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민철 목사의 메이첸 박사 『근대세계 안에 그리스도인 신앙』(1936)
9-2장. 창조주 하나님 (2) (GOD, THE CREATOR)
글: 이민철 목사(맨해튼성도교회)
아, 나의 친구들이여, 그렇지 않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라면 그렇지 않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믿음을 잃게 하는 이러한 음성들에 귀를 기울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비록 천만번 천만개의 우주(宇宙, universes)가 우리를 대항하여 그 모든 힘을 놓을지라도, 비록 우리가 붕괴하는 우주의 격돌(激突) 속에 서서 우주적 파멸을 눈으로 보게 될지라도, 우리는 여전히, 그것은 그가 창조하실 수 있고 그가 파괴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세계이고, 그리스도의 은혜를 통하여서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의 팔에서 영원히 안전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비록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전능하지 않으실지라도, 비록 우리가 그를 세상의 주권적인 창조자와 통치자라고 더 이상 생각할 수 없을지라도, 비록 우리가 이러한 것들을 단순한 형이상학의 영역에 소속시킬지라도, 우리는 최소한 어떤 것을 남겨놓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선(善)을 남겨놓고 있지 않는가?
우리는 세상이 어떻게 존재하게 되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죽음의 어두운 문을 통과할 때 우리의 운명이 어떻게 될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능력이라는 옛날의 저속한 장식물들을 벗어버린 선에 대한 존경에서 더 고상하고 더 사욕이 없는 예배 - 그것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예배보다 훨씬 더 고상하게 보일 것이다 - 를 찾을 수 있지 않는가?
그것은 처음에는 고상하게 들린다. 그러나 잠시 그것을 깊이 생각해보라. 그러면 그 영광은 재로 변하고 우리는 절망 가운데 버려둘 것이다. 능력을 가지고 있지 않는 선(善)이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이란, 그것이 사람들에게 속한다는 것 외에는 단순한 추상적 개념이 아닌가? 사람의 생각이 행할 능력을 포함하지 않는 것과 같지 않은가? 능력과 완전히 분리된 선은, 그러므로 전혀 선이 아니다. 사실, 만약 여러분이 하나님을 오직 선하신 분으로만 생각하려고 하고 능력 있으신 분으로는 생각하려고 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과 선을 둘 다 잃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 위하여 인간 나사렛 예수의 도덕적 생활을 살펴보는 것은 충분하지 않다고 강조한다. 그것은 충분하다고 간주하는 것은 예수님 자신을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전혀 하나님이 아닌 하나님을 남겨 준다. 그렇다면 우리가 성경을 전체적으로 취할 때, 성경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는 무엇인가?
만약 여러분이 내게 이 질문에 한 마디로 대답하라고 한다면, 그리고 만약 여러분이 내가 그 한 마디를 철학자들이 사용하는 편리한 단어로 표현하는 것을 금하지 않는다면, 나는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에 대한 견해는 철학자들이 ‘유신론(有神論)’이라고 부르는 견해 즉, 세상의 창조자와 통치자이신 인격적인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주장하는 견해라고 말하겠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특히 분명하게 제시하신 견해이며 성경이 전체적으로 제시하는 견해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견해가 무엇인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흔히 주장했던 다른 두 가지의 견해와 그것을 비교해 보는 것이 가장 좋을 것이다.
첫째로, 자연신론(自然神論)이라고 불리우는 견해가 있다. 이 견해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우주를 창조하셨으나, 그 다음에 그 우주를 기계와 같이 스스로 운행하도록 홀로 내버려 두셨다는 것이다. 인격적인 하나님의 존재는 긍정하지만 그가 세상 속에 계시다는 것과 세상을 적극적으로 다스리신다는 것을 부정하는 이 견해는 과거의 세대들의 불신자들에 의해 널리 주장되어지곤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그 견해는 죽었다(today, it is dead). 나는 오늘날에 어떤 진정한 자연신론자들이 있는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러나 둘째의 잘못된 견해는 매우 생생하게 살아 있다. 사실 그것은 여러 가지 다른 형태들로 그리고 다수 수정되어, 오늘날 수많은 교회의 생명을 질식시키고 있는 현대주의(現代主義)의 기초를 이루는 견해이다. 이것은 ‘범신론(汎神論, pantheism)’이라고 불리우는 옛날의 잘못된 견해이다. 그것은 수많은 다른 형태들로 그리고 상당한 일관성을 가지고 주장되었다. 그 용어의 엄격한 의미에 의하면, 그것은 ‘모든 것이 하나님이라’는 견해, 즉 존재하는 것들의 전체(全體)와 하나님을 단순히 동일시하는 견해이다.
철학적 교양이 없는 보통 사람의 첫 충동은 이러한 견해를 어리석게 여기는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학교에 다니면서 처음에 그것을 들었을 때 나는 그런 식으로 생각했다. 그것은 내게 나무와 돌 우상에게 꿇어 절하는 이방인의 우상숭배보다 더 상식을 벗어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나의 친구들이여, 여기에 이상한 일이 있다. 만약 그 용어의 의미가 그들에게 설명된다면 범신론을 잘못된 것으로 간주할 수많은 사람들이 실제적으로 범신론자들이라는 사실이다. 그들은 그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왔지만, 그들은 똑같이 범신론자들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자연의 강력한 과정 속에 있음을 발견한다. 그것은 별이 반짝이는 하늘의 놀라움들과 원자(原子)의 내부가 보여주는 동등한 놀라움들에서 나타난다. 그것은 순환하는 계절들에서 그리고 또한 인간 지성이 이루어 놓은 일들에게 보여진다. 자연의 그러한 강력한 진행과정 앞에서 우리는 경외심을 가지고 서 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보잘 것 없음을 깊이 느낀다. 우리는 우리가 단지 한 강력한 전체(全體)의 무한히 작은 부분들임을 알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강력한 전체에서 우리 현대인들이 그것의 광대함을 전무하게 이해하게 되었던 이러한 세계의 과정에서, 범신론자는 하나님이라는 두려운 이름을 적용한다. 하나님은 이와 같이 더 이상 그가 만든 기계와 구별되는 한 기술공처럼 생각되지 않는다. 그는 오히려 우주 자체로 생각되고 그것의 개체적인 표현들로가 아니라 하나의 강력한 전제로서 생각된다.
이상과 같은 것이 엄밀한 의미의 범신론(pantheism)이다. 우리는 이러한 견해가 많은 지성인들에게 주는 호소력을 잘 이해할 수 있다. 그것은 아주 영특한 사상가들을 자극했고 아주 훌륭한 시인들에게 영감을 일으켰다. 그러나 그것은 억눌리고 무거운 짐진 영혼들에게는 아무 위안도 주지 못한다. 만약 하나님이 단지 사물의 전체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이름에 불과하다면, 비록 우리가 그를 소유한다 할지라도, 우리는 전에 가지지 못했던 어떤 것을 가지지 못할 것이다. 우리에게는 자연으로부터 자연의 하나님에게 하는 호소가 더 이상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제 단지 맹목적인 세력의 장난감에 불과할 것이다.
아마 하나님을, 존재하는 모든 것과 동일시하는 순수한 범신론의 결점들을 느끼면서, 어떤 사람들은 여러 가지 종류의 ‘보다 고상한 범신론’(higher pantheism)을 추구하였다. 그들은 자신들에게 이렇게 말한다. 아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우주 전체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이름이 아니고, 우주 전체를 흐르는 영적인 목적과 동일시되는 것이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하나님은 우주의 영혼(soul)이라고 말했다. 인간의 육체가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듯이, 우주는 영혼을 가지고 있는데 그 영혼이 ‘하나님’이라고 불리워지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이러한 고상한 혹은 천박한 모든 형태의 범신론에서 두 가지의 같은 결함들이 발견된다. 첫째로, 그것들은 우리에게 세상과의 어떤 필연적인 관계 안에 있는 하나님을 제시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말하기를, 세상이 하나님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도 세상과 분리하여 존재하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거룩(holiness) 혹은 분리(separateness)는 어떻게 되는가? 그러한 견해를 시인들과 철학자들이 사용했던 모든 아름다운 언어로 꾸며 보라. 여전히 그것은 우리에게 단순히 세상의 한 기능이나 한 모습인 하나님을 제공할 것이다. 그러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영혼이 들어가기를 갈망하는 저 너머의 그 두렵고 신비스러운 세계와 접촉하도록 할 수 없을 것이다.
둘째로, 범신론은 고상한 것이나 천박한 것이나 간에 우리에게 인격적인 하나님을 참으로 제공(提供)할 수 없다. 우리가 그의 일부분인 하나님은 결코 우리가 교제할 수 있는 하나님일 수 없다. 우리는 결코 한 사람이 다른 사람 앞에 서 있듯이 그러한 하나님 앞에 서 있을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하나님에게 ‘당신’(Thou)이 라고 말할 수 없고, 그러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에게 ‘너’(Thou)라고 말할 수 없다.
우리는 결코 그러한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고, 그러한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사랑할 수 없다. 추상적 개념은 사랑 할 수도 사랑을 받을 수도 없다. 우리는 결코 ‘세계의 과정’에게 혹은 ‘영적 의미’에게 혹은 선의 원리에게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하고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범신론의 그러한 두 가지 결함들이 성경의 교훈에서는 얼마나 잘 피하였는지! 두 가지 결함들 중의 처음 것은 확실히 피하여졌다. 성경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명확하게 두드러지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님의 두려운 거룩 혹은 분리, 즉 유한(有限)과 무한(無限) 간의, 피조물과 창조주 간의 두려운 구별이 아닌가? 성경은 물론 우리에게는 하나님께서는 세상 안에 내재(內在)하신다고 가르친다. 그는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그는 기술공이 그가 만든 기계와 멀리 떨어져 있듯이 우주와 멀리 떨어져 계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성경을 읽는 경건한 독자는 테니슨(Tennyson, 1809-1892)과 같이 “그는 숨결보다 가까이 계시고 손과 발보다 가까이 계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비록 하나님께서 이와 같이 세상 안에 내재하실지라도, 그는 또한 초월(超越)해 계신다. 세상은 그를 의존하고 있지만, 그는 세상을 의존하지 않으신다. 그는 세상을 제한하셨지만, 세상은 그를 제한하지 못했다. 세상은 그의 손으로 만드신 것이지만, 그는 영원 전부터 계신다.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시편 90:2). 하나님과 세상의 두려운 구별은 성경 전체에 흐르고 있다. 이것이 성경이 하나님의 ‘거룩’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범신론자들과 달리, 성경은 우리에게 거룩하신 하나님을 계시하시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또한 - 그리고 역시 범신론자들과 달리 - 우리에게 인격적인 하나님(personal God)을 계시하신다. 성경의 하나님은 우주 자체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이름이 아니다. 그리고 우주 전체에 흐른다고 생각되는 어떤 영적인 목적에 대한, 혹은 선이라는 어떤 비인격적인 원리에 대한 다른 하나의 이름도 아니다. 그는 하나의 인격(person)이시다. 이것은 처음부터 분명하다. 우리는 한 분 하나님 안에 있는 세 인격(人格)에 대한 깊은 신비를 다음의 장에서 살펴 볼 것이다. 그러나 적어도 하나님께서 인격적이시라는 것은 분명하다. 그는 어떤 세력이나 어떤 원리나 우리가 그의 일부분인 어떤 집합체(集合體, collective)가 아니시다. 그는 우리가 ‘당신’(Thou)이라고 말할 수 있는 인격, 만약 그가 원하신다면 인간이 자기 친구에게 말하듯이 우리에게 말씀하실 수 있고 만약 그가 원하신다면 우리에게 하늘에 계신 아버지가 되실 수 있는 인격이시다.
그러나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우리가 그의 보좌 앞에 두려움으로 서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잊어버린 시대에 살고 있다. 그들은 그들 자신의 일에 골몰해 있다. 그들은 그들의 교만 속에서 득의양양(得意揚揚)하고 있다. 그들은 하나님을 그들의 사상에서 제거시켰다. 그 결과로 우리의 자랑하던 문명이 급속히 파멸에 달려가고 있다. 아, 아직 시간이 있을 때, 이러한 인간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야 할 텐데!
나의 친구들이여, 여러분은 어떤가? 여러분은 여러분 자신의 길을 걷고 있었는가? 여러분은 하나님을 잊어버렸는가? 만약 그렇다면, 나는 여러분이 그를 어떻게 발견할 수 있는지 말해 줄 복된 책을 읽으라고 강권한다. 만약 여러분이 그 분의 말씀(성경)에 귀를 기울인다면 여러분은 먼저 그의 보좌 앞에 두려움으로 설 수 있을 것이다. 그 다음에 그가 마련하신 방법에 의해 여러분은 그와 화목하게 되고 영원토록 그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각주 제1대 테니슨 남작 앨프리드 테니슨(영어: Alfred Tennyson, 1st Baron Tennyson, FRS, 1809년 8월 6일 ~ 1892년 10월 6일)은 영국의 시인으로, 빅토리아 시대의 계관시인이다. 아름다운 조사와 운율을 담은 작품들로 세계적으로 사랑받음. 링컨셔주 서머스비에서 목사의 아들로, 12 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조지 클레이턴 테니슨(1778 ~ 1831)은 서머스비 교구의 목사였다. 테니슨은 라우스 그래머 스쿨(Louth Grammar School)에서 1816년부터 1820년까지 공부했고, 스카이트클리프 스쿨(Scaitcliffe School)과 에드워드 6세 그래머 스쿨(Englefield Green and King Edward VI Grammar School)을 거쳐 1827년 케임브리지 대학교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테니슨은 대학에서 "케임브리지 사도들"이라는 비밀 단체에 가입했으며, 아서 헨리 핼럼(Arthur Henry Hallam)을 만났다. 아서 헨리 핼럼은 테니슨의 절친한 친구가 되었다. 그의 첫 번째 시집은 모음집이었는데, 1827년 형 찰스와 함께 시집 《Poems by Two Brothers》를 간행하였고, 1830년 홀로 발간한 시집 《Poems Chiefly Lyrical》에서는 존 키츠의 영향을 보여 주고 있다. 이어 1833년 《샬롯의 숙녀》 (The Lady of Shalott)를 발표했다가 혹독한 비평을 받고, 10년간 침묵한다. 1892년에 사망하였고,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안장되었다. 장례식에서는 "거룩하고 거룩하시다"가 연주되었다. 차남 핼럼(제2대 오스트레일리아 총독)이 작위를 계승했다. 현재 테니슨 남작 작위는 6대째 데이비드 테니슨(1960년생)이 상속하고 있다.
* 2022년 12월 14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8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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