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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삼현] 안식일에 합당한(lawful) 일이라!

복음뉴스 0 2022.04.12 19:41

왜 하나님? ⑦  안식일에 합당한(lawful) 일이라!

글 : 한삼현 목사 뉴저지 빛과 소금교회


필자는 지난 호(2021년 12월)에서 “이른바 ‘작은 계명’과 ‘큰 계명’이 따로 있습니까?”를 살펴보았습니다. 그 글을 쓴 목적은 바로 작은 계명이든 큰 계명이든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법(standard)을 결코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것을 밝히려는데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의 실패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신자도 큰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작은 율법을 범하게 된다든지 작은 율법을 지키려고 하다가 큰 율법을 놓치게 되는 과오를 범하는 것은 사람으로서는 당연한 일일 겁니다(마 23:23. 약 2:10). 이와 함께 필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궁극적인 목적을 되새기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고 인정받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을 뿐입니다.”(롬 3:20) 

 

물론 시내산에서 받은 율법 자체는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살아야 할 거룩한 삶의 도리에 관하여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주신 가르 침이고 거룩하고 신령한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런 거룩한 율법이 사람으로 하여금 죄에서 벗어나 거룩함에 이르게 하는 것은 고사하고 오히려 죄만 더하게 하는 부작용만을 초래하였습니다. 그 이유를 굳이 밝힌다면, 바로 죄가 그만큼 강력하게 사람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뿐만 아니라, 사람의 타고난 성품이라는 것이 참으로 연약하기가 짝이 없어서 거룩한 율법 앞에서 무기력하였기 때문입니다.

 

요약해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율법을 주신 최종적인 목적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을 겁니다. 사람으로서는 작은 율법이든 큰 율법이든 도저히 온전하게 지켜낼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명백한 죄인으로 두 손을 들 수밖에(항복할 수밖 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제 사람에게 남아 있는 유일한 희망(chance)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의 엄중하신 율법 너머에서 기다리고 있는 하나님의 긍휼하심(loving―kindness)을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른바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나타난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을 바라보고 기대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율법은 죄인을 그리스도 앞으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몽학선생 =children’s guardian)였습니다.

 

이제 필자는 율법과 관련하여 예수님의 공생애 시작 때부터 한결 같이 유대인들(지도층) 과 논쟁하신 ‘안식일’에 대하여 살펴보려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여러 차례 행하신 일을 두고서 왜 합당하다(lawful)고 하셨는지 그 뜻을 헤아리고 정리하고자 합니다.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영과 육)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요 7 :23)라고 하셨습니다. 먼저 여기서 우리가 놓 치지 말아야 할 것은 예수님은 먼저 죄를 사하신 후에 병을 고치셨습니다. 우선적으로 영을 다루시고 나중에 육을 고치신 것을 헤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곧 사람의 전신(영과 육)을 온전하게 하기 위해서 안식일 계명에 구애받지 않으셨던 일이 정당하고 옳은 일이라고 주장하신 그 뜻을, 오늘날 우리는 아주 조심스럽게 이해해야 합니다. 우선 우리는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일한다고 하더라고 옳다거나 합당하다고 하셨던 말씀들에서 여러 조 건들을 이렇게 정리할 수 있습니다.

 

① 안식일에 악을 행하는 것보다 선을 행하는 것이 옳다(마 12:12, 막 3:4, 눅 6:9, 혹은 생명을 죽이는 것보다 생명을 살리는 것이 옳다)고 하신 말씀에 따라서, 가령 선한 일이라고 여겨지기만 한다면 혹은 생명을 살리기만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좋다/괜찮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여서는 안 될 것입니다. ② 또한 안식일은 사람을 위해서 존재하기 때문에(막 2 :27), 가령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만 한다면, 안식일에 일하더라도 무방하다/괜찮다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그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기도 어려울 것입니다. ③ 더 나아가서 짐승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안식일에 구애받지 않았다고 한다면(마 12:11∼12, 눅 14:5), 하물며 사람을 구하기 위한 일이라고 생각한다면, 훨씬 더 당연하게 (안식일에 구애 받지 않고 일하더라도 무방하다/괜찮다 하는 의미로) 우리가 그 뜻을 헤아리고 받아들이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여기의 많은 조건들, 즉 악한 일이 아니라 선한 일이라고 여겨지기만 한다면, 혹은 생명을 죽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을 살리는 것이라고 여겨지기만 한다면, 안식일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람을 위한 일이라고 생각되기만 한다면, 짐승을 구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사람을 구하는 일이라고 생각되기만 한다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아도 합당하다/좋다고 하는 뜻으로 오늘날 우리가 이해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이런 말씀에서 나타난 가르침은 더 넓은 카테고리에서, 즉 안식일의 본질 (Essence of Sabbath)이 무엇인지 밝혀주는 것이라고 우리가 헤아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쉬운 말로 요약한다면, 여러 가지 조건들에 따라서 안식일에 행해도 되느냐 혹은 안 되느냐?를 헤아리고 정리할 것이 아니라, 안식일의 본질(근본적인 뜻)을 따라서 안식일에 행하더라도 합당한 일이 된다거나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일깨워주고 있다 는 것입니다.

 

[안식일의 본질] 먼저 우리는 유대인들처럼 안식일을 ‘단순히 일하지 않고 움직이지 말아야 하는 소극적인 날’로 헤아리고 규정해서는 안 될 겁니다. 모든 얽매임으로부터 놓임을 받고 온전한 하나님의 형상인 참 사람으로서 적극적으로 안식(peace)을 누리는 날이 바로 참된 안식일임을 헤아려야 할 것입니다. 안식일의 본질적인 측면에서 가장 먼저 인간들은 죄와 죽음으로부터 놓임 받고 살림을 얻어야 안식하게 됩니다. 죄에게 종노릇하고 죽음에 얽매인 인생들을 향한 예수님의 간절한 호소를 우리는 기억합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진 인생들아, 모두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놓임과 평안) 하리라.”(마 11:28) 나아가서 인생들의 삶의 모든 영역에서 괴롭히는 귀신들과 질병들과 각양각색의 얽매임으로부터 해방되고 인간의 참된 목표를 향한 자유를 얻어야 안식이 가능하였던 겁니다. 옛적에 인간의 범죄(창 3장)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축복과 신령한 거룩함을 잃어버렸던 죄인들(mankind) 을 향하여 더 나은 것(온전함)을 회복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안식에 관하여 예수님은 안식일에 몸소 일하시면서 증거하셨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유대인(지도층)의 지독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여러 형편의 사람들을 대상으로 안식일에 적극적으로 일을 하셨습니다. 바로 이렇게 행한 일들을 가리켜 “안식일에 합당한 일이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형제자매 여러분,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완전한 죄 사함 - 새 언약)를 통하여 하나님 나라의 일꾼 된 자격을 얻은 우리를 향한 귀중한 가르침이 있습니다. 바로 우리로 하여금 기록된 글자(율법 조문)로 성도를 섬길 것이 아니라 영(the Spirit)으로 그 들을 섬기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기록된 글자(율법 조문)는 사람을 죽이기 때문이고 영 (the Spirit)이 사람을 살리기 때문이라고 가르 치셨습니다(고후 3 : 6, 요 8 : 5~7) 

 

[편집자 주 : 2022년 1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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