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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수] 죄책감을 치유하라(1)

복음뉴스 0 2022.07.22 17:34

제목 : 죄책감을 치유하라(1)

글 : 김경수 목사 (서울 광은교회)
       kks50205020@gmail.com

 

19세기 미국의 작가 애드 엘렌 포우(Alan powoo)가 쓴 고자질하는 양심이라는 소설이 있다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은 아무도 모르게 사람을 죽여 자기 집 지하실에 묻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은 사람의 심장 고동 소리가 귀에 똑똑히 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 일로 그는 간담이 서늘해졌으며 온몸은 식은땀으로 촉촉이 젖었다. 귀를 막아도 잠을 자도 계속 들려오는 그 섬뜩한 고동치는 소리를 피하려 해도 피할 길이 없었다. 마침내 그 소리가 지하실에서 나는 소리가 아니라 자신의 가슴에서 울려 나오는 자기 심장의 고동소리인 것을 깨닫게 된다. 저자는 용서받지 못한 죄책감은 피할 수 없는 고통이라는 것을 묘사함과 동시에 죄책감의 무서움을 이야기 하고 있다. 그렇다면 죄책감이란 무엇인가 살펴보자.

 

· 죄책감에 대한 정신분석의 정의

일반적으로 죄책감은 한 인간의 삶 전체를 어지럽게 교란시키는 행위를 의미한다. 죄책감을 심리학에서는 한 인간이 육신적인 삶은 죄책 이라는 질병의 포로가 되어, 그것으로 인해 불안과 고통을 당하는 것이라고 정의 한다. 이런 의미에서 죄책감은 인간의 정신적인 부분을 좌절하게 만들어서 심한 고통을 느끼게 하고, 삶의 기쁨과 소망을 상실하게 하여서 일상적인 삶 속에서 기력의 상실을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이것을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에서 생겨났다고 프로이드는 보면서 정신적인 에너지의 균형을 완전히 와해 시켜서 삶의 조화를 깨어지게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 결과로 고통스러운 분열을 드러내는 것을 의미한다. 그 뜻은 정동의 상태가 무너지거나, 죄인의 양심의 가책이나 외견상 불합리한 자책으로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여기는 막연한 감정이라고 할 수 있다.

 

·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로 인한 죄책감

성경에 보면 프로이드가 말한 정동의 흔들린 사건이 다윗이 우리아 장군의 아내 밧세바를 범한 간음 사건에 나온다.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후에 다윗의 행동을 보면 섬뜩한 정도의 악행을 저질렀다.

어느날, 다윗이 한 순간의 정욕을 참지 못해서 자신의 오른팔과도 같은 충신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와 동침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 일로 인하여 밧세바가 임신을 하게 되자, 아주 간교한 흉계를 꾸미고 전쟁터에 나가 있는 우리아를 불러 들여 밧세바와 동침하도록 상황을 설정해 놓았다. 그런데 우리아의 행동은 자신의 동료들이 전쟁터에 전투하고 있는데 자신만 편히 쉴 수 없다는 이유로 집에 들어가지 않았다. 이일로 다윗의 계획이 실패하자 더 무서운 음모를 꾸미고, 전쟁에 나가 있는 총사령관 요압에게 우리아를 고의로 전사하도록 만든 것이다. 여기까지 다윗의 입장에서 보면 완벽한 행동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이렇게 다윗은 간음죄에다 살인 교사죄까지 저지르고서도 죄책감을 느끼지 못하고 살고 있었다. 그때 하나님께서 선지자 나단을 보내셔서 자신이 얼마나 큰 죄를 범했는가를 비유를 통해서 깨닫게 하신 것이다. 이때 다윗이 죄를 깨닫고 말한다.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삼하 12: 13). 이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서 다윗이 지은 죄에 대한 벌로서 첫아들을 치게 하신 것이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죄를 지으면 죄값과 죄책감으로 인하여 누구나 시달리게 된다. 그러면 죄책감(Guilt)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1. 양심의 죄책감

일종의 가책의 죄책감이다. 양심을 속이므로 느끼는 죄책감이다. 자기 스스로 생각해도 자기가 한일을 한심하게 느끼고 자책하는 죄책감이다. ‘내가 이 정도 밖에 안 되는 사람인가하는 죄책감이다.

어떤 남자가 알코올에 중독돼 비참한 삶을 살고 있었다. 이 사람이 술로 중독되어서 자신이 무너져 가는 모습을 보면서 부인이 들고 다니는 성경책을 읽게 되었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으로 충만함을 받으라”(5:18)를 읽다가 술 취함이 방탕함이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그때까지 자신은 술 취함이 향락인 줄 알았는데 방탕함이라는 것을 깨닫고 알코올 중독 센터에 가서 치료를 받고 갱생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계속 심리 상담을 받으면서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끼었다. 자신이 술 취함으로 가족들을 힘들게 했다는 것을 깨닫고 점진적으로 잃어버린 양심의 회복을 되찾은 것이다. 이처럼 사람들은 어떤 일을 저지르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된다.

그때부터 어떤 문제가 생기면 원인을 자신에게 돌리고 지나친 죄책감을 가지거나 가혹한 자기비판을 가하여 무력감에 빠지게 하는 것이다. 이런 양심의 죄책감을 구분하기 위해서는 자신의 죄책감이 합리적인지, 비합리적인지를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만약 비합리적 죄책감에 나온 것이라면 잘못된 죄책감에서 벗어나야 한다.

이뿐 아니라 양심의 죄책감에도 두 종류가 있다. 합리적인 죄책감과 비합리적인 죄책감이다. 합리적인 죄책감은 사회적 규범이나 양심에 관한 부분이다. 그러나 비합리적인 죄책감은 유독 자기 자신에게만 엄격한 것을 적용하여(자신만의 원칙) 오는 것이라면 그것은 자라온 환경에서는 영향력이지 죄책감은 아닌 것이다. 예를 들면 타인에게는 한없이 관대하면서도 유독 자신에게만은 지나치게 엄격하게 대하는 것은 자책감이자 죄책감은 아니다. 만약 자신이 죄책감과 자책감을 구분하지 못한다면 일자 샌드가 가 쓴 자신에게 너무 가혹한 당신에게라는 심리서를 읽으면 도움이 된다. 만약 비합리적인 죄책감으로 인하여 힘들어 한다면 나 곧 나는 나를 위하여 네 허물을 도말하는 자니 네 죄를 기억지 아니하리라”(43:25), “동이 서에서 먼 것같이 우리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다”(103:12) 는 말씀을 기억하고 죄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믿고 지나친 죄책감에서 멀어지기 바란다.

 

2. 타락의 죄책감

한 개인의 타락으로 인한 죄책감이다

대부분 타락의 죄책감은 성적 타락, 중독의 타락, 물질의 타락, 향락 타락 등은 많은 후회와 함께 죄책감을 느끼게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타락을 한 이후에는 일시적으로 죄책감은 없어지고 자기 자신을 조절하지 못하는 것에서 후회하는 타락의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죄책감은 우리 안에 있는 자유를 다 빼앗아 가버리는 죄책감이다.

 

3. 감정적인 죄책감

감정적인 죄책감은 자기 부정적인 평가에서 비롯되는 일종의 자기행동의 감정을 잘못 조절함으로 인한 수치심이다. 대부분 감정적인 죄책감은 희로애락의 한 부분으로서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혔을 때, 그것에 대한 일, 생각, 느낀 것에 대해 죄책감을 말한다. 이런 경우에는 그 행동을 되돌릴 수 없기에 자신이 후회하고 그 때의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했기 때문에 일어나는 반응이다. 이것은 내가 누군가에 아픔을 주었다거나, 상처를 주었다고 느끼었을 때 감정적인 죄책감을 느끼고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후회하는 죄책감이다

 

4. 분노의 죄책감.

분노의 죄책감은 대부분 혈기로 오는 경향이 많다. 정당하던, 정당하지 않던 것에 대한 혈기는 자기 자신에게 내적 분노를 가져오게 만드는 것이다. 이런 죄책감은 후회와 함께 평생 따라 다니는 죄책감이다.

 

5. 경제적인 죄책감

물질로 인해 죄책감을 느끼는 사람이 많다. 부모나 형제, 그리고 사업상의 어떤 문제로 금전적인 것이 깨끗하지 못했을 때 느끼는 경제적인 죄책감이다. 예를 들면 누군가에 물질을 빌린 후에 갚지 못할 때 일어나는 현상이 경제적 죄책감이다. 경제적인 죄책감으로 인한 피해 사례를 살펴보자

 

모 교회에서 있었던 일이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성도가 교인들에게 많은 돈을 빌렸다. 목사님과 사모에게도 각각 돈을 빌렸다.

그런데 문제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그 돈을 갚지 못한데서 부터 말썽이 나기 시작하였다.

이일로 돈을 빌려간 성도에게 돈을 달라고 아우성치자 돈을 갚을 능력이 없던 성도는 사모님이 돈놀이한다고 잘못된 유언비어를 퍼지게 하였다. 교회는 이일로 시끄러웠다. 결국 이 문제는 당회에 까지 거론되어서 교회는 양분되게 되었고 교회는 분리되고 말았다. 결국 돈을 빌린 성도 한 사람이 교회를 분열로 몰고 간 꼴이 되고 말았다. 상황이 이렇게 되자 이분은 경제적인 죄책감으로 명분을 잃고 교회를 떠나고 만 것이다. 자기 수치심을 합리화하여 자신은 살고 타인을 어렵게 하는 것을 만든 것이다. 이처럼 잘못된 수치심이 어려움을 만든 것이다

 

· 죄책감의 허()와 실()을 분석하라

사람이 죄책감을 느낀다고 꼭 나쁜 것만은 아다. 죄책감은 허와 실의 양면성이 있다.

먼저 유익한 면을 살펴보겠다.

 

1. 폭군

만약 한 나라의 대통령이 죄책감이 없다고 한다면 굉장한 폭군이 될 것이다. 국민을 무차별하게 학살을 하고도 죄책감을 못 느끼면 더 많은 생명들을 죽이게 될 것이다. 그러나 죄책감을 느끼면 그것으로 인해 생명에 대한 존엄성과 두려움을 가지고 조심하게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에게 죄책감이 전혀 없다고 한다면 그 사람은 정신병자와 똑같은 수준의 사람이 된다. 누구든지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죄책감을 느껴야 된다.

 

2. 행동제한

우리는 죄책감 때문에 행동을 스스로 제한 할 때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죄책감이 나를 유익하게 만드는 면이 있는 것이다. 내가 죄를 짓고 타락을 하고 싶어도 죄책감이 있기에 쉽게 행동을 못하게 만든다. 행동제한으로 일어난 사례를 살펴보자.

· 한 여인이 빨간 차만 보면 알러지가 일어났다.

길을 가다가도 빨간색의 차만 보면 온 몸에 알러지가 나는 것이다. 병원에 가도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후에 그 원인이 밝혀졌는데, 신혼 초에 남편이 군대 징집 갔을 때 외간 남자와 불륜 관계를 맺었던 것이다. 물론 관계는 그 한번으로 끝났고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후 그 일이 마음에 걸리었지만 흐르는 시간 속에 그 일을 잊으려고 애를 썼다. 이제, 어느 정도 그 일이 무마되고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빨간 차면 보면 알러지를 일으키는 정신 신체 상관성 질환으로 나타난 것이다. 이렇게 행동 제한이 다양하게 죄책감이 일어난다.

 

· 일가족이 모두 정신착란 증세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에는 며느리가, 두 번째는 남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는 시아버지가 그 뒤를 이었다. 그 가족이 출석하던 교회의 목사님은 이 절망적인 가정을 위해 날마다 눈물로 기도하였다. 이렇게 6개월이 흘렸다.

어느 날 목사님이 세미나에 참석하느라 사흘 동안 교회를 비웠다. 사흘 뒤 세미나에서 돌아온 목사님은 기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목사님이 교회를 비운 사이 그 가족이 모두 치유되었던 것이다. 목사님은 자신의 기도가 응답되었다고 생각하고 뛸 듯이 기뻐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 가족은 무당을 불러 푸닥거리를 한 다음에 병이 나았다는 것이다.

나중에 이 가정의 비밀이 밝혀졌다.

그 가정에는 노인성 치매에 걸린 시어머니가 있었는데, 상태가 갈수록 악화되자 병시중에 지친 가족들은 환자를 돌보는 일에 무심해졌고, 결국 시어머니는 죽고 말았다. 장례식을 치르고 나서 집안은 차츰 평온을 되찾게 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제일 먼저 며느리가 실성했고, 이것을 본 아들이 따라서 실성해버렸다. 아들과 며느리 모두 실성한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은 시아버지마저 정신이 돌아버렸다.

이것을 두고 귀신의 저주를 받았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그렇지 않다. 사실은 죄책감이 이 가족의 정신세계를 지배했기 때문에 일어난 현상이었다. 죄책감이 한 가정을 어렵게 했던 것이다.

 

3. 갱신의 기회

이미 죄를 범해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자신을 갱신할 수 있는 기회가 있기에 죄책감을 느끼는 것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죄책감은 양면이 있기에 영향력을 준다.

그 첫째가 죄책감은 정신과 육체에 영향을 준다. 만약 죄책감이 내 안에서 나를 잘 다스리지 못할 경우에는 육신과 정신에 굉장한 영향을 주어서 정신병원에 입원하게 하는 것이다, 이뿐 아니라 죄책감은 육적인 문제와 정신적인 문제를 주어서 심지어 죄책감으로 인해 자기를 자해하는 경우를 만들기도 한다. 둘째로 죄책감은 자신을 고립시키고 영적으로 무기력하게 하게 만든다. 개인적으로는 자신을 고립시키는 영적 무기력에서 빨리 힘을 얻어야 되는데 죄책감 때문에 눌려서 기도도 못하고 말씀도 못 듣게 만드는 경우도 있다. 셋째는 죄책감을 상상력으로 키우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과거에 지었던 죄를 죄책감으로 인해 상상력을 동원하면 큰 죄 짐이 되기 때문이다.

 

중세에 어떤 수도사들이 산꼭대기에다 수도원을 지어놓고 성결한 생활을 하고 있었다.

이 산 밑에 작은 마을이 있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그들이 어떤 생활을 하는지 몹시 궁금하였다.

어느 날, 수도사 한 사람이 먹을 것을 구하러 마을에 내려왔다. 이때 농부 한 사람이 그 수도사 앞에 달려가서 넙죽 절하며 물었다.

"신부님, 산꼭대기에 수도원을 지어 놓고 매일 경건 생활을 하시니 하나님과 얼마나 가까우시겠어요. 도대체 신부님은 무얼하고 지내시나요?"

신부님은 농부를 일으켜 세우고 그의 손을 잡은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We fall down and we get up (우리는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나고)

We fall down and we get up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나고)

We fall down and we get up (넘어졌다가 또 다시 일어났다)

 

중요한 것은 죄를 지었다는 것이 문제가 아니고, 지금 그 죄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느냐가 중요하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요일 1:9)" 라고 말씀하신다. 그럼으로 우리 모두는 주님 앞에 나와 자백의 기쁨, 죄로부터 해방된 평안을 누려야 한다.

 

누구도 완전한 사람은 없다. 매일 우리는 죄로 넘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또 다시 일어나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모습이다. 다윗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다윗도 하나님의 많은 사랑과 은혜를 받고 다시 잃어 낫던 것이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넘어졌더라도 다시 일어나서 엎드리는 사람을 귀하여 사용하신다. 우리의 죄가 만음에도 불구하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베푸신 것이다

- 다음 호에 계속 -

 

[편집자 주 : 2022년 7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4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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