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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철]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Shall We Defend The Bible?)

복음뉴스 0 2022.05.20 15:28

제목 :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6-2장.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Shall We Defend The Bible?)

글: 이민철 목사(맨해튼성도교회)

 

 

6-2장 성경을 변호하지 않겠는가?: 수년 전에 일종의 반지식주의(反知識主義, anti-intellectualism)가 교회 안에 널리 퍼졌다. 학자들은 전도자들에 의해 멸시를 받았다. 신학교들은 불신앙의 온상(溫床)이든가 아니면 사람들이 살아있는 실재와는 거리가 먼 무미건조한 연구들에 몰두하는 장소들로 간주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의 많은 신학교들은 불신앙의 온상들(nurseries of unbelief)이다. 그리고 그것들도 역시 불신앙적인 교회들이 되었다. 신학교가 가는대로 교회도 간다(As go the theological seminaries, so goes the church). 그것은 마침내 확실히 참된 것이다. 오늘날의 전 세계의 교회의 상태를 돌아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이 참되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신학교들이 불신앙의 온상들이 되고 그것들이 섬기는 교회들을 함께 타락시킨 것은 무엇 때문인가? 그것은 부분적으로는 내가 바로 지금 말한, 목회자들과 전도자들(주 1)의 반(反)지식주의적 태도 때문이다. 자기들이 행한 바와 같이 학문을 멸시하고 그것을 적(敵)의 소유로 버려두면서, 그들은 오늘날 결국 그들이 그것 없이는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한다. 

 

참된 부흥이 교회에 일어날 때, 우리는 한 가지 사실을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그것과 함께 그리고 그것의 필수적인 한 부분으로서 기독교적 지식의 부흥이 일어날 것이라고 완전히 확신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16세기의 종교개혁에서 그러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지 겉만 긁는 정도가 아닌 모든 개혁이나 부흥에서 그러할 것이다.

 

나는 사람들이 고린도전서 12장을 좀 더 자주 읽기를 바란다. 그 장에서 바울은 은사의 다양성에 대해 그리고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시는 한 성령에 대해 말한다. 만약 그 중요한 장을 좀 더 조심스럽게 읽는다면, 그들은 사도 시대의 성령의 초자연적(超自然的)인 은사들에 해당하는 것은 또한 성령께서 여전히 교회 위에 은혜롭게 내리시는 은사들에도 해당한다는 것을 알 것이다. 하나의 은사는 다른 은사들 없이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은 여전히 아주 참되다. 확실히, 전도가 기독교적 지식 없이 충분할 수 없다는 것은 참된 사실이다.

 

나는 기독교적 지식과 전도와의 관계를 그 둘의 비교로 생각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전도하자. 그러나 기독교적 학문을 밀쳐낼 정도로 전도하지는 말자”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그렇다. 그 사실의 참된 진술은, 만약 여러분이 기독교적(基督敎的) 지식을 가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거의 전도할 수 없을 것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더 많은 기독교적 지식을 가질수록, 더 많이 전도할 수 있을 것이다. 성경이 설명되고 변호되는 참된 신학교들로부터, 그들이 무엇을 믿는지 그리고 그들이 그것을 왜 믿는지를 아는 목사들과 전도자들이 배출된다. 그리고 그러한 목사들과 전도자들의 설교는 귀한 영혼들의 구원을 위해 은혜롭게 하나님께 사용된다. 이것은 추측이 아니다. 오늘날 여러분의 주변을 보라. 그러면 여러분은 그것이 바로 사실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아마 여러분은 내가 성경을 변호(辯護)해야 할 필요성에 대해 충분히 말했고 이제 계속해서 그것을 변호해야 한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분명히 나는 오늘 그렇게 할 수는 없다. 나의 시간이 거의 다 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나는 이 연속 강연의 다음 이야기들에서도 아주 자세하게 그렇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이 특별한 강연에서 나는 성경이 참되다는 것을 믿게 하는 이유들에 대해서보다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가에 대해서 이야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앞으로 나는, 예를 들어, 여러분에게 그 진리의 증거들이 얼마나 놀라운가를 그리고 진리성(眞理性)에 대한 그러한 증거들이 성경 전체가 참으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우리의 확신을 얼마나 놀랍게 확증하는가를 보여주기 위해 여러분과 함께 특히 신약성경을 연구하고 싶다. 

 

그러나 지금 이 이야기에서도, 나는 성경에 관한 그러한 큰 확신에 도달하는 방법에 관해 오직 한 마디의 말을 하지 않고 여러분을 떠날 수는 없다. 나는 성경의 영감과 신적권위(神的權威)에 대한 한 가지의 중대한 논증을 아주 간단히 언급하기를 원한다. 그것이 유일한 논증은 아니라는 것을 유의하라. 단지 나는 이 시간에 그것을 한 예로 선택하고 있는 것뿐이다.

 

그 논증은 예수 그리스도의 증거에서 발견된다. 기원 1세기에, 나사렛 예수라고 불리는 한 사람이 팔레스타인에서 살았다. 우리는 신약성경에서 그의 생애에 대한 어떤 기록들을 가지고 있다. 나는 여러분이 그것들을 적어도 역사적인 문서들로 연구하기를 원한다. 만약 여러분이, 내가 하듯이, 그것들을 하나님의 영감된 말씀의 한 부분으로 간주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하더라도 그것들을 적어도, 공정하게, 역사적인 문서들로 연구하라.

 

만약 그것들을 이와 같이 공정하게 연구한다면, 여러분은 그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묘사하는 그 묘사로 인하여 갈등을 받을 것이다. 그 묘사는 분명히 한 진정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다. 그것에 대해서는 어떤 의심도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것은 또한 매우 이상한 사람에 대한 묘사이기도 하다. 복음서들이 묘사하는 예수님은 굉장한 주장들을 하셨고 자연 세력을 지배하는 주권적 권세로 그 주장들을 실증(實證)하셨다. 그는 자연의 창조자, 즉 자연의 하나님으로서 자연을 명령하신다. 그는 분명히 초자연적인 사람이셨다. 

 

현대인들은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에서 초자연적인 것과 자연적인 것을 분리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자기 자신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그 묘사로부터 이러한 낡은 초자연적인 장식들을 제거하겠다. 그리고 나면 우리는 진정한 예수님 즉 오직 하나의 위대한 종교적 천재이신 예수님에 대한 묘사를 가질 것이다.”그러나 그렇게 분리하려는 노력은 실패하였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는 그 전체의 필수적인 부분임이 증명되었다. 그것은 그렇게 쉬운 인위적인 방법으로 나머지 부분과 분리될 수 없다. 예수님에 대한 복음서의 묘사는 철두철미하게 초자연적이다. 

 

오늘날의 어떤 급진주의자들은 논리적인 결론을 끌어내고 있다. 초자연적인 부분은 나머지 부분과 분리할 수 없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초자연적인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기 때문에, 그리고 그들은 초자연적인 부분을 받아들이지 못하겠기 때문에, 그들은 그 전체를 버리고 있다. 그들은 우리에게 예수님에 관해서는 도대체 확실하게 아무 것도 알 수 없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회의주의는 터무니없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진지(陣地)를 유지하지 못할 것이다. 나의 친구들이여, 그것에 대해 조금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다. 복음서들에 나와 있는 묘사는 너무 생생하다. 그것이 발견되었다는 것은 너무 불가능하다. 그것은 분명히 한 실제적인 인물에 대한 묘사이다.

 

예수님 앞에서, 구원 받지 못한 사람들의 당황함은 오랫동안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으실 것이다. 그들은 그의 굉장한 주장들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그를 자기들의 구주로 영접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계속하여 그들의 호기심을 일으카고 그들을 당황케 할 것이다. 그는 그들의 유치한 틀 안으로 밀쳐지는 것을 거절하신다. 그들은 그 분 앞에서 당황한 채로 있다.

그러한 당황함으로부터 피할 길은 오직 하나이다. 그것은 결국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다. 그 묘사가 참되다는 것을 믿는다는 것을 거절하라. 그러면 교회(敎會)의 아주 최초의 시대에 대한 여러분의 생각은 모든 것이 당황과 혼란일 것이다. 그 묘사를 참되다고 받아들이라. 그러면 모든 것이 명백할 것이다. 그때에 모든 것은 제자리에 맞는다. 그 열쇠가 그 거대한 수수께끼를 푸는 것임을 알게 된다.

 

초자연적인 예수님은 이와 같이 초대 기독교 역사에 대한 바른 이해의 열쇠이시다. 그러나 그는 또한 훨씬 그 이상의 것의 열쇠이시다. 인류는 신약 시대의 수수께끼보다 더 많은 수수께끼들 앞에 서 있다. 우리 주변의 모든 것이 수수께끼들이다. 즉 우리의 존재에 대한 수수께끼, 우주에 대한 수수께끼, 우리의 불행과 우리의 죄에 대한 수수께끼 등이 그것이다. 그러한 모든 수수께끼들에 대하여 신약성경이 제시하는 예수님께서는 열쇠를 제공하신다. 그는 어떤 것들에 대한 열쇠가 아니고 모든 것에 대한 열쇠이시다. 초자연적인 그리스도의 실제에 대한 증거는 매우 이해하기 쉽고, 매우 놀랍게도 누적적(累積的)이며 매우 심오하고 그리고 매우 강력한 것이다. 

 

그러나 만역 우리가 그 증거를 확신한다면, 우리는 그 결과를 받아들여야 한다. 만약 우리가 예수님을 신약성경이 말하는 바로 그 분이라고 확신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법(法)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그가 말씀하실 때 우리가 그를 믿을지 믿지 않을지를 선택할 수 없다. 우리는 ‘믿어야’한다. 그의 권위는 모든 논쟁들에 있어서 우리에게 결정적이어야 한다. 

 

많은 질문들에 관하여 우리가 가지고 있는 그 기록들은 예수님의 어떤 판단을 기록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한 가지 질문에 관하여 그의 판단은 명백하시다. 그것은 단지 우리가 그의 생애의 기록들이 신적인 영감을 받은 것이고 그래서 완전히 오류가 없다고 확신 하게 된 후에만 우리에게 명백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우리가 그 기록들을 단지 정당하게 정확한 역사로 간주할 때에도 명백하다. 만약 한 가지 사실이 역사가에게 분명하다면 그것은 나사렛 예수께서 구약 성경의 완전한 진리성(眞理性)을 고수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오늘날 멸시를 받는, 성경을 믿는 자들이 주장하는 구약성경의 신적 권위에 대한 그러한 높은 견해를 가지셨다는 것이다.

 

그것은 심지어 복음서들의 진리성에 대한 낮은 견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조차도 인정한다. 예수님께서 그 당시의 유대인들이 일반적으로 가졌던 성경에 대한 그러한 견해를 가지셨다는 것을 그들은 인정한다.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는 것을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그렇게 존경하는 예수님이 이 점에 있어서 그 시대에 속한 사람이었다는 것은 얼마나 안 된 일인지!” 그러나 만약 그들이 학자라면, 그들은 그것을 인정(認定)해야 한다. 예수님께서는 확실히 구약성경이 바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것을 믿으셨다. 그리고 그는 확실히 그러한 믿음을 그의 인간으로서의 생활의 중심에 두셨다.

 

그러나 그가 이와 같이 구약성경을 뒤로 가리키시고 그의 인간으로서의 생활을 그 위에 세우셨듯이, 그는 또한 신약성경을 앞으로 가리키셨다. 그는 사도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 그들에게 초자연적인 권위를 주셨다. 그러한 권위를 행사하면서, 그들은 신약성경을 교회에 제공했다. 그러한 권위를 행사하면서, 그들은 신약성경을 교회에 제공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을 믿는 사람은, 만약 그가 논리적으로 일관된다면,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가 성경 전체를 이와 같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간주할 때, 우리는 우리의 판단에 대한 풍부하고 다양한 확증을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놀라운 통일성 -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이 “모든 부분의 일치”라고 부른 것 - 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세부적인 내용의 진리성(진실성)에 대한 수 없이 많은 증거들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다른 책들과 전적으로 다름에서 발견한다.

 

우리는 그것을 이 책이 말씀하는 말씀 위에 세워진 생활의 아름다움과 평안에서 발견한다. 그렇다. 나의 친구들이여, 우리로 하여금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생각하게 하는 증거는 매우 풍부하고 다양하다.

 

주 1) 사도행전과 바울 서신에서 바울과 연관된 약 백 명의 이름 중, 38명은 사도의 동역자들이다. 바울은 열거된 동역자들에 대해 아홉 가지 호칭을 사용한다. 형제, 사도 또는 사절, 일꾼, 종(같이 종된 자), 동료 또는 현력자, 군사(함께 병사된 자), 함께 갇혔던 자, 동역자 등이다. 형제(‘아델포스’)에 대해서는 행 25:22; 롬 16:23; 고전 1:1, 16:12; 고후 1:1, 2:13; 엡 6:21; 빌 2:25; 골 1:1, 4:7, 9; 살전 3:2; 몬 1절; 사도(‘아포스톨로스’) - 행 14:4, 14; 롬 1:1, 16:7; 빌 2:25; 살전 2:7; 일꾼(servant, ‘디아코노스’) - 고전 3:5; 고후 3:6, 6:4; 엡 6:21; 골 1:7, 4:7; 종/함께 종 된 자(‘둘로스’, ‘쉰둘로스’) - 빌 1:1; 골 1:7, 4:7, 12; 딤후 2:24; 동역자(‘코이노노스’) - 고후 8:23; 몬 17절; 수고한 자(‘호 코피온’): 롬 16:6, 12; 딤후 2:6; 함께 군사된 자(‘스트라티오테스’, ‘쉬스트라티오테스’) - 빌 2:25; 딤후 2:3; 몬 2절; 함께 갇혔던 자(‘쉬나이크말로토스’) - 롬 16:7; 골 4:10; 몬 23절; 동역자(‘쉬네르고스’) - 롬 15:21; 16:3, 9, 21; 고전 3:9; 고후 8:23; 빌 2:25, 4:2~3; 골 4:10~11; 살전 3:2; 몬 1, 24절. Eckhard J. Schnabel, Paul the Missionary (Downers Grove, IL : IVP, 2008)(『선교사 바울』, 부흥과 개혁사, 2014. 역간). p. 328.

 

* 2022년 5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2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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