인간의 가장 큰 문제가 무엇인가? 하나님이 그 사랑하시는 아들 안에서 우리 주와 구주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주시고 해주시는 일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이다. 교회의 본질은 바로 그 일에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게 있다.
인간을 평가하는 유일한 방법은 무엇으로 점검할까? 그것은 하나님과 가장 거룩한 그의 율법에 비추어 살펴보아야만 한다. 자신을 모르면서 남을 알 수 없다. 우리가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해야 하는데, 자신을 알려면 오직 하나님의 눈인 하나님의 율법에 비추어 살펴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인간을 만드실 때 이미 율법을 마음에 심어 주셨다. 그러나 인간이 타락하고 죄를 짓고 반역하여, 율법을 잊어버리고 떠나버렸기 때문에 모세를 통해 십계명의 형태로 다시 명확하게 주신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우리 그리스도인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 그럴까? 구원을 이해하려면 율법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첫째로 율법이 먼저 와서 하는 일을 모르면 은혜도 제대로 알 수 없다. 둘째 율법의 정죄함을 받아본 자만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뻐할 수 있다. 셋째 우리가 거룩하게 살아가는 일에 율법이 필요하다. 넷째 죄의 값의 깊이를 모르면 은혜의 기이함과 영광도 제대로 알 수 없다. 그래서 그 죄의 깊이를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은 율법 뿐이며, 그러므로 이것을 무시하면 신앙생활은 매우 위험하다.
이것은 교회 뿐 아니라, 온 세상이 들어야 할 메시지다. 오늘 이런 관점에서 율법을 제대로 보자. 율법의 대상은 온 인류이다. 오늘날 가장 필요한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현재 세상의 전적인 문제는 하나님의 율법을 무시하는데서 비롯되었다. 율법에 대한 철저한 무지 때문에 율법을 무시하고, 또 고의로 거부하는 교만한 불신앙 때문에 무시하고 있다. 이것이 인간이 하나님에게서 멀어지게 된 유일한 원인이며, 인간 본연의 자리와 하나님이 의도하신 원래 모습에서 멀어지게 된 원인이다.
이에 우리는 먼저 기본 원리를 알아야 한다. 교인이라도, 하나님 율법을 무시하면 어떻게 될까? 그는 전체적으로 배교의 상태에 빠지게 된다.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는 뜻이다. 하나님의 관점으로 살지 못하고 하나님 중심으로 살지 않는다. 교인일지라도 율법에 대해 무시하는 이는 예배에 참석해서 찬송은 부르는데, 하나님은 제대로 믿지 않는다. 그러니 매일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을 예배하지도 않는다. 개인적으로 기도도 하지 않고, 혼자 있을 때, 하나님 말씀도 읽지 않는다. 자신은 하나님을 믿는다고 생각하지만, 온 마음과 목숨과 뜻과 힘을 다해 예배할 것을 요구하시는 전능하신 하나님께 큰 모욕함이 된다. 이것은 위선이며 그의 현재에 세상에 살고 있는 상태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더 이상 하나님을 믿지 않고, 예배하지 않고 그의 영광을 위해 살지 않을 때, 무엇보다 율법을 무시할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1. 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하며 스스로 신이 되기 시작했다.
창세기 3장 1절에 뱀의 질문이 무엇인가? “ 하나님이 참으로 너희에게 동산 모든 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 하시더냐?”고 했다. 뱀이 말한다. “물론 하나님은 먹지 말라고 하셨지”. ” 그 열매를 먹는 날엔 너희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처럼 될 것을 아신거야.“ ”원래 너희는 하나님처럼 되어야 마땅한 존재거든“ 하와는 그 시험에 넘어가 버렸다. 그 이후 모든 사람도 그 시험에 넘어갔다. 우리들이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멈추는 순간 스스로 신이 된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그 결과가 무엇인가? 충돌이다. 스스로 최종 권위자가 되는 순간, 우리 마음은 자만심에 빠진다. 이것이 마귀의 성질이다. 그래서 서로 부딪치고 충돌하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결과이다. 신화에서 모든 신(이라는 자들)은 최고의 자리에 있고 싶어하고 지배하고 싶어한다. 예를 들어 순진한 어린 아이에게조차도 폭군의 모습이 있다. 자기 마음대로 생떼를 쓰면 된다고 생각한다. 관용이 없다. 훈육을 거부한다. 원하는대로 가지려 한다. 이것이 바로 죄의 결과이다.
이런 자만심이 삶의 전 영역에 퍼져 있다. 개인과 집단과 국가에 퍼져 있다. 왜 그런가? 하나가 높아지면, 다른 하나는 더 높아지려 들기 때문이며 충돌이 불가피하기 때문이다. 자만심과 그 기고만장한 자만심, 이것이 전쟁의 원인이다. 전쟁은 정치적이거나 경제적인 원인 때문에 일어나는 것 같지만, 순전히 신학적 이유 때문에 일어난다. 그것은 전적으로 죄 때문이다. 야고보서 4장 1절에 “너희 중에 싸움이 어디로부터, 다툼이 어디로부터 나느냐? 너희 지체 중에서 싸우는 정욕으로부터 나는 것이 아니냐?” 라고 묻고 있다. 이 정욕이 전쟁의 원인이며, 자부심과 자기 숭배가 그 정욕을 만들어 낸다.
2. 율법을 무시하는 결과, 하나님을 버리고서 완전히 잘못된 시각으로 모든 것을 보게 되었다.
인생과 역사와 인간의 위대함에 대해 잘못된 개념을 갖게 된다. 삶과 인생에 대한 생각, 역사의 목적과 역할에 대한 개념을 실종하고 만다. 사람들은 스스로 높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스스로 깎아 내리고 있다.
1) 다른 말로 오늘날 사람들은 생존에 더욱 매달리게 된 비극을 맞이하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에는 영웅이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없다. 왜 그럴까? 사람들이 각자 자기 삶을 유지하는데만 온 힘을 다하고 있기 때문이다. 싸울 가치가 있는 대의가 있다거나 목숨을 바칠 만큼 중요한 일이 없다. “죽는 것보다는 공산주의가 되는 것이 낫다”는 것이 다. 그만큼 생존이 중요하고, 죽음이 무섭고 끔직하다는 것이다. “자유인으로 죽느니 차라리 노예로 살겠다”는 것이다. 인간의 위대함에 대한 의식이 사라지며 이런 생각이 생기고, 계속 생존할 수만 있다면 종처럼 살아도 좋다!“ 는 것이다.
2) 그러니 낭만도 사라졌다. 요즘에 영화에는 낭만이 없고 생명이 없어져간다. 얼마 전 세계적으로 유행한 한국 영화가 [기생충]이다. 그 내용을 보면 생명이나 원칙에 더 이상 관심이 없다. 끔직하고 비루한 생존만 지속하려 든다. 그 원인은 철저히 신학적인 데 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을 떠나는 데에서 나왔다. 먹고 마시고 의식주와 성의 쾌락을 즐기며. 생존하는 동물과 같은 존재로 전락해가고 있다. 이것이 낭만도, 이상적 영웅도, 인생을 가치있게 만드는 요소들도 사라져 버리고 있는 이유이다.
3) 역사의 목적에 대해서나, 장차 하나님이 행하실 일을 향해 세상이 나아간다는 말이 들리지 않는다. 그저 생존만 지속하고 연장한다. 예를 들어, 결혼도 실험이다. 결혼에 대해서도 부도덕과 비관적인 견해를 가르치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다. 하나님과 율법에 무지한 탓에, 따라서 인간의 참된 가치도 모르는 탓에 계속 타락하고 있다.
3. 율법을 무시하는 결과, 불의가 경건치 않 음에서 나온다는 것을 모르게 되었다.
로마서 1장 18절에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하지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부터 나타나나니”라고 말씀한다. 사도 바울이 말하는 순서를 잘 보자. 경건하지 않음이 첫 번째이고 불의가 두 번 째이다. 이 순서가 아주 중요하다. 이 순서를 깨닫지 못하고 기억하지 못한 것이 지금의 실수이다. 그래서 사람이 진화되었다는 다아윈 (Darwin)이나 모든 도덕이 필요없다는 헉슬리 (A. Huxley)나 사회가 진화한다는 이런 인물들에 대해서 신앙의 확신이 없어 그들을 책망하지 못하고 그들의 가르침이 교회 메시지까지 침투해 들어오도록 내버려 둔 소심한 교회가 되어가고 있다.
1) 그들의 가르침이 무엇인가? 성경에서 초자연적이고 기적적인 요소들을 다 없애고 하나님을 실제 살아계신 분으로 믿지 않더라도, 훌륭한 성경의 도덕적, 윤리적 가르침은 얼마든지 지킬 수 있잖아요?“ 하는 것이다. 그들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과 그가 행하신 기적, 속죄의 죽음, 육신의 부활을 문자 그대로 믿지 않아도, 구약과 산상설교의 가르침은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 신학을 버려도 도덕과 윤리는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도덕을 개혁하고 이런 저런 이상을 순수하게 지키려는 단체들이 생겼다. 교회에서도 그랬다. 사람들은 진심으로 도덕과 신앙의 분리가 가능하다고 믿었다. 과연 그럴까? 확실하게 불가능한 말이다. 도덕과 신앙은 나뉘어질 수 없다. 왜냐? 경건을 버리는 즉시 불의가 들어오기 때문이다. 이것이 필연적인 순서다. 사람들의 비극은 성경을 너무나 모르는 데 있다. 모든 것이 성경 안에 있다.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이런 원리를 무시한 채 교육과 도덕적인 교육과 문화를 통해 인간에게 필요한 모든 일을 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과연 그럴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왜 그럴까?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어디서 그런 기준을 찾을 수 있을까? 오늘의 미국 교육의 현장을 보라. 하나님도 몰아냈고 십계명도 몰아냈는데 대체 무엇을 기준으로 삼겠다는 것인가?
2) 물론 이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은 각자 의견을 존중하라는 것이다. 의견이 기준이라는 것이다. 모든 개인이 똑같이 중요한가? 그러면 과연 도덕적 기준이라는 게 있을까? 서로 존중하고 서로 인정하니까, 그 결과 서로 다른 도덕을 가르치고 경쟁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쾌락주의는 즐거움이 중요하다. 기쁨과 행복을 숭배한다. 그래서 나와 우리에게 최대의 행복을 주는 것은 다 옳다고 믿으라고 가르친다. 이들의 주장이 무엇인가? 반드시 행복을 우선시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행복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행복이 최고의 목적이다. 복이 전부다.
3) 조금 더 나아가면 공리주의(Utilitarianism) 이다. 이런 세상에서 우리가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현상을 유지하고 작동시키는 일이라는 것이다. ‘좋은가?’ ‘나쁜가?’ ‘옳은가?’ ‘그른가?’ 따지지 말라는 것이다. 전반적으로 효과가 있는가를 묻자는 것이다. 효과가 있으면 선한 것이다. 밀(John Stuart Mill)이란 사람이 그렇게 가르치는데 유럽과 미국이 받아들였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아니었다. 우리 삶에 유익한가? 효과가 있는가? 이것만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4) 이를 약간 바꾼 것이 편의주의(Opportunism)이다. 이것을 옹호하는 사람들은 절대적 기준 같은 건 없다고 한다. 이것이 효과가 있는지 판단해야 하고,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한다고 말한다. 곧 목적이 올바르고 분명하면 어떤 수단을 사용해도 정당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주교 예수회나 많은 단체나 국가가 채택하는 이론이다. 이런 생각들이 사회복지 분야에서도 큰 인기를 얻고 있다. 그래서 조금 지나면 ‘힘이 정의다’가 된다. 내 힘으로 원하는 목적을 이룰 수만 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해도 된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 때문에 히틀러(Adolf Hitler)가 나왔다. 그가 따른 사상이다. 편의주의는 파시즘(Pacism)의 철학이다. 그들은 대외적으로 반공(反共)을 내세워 독재를 행한다. 어떤 체제가 옳다고 판단되면 그 체제를 강제로라도 하는 것이 필요하다. 그러면 고의적인 거짓말과 속임수를 국가의 합법적 수단으로 옹호하게 된다. 근래의 대통령 선거의 과정 속에서 이런 생각이 승리한 것 같다.
속담에 “사랑할 때와 전쟁할 때는 모든 것이 정당하다”는 것이 있다. 과연 그럴까? 아니다. 그것은 거짓말이다. 우리에게는 지켜야 할 절대 기준이 있어야만 한다. 이렇게 하나님 율법을 등지는 순간, 기준은 사라지며, 결국 의도 사라진다. 편의주의는 다음과 같이 작용해 왔다. 교육과 자녀를 훈육하는데 [벌]이라는 개념이 사라져 버리고 있다. 기준이 없는데 어떻게 훈육하겠는가? 상황을 훨씬 더 복잡하게 만든다.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모든 기본적이고 영원하고 절대적인 기준을 버린 탓에 도덕기준이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뀐다는 것이다. 이것이 현대 문제다. 보라! 지금 20년 전에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동성연애가 버젓이 정상인보다 더 옹호 받고 있다. 길거리에서 더 힘이 있다. 이것이 법이다. 미디어들에 최악의 저주와 욕들이 버젓이 등장한다. 폭력적인 언어들이 드라마를 차지하고 있다. 이제 누가 뭐라고 말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워낙 만연이 되어서 그렇다. 이제 정치가들도 기준이 없다. 목회자까지 이혼하고 재혼해도 별문제가 없다.
하나님의 율법을 버리는 순간, 각자 다른 기준을 갖게 되고, 공적 기준도 바뀐다. 그러니 무엇이 옳은가? 하는 것이다. 세대마다 각자가 옳고 그들이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시대의 사람들의 다수의 견해를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율법에 기초한 법률이나 이전 세대에 통과된 법률을 따르면 안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지도자들이 이렇게 도덕을 결정해 버린 결과, 선과 악, 의와 불의의 부재현상이 왔다. 선과 악의 기준, 옳은 것과 잘못된 것의 기준을 잃어버렸다. 우리가 정결하고 순수하며 낭만적이라고 하면, 촌스럽고 시대에 뒤떨어졌다고 한다. 오히려 조금 불결한 요소가 있어야 가치가 있고 예술적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기생충]같이 살아야 예술적이고 시대에 맞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예술뿐 아니라, 모든 영역에 반영되고 있다. 그 결과로, 벌을 주는 것은 가혹하고 잔인한 처사로 여긴다. 앞으로 10 년 안에 모든 사람이 허용할지 모를 일을 가지고 벌을 줄 수 있겠느냐?는 식이다. 그래서 미국의 많은 주에서 사형제도가 전면 폐지되고 있다. 왜 그런가? 누구도 절대 벌을 줄 권리가 없다는 것이다. 목회자들 중에도 그런 이들이 있다. 감히 어떤 인간이 하나님 대신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과연 그런가? 그것은 율법을 전혀 모르는 무지한 목회자이다. 따라서 아무 조치도 취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4. 율법을 무시한 그 최종적인 결과, 궁극적으로는 무법상태가 되어가고 있다.
사람들은 법률의 공표에 대해 반발하며 이제 죄 같은 것은 없다고 주장한다. 위법이나 범 죄는 있을 수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죄같은 개념은 없애자는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는 범죄의 개념까지 없애는 단계에 이르는 것이다. 사실상 범죄는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것은 다 질병이란 것이다. 그래서 변호사들이나 범죄한 가족들은 중죄에 해당되면 빨리 정신병원부터 찾는다. 그래서 이제 법정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의료 전문가가 가장 중요해지고 그들이 증인이 된다. 그래서 판사들이 집행할 법이 점점 없어지고 있다. 극악한 살인을 저질렀어도 의사가 출석해서 “이 사람은 책임이 없어요! 의식적으로 알고 한 일이 아니에요“라고 하면 자연스럽게 풀려난다. 이제는 ‘도착’이란 말을 쓰지 말자는 것이다. ‘도착은 없다는 것’이다. ‘자연스럽지 않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왜 그럴까? 이 사람한테 자연스러운 것이 저 사람에게는 자연스럽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절대적인 기준이란 없다는 것이다. 천부적으로 체질이나 의학적인 상태나 분비샘들의 균형과 관계되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죄의 개념을 없애 버렸고, 범죄의 개념까지 제거하고 있다. 불법과 혼돈이 가중될 것이다.
5. 율법이 절대로 필요한데, 성경의 율법을 등지는 순간, 재앙으로 나아가게 되었다.
교회지도자들의 잘못 중의 하나는 복음주의가 율법을 무시하도록 조장한 것이다. “율법을 설교하지 마라! “사람들을 정죄하고 비난하지 말고 그리스도께 나오도록 초청만 하면 된다”라고 생각한다. 이런 생각이 오히려 설교를 통해, 세상의 죄를 방조하고 부추기는 것이다. “사람들은 율법을 등지고 금지명령과 세세한 지시사항에 반감을 드러낸다는 것을 알야야지” “일반적으로 선하고 바른 정신만 가지고 발전시키자고 하면 되지” “무엇을 하고 무엇은 하지 말라고 일일이 지시할 필요가 없어” 라고 말한다. 만약 그렇게 하면, 사람들에 대한 모욕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점잖게 설교하라는 것이다. “하지 말라”고 말하지 말고, “이렇게 하는 편이 좋지 않겠어요?” 라고 추천하라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지 않으세요?” 라고 설교하라는 것이다. 사실 그런 설교자들은 진리를 막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설교하는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대로 사세요’라고 한마디만 하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교육 분야를 보자. 이제 더 이상 아이들에게 읽기와 쓰기와 셈을 가르치거나 배운 내용이 기억에 남을 때까지 억지로 암기시키고 반복시켜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것은 기계적인 방법으로 아이들을 훈육하거나 이미 배운 내용을 억지로 기억하게 만들지 말라고 말한다. 그런 방법을 쓰면 눈살을 찌푸리며 싫어한다고 한다. 몬테소리 교육법은 반복적이고 주입과 훈육대신, 흥미를 갖도록 가르치라고 한다. 아이들을 기계취급하지 말고, 흥미를 유발함으로 이해하게 하라고 한다. 그 부정적인 결과는 경영자들과 직원들이 간단한 계산조차 하지 못하고 철자와 문법을 모르게 되었다고 불평한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되었는가? 이 모든 것은 아이들의 상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과이다. 아이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 아동기는 기억력이 활발해 그대로 흡수하는 때이다. 그래서 외우는 것이 중요하다. 그동안 축적해 놓은 사실을 나중에 가서 가치 있게 활용할 수 있다. 그것을 이해하느냐 못하느냐가 중요한 시기는 아니다. 사실부터 가르쳐야 한다. 아이들이 다 이해한 방식으로 말한다고 해서 그들은 실제 다 이해하지 못한다. 기본지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하지 말라는 금지명령과 세세한 지시를 싫어하는 현대인의 태도가 반영된 예이다. 사람들은 지금도 자신들에게 일반적인 차원의 선한 정신만 있으면 된다고 주장한다. 그 결과가 선한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았다.
율법이 이 모든 태도에 대한 해결책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잘 모르지만, 율법은 우리를 너무 잘 알기에, 항상 구체적으로 지시한다. 율법이 항상 세부사항을 다루며 금지명령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은 싫어한다.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고 말하면 모욕이라고 말한다. 그것이 정말 모욕일까? 그렇지 않다. 율법은 우리를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율법은 구체적인 사항과 문제들을 철저하게 하는 것이다. ‘너는 선한 사람인가? 묻지 않고, ’너는 이것을 하고 있는가? 저것을 하는가? 묻는다. 우리에게는 이런 질문이 꼭 필요하다. 그래야 배울 수 있다. 사람들은 어떤 분야든지 세세한 부분을 다루어야 제대로 배울 수 있다. 예를 들어 피아노를 배운다고 하자. 그러면 손가락 연습부터 해야한다. 기계적인 연습부터다. 그래야 나중에 얽매이지 않고 곡을 해석한다든지 고도로 뛰어난 연주가가 될 수 있다. 기계적인 연습도 되어 있지 않은 사람에게 해석부터 시키면 혼란일 뿐이다. 그런데 이런 일들이 우리 삶의 많은 부분에서 일어나고 있다.
6. 율법을 부인함으로 결국 권위와 제재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게 되었다.
제재가 따르지 않는 법은 있어봐야 소용이 없다. 법에는 항상 제재가 따른다. 하나님께서 벌을 주겠다고 하신 일을 하면 당연히 벌을 받는다. 하나님은 말씀만 하시는 것이 아니라, 율법 말씀하신대로, 실제로 벌을 주신다. 히브리서 2장 2-3절에 “천사들을 통하여 하신 말씀이 견고하게 되어 모든 범죄함과 순종하지 아니함이 공정한 보응을 받았거든, 우리가 이같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어찌 그 보응을 피하리요...”라고 말씀한다. 하나님께서는 돌로 쳐서 죽여야 하는 죄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정해 놓으셨다. 구약 역사를 보면 실제로 그 법이 시행되었다. 하나님께서는 말씀하신대로 행하셨다. 경고하고 경고해도 끝내 순종하지 않자 말씀하신대로 벌을 주셨다. 그래서 에덴 동산에서 쫓아내셨다. 애굽에 붙잡혀 종살이하게 하셨다. 바벨론으로 쫓아내셨다. 이렇게 법에는 항상 제재가 따른다. 그러나 이 시대는 그런 개념을 아주 싫어한다. 그래서 세상이 이 지경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 어떤 점에서 세상은 사랑과 은혜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 사로잡혀 있다.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라고 말씀한다. 그런데 여기서 이 말씀의 전반부는 무시하거나 잊어버리고 후반부만 강조하는 분들이 있다. “그래요! 예수님만 전하면 됩니다.” 정확하게 맞다. 전반부 구절은 무시해버린다.
도덕적인 모범을 보이면 사람들이 정말 도덕적인 모범에 호응할까? 만일 그렇다면 오래 전에 우리 주 예수께 나왔으리라! 예수께서는 인간으로 가장 완벽한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스승이셨기 때문이다. 그러나 왜 안될까? 사람들이 근본적으로 본성이 악하기 때문에 스스로 제재가 필요하고 율법이 필요한 존재임을 모르기 때문에 절대로 호응하지 않는다. 예레미야 17장 9절에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라고 말씀한다. 결국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인 호소를 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들이 들을 리가 없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그리스도인적인 삶을 기대할 수가 없다. 율법의 정죄를 모르는 사람들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은혜를 받을 수 있겠는가!! 불쌍하게도 이상주의자들은 그렇게 은혜와 진리만 전하려고 한다. 도덕적인 것만 전하려고 한다.
그래서 궁극적으로 평화주의는 어떤 의미에서 이단이다. 예를 들어 법은 어느 정도 총기를 규제해야한다. 그러나 총을 빼앗으면 어떻게 될까? 강도들과 극단적인 타종교 광신자들이 사회를 점령할 수 있다. 평화주의자들은 비 그리스도인들에게 기독교적 행동을 기대하고 있다. 전쟁이 선하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전쟁은 정말 악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은혜 아래 들어올 때까지 율법 아래 가두어 두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래서 왕과 황제와 정부가 존재하는 것이다. 바울 시대에는 로마 황제가 있다. 그런데 뭐라고 말씀하는가? 로마서 13 장 1절과 4절에 “각 사람은 위에 있는 권세들에게 복종하라. 권세는 하나님으로부터 나지 않음이 없나니...모든 권세는 다 하나님께서 정 하신 바라...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 으니”라고 말씀한다.
법은 집행되어야 하고 적용되어야 한다. 반드시 제재가 따라야 한다. 예를 들어 경찰관들이 데모를 막는 것을 방해하며, 경찰에 대한 지원을 중단하고 예산을 깎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인간은 심히 부패한 악한 자들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저마다 자기 기준을 내세운다. 율법에 동의하지 않는다.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 삶의 방식을 결코 이상으로 삼지 않으려 한다. 그들은 오히려 지저분하고 무서운 일들을 좋아한다. 그래서 너무 부패했기 때문에 법의 적용이 필요하고 고통이 필요하다. 그래야 비로소 이해하기 시작한다. 인간에게는 칼과 권세가 법적으로 필요하다. 악을 억제하지 않으면 혼돈주의에 빠진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요, 율법의 핵심이다.
<나아가며>
잠언 13장 15절은 “선한 지혜는 은혜를 베푸나 사악한 자의 길은 험하니라”고 말씀한다. 우리 주와 구주 되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주시는 은혜와 진리의 메시지에 그나마 귀를 기울이게 만드는 한 가지 방편이 바로 이것이다. 탕자가 언제 자신의 실상을 깨달았는가? 먼 나라에서 돼지들과 지내며 쥐엄 열매를 아쉬워하는 처지가 되고 나서야 자신의 실상을 깨달았다. “아!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구나! 지금도 마찬가지다. 세계 1, 2차 대전은 인간의 배교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라고 생각된다. 마침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세상에 최후의 심판을 하실 때까지, 하나님의 벌과 심판은 점점 더 위중해질 것이다. 이것이 세상 전체에 대한 성경의 입장이다. 성경이 우리 각 사람에게 주는 메시지는 이런 실상을 정확하게 알라는 것이다. 바울에게 말씀하듯이, ”가시채를 뒷발질 하지 말라“는 것이다(행9:5, 26:14). 하나님의 법과 싸우지 말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세우신 법은 꼭 집행하신다. 권세를 가지신 하나님, 형벌을 정하신 하나님은 반드시 그대로 시행하실 것이다. 불법과 불신앙과 반역에 대한 최종 판결은 하나님 앞에서 영원히 추방하는 것이다. 이 사실을 알아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은혜와 진리의 메시지를 받을 준비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성도여! 이런 메시지는 여러분이 다른 성도들에게도 전해야 한다. 기독교인이라고 하면서 세상의 가짜 진리를 받아들이고 사는 교인들이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가르침을 부인하는 거짓된 이상주의, 평화주의, 사랑주의에 현혹되지 말도록 우리는 이 율법에 대한 메시지를 전해야 한다! 우리 기독교의 토대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게 하는 율법과 정의와 진리에 있다는 것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자!
[편집자 주 : 2021년 1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6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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