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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율법의 요구와 넘치는 은혜

복음뉴스 0 2022.04.15 16:17

요한복음 살펴보기 ⑩  율법의 요구와 넘치는 은혜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우리가 율법에 대해서 많은 것을 배웠다. 제일 먼저 율법은 하나님께서 친히 주셨다는 것이다. 다음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구원계획과 목적에서 특별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럼에도 불구하고 율법은 예비단계이다. 더 나아가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율법은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안내판이라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초등교사의 역할을 한다. 결국 율법이 말하는 것은 은혜가 얼마나 뛰어난가를 말하기 위함이다. 사도 요한은 율법의 가치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은혜의 뛰어남을 말씀한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와 진리가 왔다는 것을 알림으로, 자신의 복음서를 읽는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기뻐하고 자랑하게 하려 한다. 사도요한은 그의 첫 번째 서신에서 “너희로 우리와 사귐이 있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사귐은 아버지와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와 더불어 누림이라(요일 1:3,4절)라고 말한 다음, 우리가 이것을 씀은 너희의 기쁨이 충만하게 하려 함이라”로 그의 서신을 쓰는 이유를 밝힌다. 우리는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다고 말한다.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것은 우리에게 은혜와 진리를 주시기 위해서다. 성육신의 전적인 의미와 목적이 여기 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그 은혜를 충분 히 누리길 바랐던 요한은 요한복음 1장 17절에서 율법이 과거에 했던 일과 은혜를 대조해서 보여준다. 율법이 놀라운 일을 했지만, 주된 역할은 장차 임할 은혜를 가리키는 데 있었다. 그런데 마침내 은혜가 왔으니 마음껏 자치하고 누리자는 것이다.

 

[이제 적극적으로 우리가 은혜에 대해서 살 펴보자]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1:17)고 기쁘게 말할 수 있었던 이유가 무엇일까? 은혜로 더해진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의 백성은 원래 기뻐하는 사람들이다. 확신 없이 주저하는 불행한 사람들, 의심하며 머뭇거리는 사람들이 절대 아니다. 그렇다면 은혜와 율법은 어떻게 다른가? 은혜가 가져온 더 좋은 것이 무엇일까?

 

1. 첫째 중요한 차이점 : 은혜는 준다는 것이다.


율법은 아무 것도 주지 않고 요구만 한다. 계산서를 내밀면서 “여기 청구서가 있다. 지불할 수 있는가?”라고 묻는다. 그러나 은혜는 완전 다르다: 우리에게 주신 복음의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라고 선포한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는다.

 

은혜는 법적인 성격이 없다. 그러나 율법은 당연히 법을 따지게 되어 있다. 죄의 결과는 무 엇인가? 로마서 6장 23절은 “죄의 삯은 사망이 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고 말씀한다. 삯은 그 동안 한 일의 결과를 정확하게 계산하는 것이요, 법대로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은혜의 영역으로 넘어가면 완전히 새로운 세상이 펼쳐진다. 더 이상 삯이 언급되지 않는다. 이렇게 은혜는 하나님이 그냥 주시는 선물이다. 예수께서는 포도원 일군에 대한 비유에서 이 원리를 단번에 확인해 주셨다. 포도원 주인이 아침 일찍 온 일군에게 한 데나리온을 약속했다. 그런데, 시간이 되어 그 다음에 늦게 까지 온 일군에게도 한 데나리온을 준다. 이때 먼저 온 사람들이 정당치 못하며, 불공평하다고 따진다. 주님이 왜 이 비유를 말씀할까? 주님의 목적은 한가지다. 그들이 더 이상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음을 가르치기 위해서다. 주님의 비유에서 주님은 “내가 내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권리가 없겠느냐? 나는 은혜를 베푸는 자다.”라고 말씀하는 것이다. 그분은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자들에게도 하루 품삯을 주시는 분이시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차이다.

 

2) 은혜는 주되 값없이 준다는 것이 복음의 큰 특징이다.

 

바울 사도의 말씀하는 것을 들어보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3:23).” “온 세상으로 하나님의 심판 아래 있게 하려 함이라(3:19) 하나님께서는 완전히 소망 없고 무력한 빈털터리인 우리를 값없이 의롭다고 해 주셨다. 당신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은 기쁨이 있는가? 당신은 우리의 모습과 상관없이 우리가 용서받은 것을 알고 있는가? 찬송 시인은 ”빈 손들고 앞에 가 십자가를 붙드네 의가 없는 자라도 도와주심 바라고 생명샘에 나가니 나를 씻어주소서!” 라고 찬양한다(찬송가 494장). 복음적인 선지자 이사야는 이 구원을 미리 내다보고 기뻐하며 예언했다: 너희는 와서 사먹되 돈없이, 값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사55:1). 값없이 주시는 은혜! 이것이 참으로 기독교의 영광스러운 메시지다.

 

3) 은혜의 또 다른 면은 은혜는 주되 아주 풍성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가) 그것은 은혜 위에 은혜이다. 사도요한은 이것에 대해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1:16)”라고 표현한다. 이것이 은혜 위에 또 은혜가 임한다는 뜻이다. 파도가 밀려오듯이 끝없이, 한 없이 밀려온다는 것이다. 이것이 요한복음의 큰 주제이다. 그래서 예수께서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씀하셨다: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 (4:13-14). 또한 이적을 체험한 자들에게도 말 씀하셨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8:35). 곧 은혜가 이만큼 풍성하게 부어진다는 말씀을 하고 있다. 바울 사도는 이에 대해 감격을 가지고 선포한다: 그러나 이 은사는 그 범죄와 같지 아니하니....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롬 5:15). 바울은 서로 반대되는 요소, 즉 범죄와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이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은혜는 단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상쇄하는데 그치지 않 는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범죄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흘러넘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에 대해 매우 자세하게 설명한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더욱 하나님의 은혜와 또 한 사람 예수 그 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5:15). 죄를 지은만큼 그리스도가 구원에 필요한 일을 하셨는가? 훨씬 그 이상이다. 바울은 말씀한다: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노릇 하였은즉 더욱 은혜와 의의 선물을 넘치게 받는 자들은 한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노릇하리로다 (5:17)! 사도의 요점은 이것이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5:29). 율법의 결과로 죄가 넘쳤지만, 은혜는 그보다 훨씬 더 풍성하게 흘러넘친다는 감격을 선포하고 있다: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 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 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5:21).

 

나) 은혜의 풍성함은 [더욱] [넘치다] [흘러넘 치다]라는 어휘를 통해서 부각된다.

우리에게 부요하게 주신다는 것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이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으로 말미암아 너희를 부요하게 하려 하심이라(고후 8:9). 은혜가 우리에게 무엇을 주는가? 하나님의 부요하심을 준다! 그래서 바울은 “말할 수 없는 그의 은사로 말미 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 외친다. 그 감사를 도무지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은혜가 그렇게 큰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의 은혜의 풍성함을 따라 그의 피로 말미암아 속량 곧 죄 사함을 받았다”(엡 1:7). 이것은 우리의 은혜 받은 삶의 방향을  말씀 해준다: 그 은혜의 지극히 풍성함을 오는 여러 세대에 나타내려 하심이라.(2:7). 앞에서는 그의 은혜의 풍성함이고 여기서는 그 은혜의 지 극히 풍성함을 말씀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이렇게 고백한다: 모든 성도 중에 지극히 작은 자보다 더 작은 나에게 이 은혜를 주신 것은 측량할 수 없는 그리스도의 풍성함을 이방인에게 전하게 하시고(3:8). 그래서 사도 요한은 본문에서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요 1:16)라고 그 끝없는 은혜를 말씀하고 있다. 우리는 이 풍성하고 끝없는 은혜에 대해 알고 있는가? 아직도 모른 다면 우리는 우리의 부족함에 대해 지혜를 달라고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니하시는 하나님께 구해야 한다(약 1:5).

 

4)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되 다양한 방식으 로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그 형태와 표현에 있어 한 없이 다양하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각각 은사를 받은 대로 하나님의 여러 가지 은혜를 맡은 선한 청지기같이 서로 봉사 하라!(벧전 4:10).

 

가) 당신은 하나님의 막아주시는 은혜에 대해 생각해보고 감사해본 적이 있는가?

하나님께서 막아주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겠는가? 지금도 때때로 막아주지 않는다면 어찌될까 생각해보라. 하나님의 은혜는 우리를 앞으로 나아가게 할 뿐 아니라, 저지하기도 하신다. 우리가 화나 분노나 억울함이 솟구칠 순간, 성령을 통하여 우리를 저지하는 손길을 의식하는가? 부드럽고 조용한 그 손길이 우리를 붙잡고 차분하고 편안하게 진정시키고 함부로 행동하지 않도록 저지해주고 있는가? 우리 인생을 돌아보면서, 막아주신 은혜를 감사하는 것은 너무 당연하지 않겠는가! 오늘도 우리가 무엇인가를 충동적으로 하려는데 하나님께서 이것을 저지하신다. 다윗은 이에 대해 자신이 거의 미끄러질 뻔 했는데 미끄러지지 않았다(시 73:2)고 고백한다. 그래서 하나님께 발걸음을 돌리게 되었고 거기서 마땅히 깨달아야 할 바를 깨달았다! 막아주시는 은혜다! 

 

나) 당신은 시련과 환난 중에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경험하며 사는가?

바울은 육체의 가시를 제거해 주시기를 세 번이나 기도했다. 그 가시 때문에 앞으로 계속 나아갈 수도 없고 무슨 일을 할 수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 후 12:9). 바울은 주의 말씀이 옳다 여겼기에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12:10)라고 고백 했다. 바울 사도는 “이제 내 약점을 자랑하겠다! 이 약점이 없었다면 나를 붙잡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치 못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처럼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아는가? 하나님은 우리에게 후히 주신다! 은혜 위에 은혜를 주시며 넘치게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말자. 우리의 시련의 때, 사방으로 포위되어 넘어질 찰나에도 붙잡아 주시는 은혜를 아는가? 여러분은 붙잡아 주시고 세워주시고 떠받쳐 주시는 은혜를 느끼며 사는가?

 

다) 시험이라는 관점에서 은혜를 살펴보는가?

야고보 사도의 경계의 말씀을 듣자: 간음한 여인들아(세상적인 마음으로 영적 간음을 저지른 사람들) 세상과 벗된 것이 하나님과 원수 됨을 알지 못하느냐? 그런즉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는 것이라(4:5). 그러면 과연 우리가 세상을 저항할 수 있을까? 야고보 사도는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 그러나 더욱 큰 은혜를 주시나니 그러므로 일렀으되 하나님이 교만한 자를 물리치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신다 하였느니라(4:6). 세상과 육신과 마귀와 싸우는 우 리에게 하나님은 그냥 은혜를 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더욱 큰 충분한 은혜, 어떤 형편에도 모자람이 없는 은혜를 주신다는 것을 확신하자! 오늘도 우리는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놀라운 은혜로 살아가고 있다!

 

라) 다양한 은혜의 면은 우리를 지켜 주시고 보전해 주시는 은혜를 담고 있음을 인식하는가?

바울은 빌립보 성도들을 향해 말씀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1:6). 이것이 빌립보서의 중대한 주제이다. 그의 고백이 무엇인가?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2,13) 그리고 마침내 성도들에게 확신을 준다: 나의 하나님이...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4:19). 우리를 값 주고 사신 은혜가 우리를 지켜주고 보전해준다. 그렇기에 주님은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자가 없느니라(요 10:28)“고 확신을 주신다. 하나님의 은혜는 한 번 잡은 것을 놓는 법이 없다. 은혜에서 떨어지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를 능하게 하시고 보전하시고 지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성도의 최종적인 인내함을 보장한다는 것을 결코 잊지 말자!

 

마) 앞서가시는 은혜, 우리 앞에 행하시며 길을 예비하시는 은혜를 아는가?

우리의 삶에서 우리가 막상 목적지에 도착 해보면, 은혜가 벌써 앞서 와 있다. 이처럼 은혜의 모습은 다양하다. 바로 이런 모든 것이 바로 율법과 은혜의 큰 차이점이다. 여러분은 지금 은혜를 받고 있는가? 우리는 이 은혜를 누려야 할 사람이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나머지 부분은 전부 이 넘치는 은혜에 대한 설명이다. 여러분은 과연 이 은혜를 아는가? 받고 있는가? 마땅히 기뻐하고 있는가? 바로 이 은혜를 누리게 하시려고 그리스도께서 오셨다. 혹시 여러분 신앙은 버림받은 듯한 심정으로 그나마 가지고 있는 약간의 신앙으로 필사적으로 간신히 붙잡고 있는 것은 아닌가? 결코 그래서는 안된다. 이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우리 모두는 오늘도 차고 넘치는 은혜! 한없이 부어지는 은혜, 영생하도록 솟는 샘물을 사모하자!

 

2. 율법과 은혜의 차이점은 은혜는 줄 뿐 아니라, 왕노릇하는 것이다


바울사도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1)”라고 했다. ‘왕노릇 한다’는 뜻은 은혜에 권세가 있다는 뜻이다. 율법의 문제점은 이런 권세가 없다는 것이다. 율법에 대해 바울 사도는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롬 8:3)”라고 말한다. 율법은 말만 할 뿐 실제로 해주는 것이 없다. 실제적인 능력도 도움도 주지 못한다. 율법은 다만 ‘이것을 하라’고 명령할 뿐이지, 실행 자체는 우리에게 다 맡겨 버린다. 그러나 은혜의 영광은 이런 율법과 달리, 권세를 가지고 왕노릇한다는 것이다. 권세가 없는 군주는 허수아비에 불과하며, 왕노릇하지 못한다. 왕노릇의 핵심은 그 권세와 권위와 실행력에 있다. 권세를 가진 왕의 말은 곧 명령이다. 반드시 지켜지고 실행된다.

 

1) 그래서 은혜가 하는 일은 하나님의 큰 계획과 목적을 실현시키는 일이다.

이런 은혜의 목적이 무엇일까? 바울은 이런 은혜는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는 것이라(딛 2:4)“라고 말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임한 것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의롭다 하시기 위해서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을 살며 그 명령을 지키게 하시기 위해서다! 그것을 바로 은혜가 해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하나님의 명령을 지키는 것은 결코 무거운 것이 아니다.

 

2) 다시 강조하면 은혜는 강력한 것이며 왕 노릇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어떻게 우리를 살려내셨는지에 대한 문제에 대해 바울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신 그 큰 사랑을 인하여 허물로 죽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함께 살리셨고 너희는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이라(엡 2:4,5)고 말한다. 은혜가 바로 이렇게 일을 하고 살려낸다. 은혜가 왕노릇하여 죽은 자에게 생명을 넣어 그리스도와 함께 벌떡 일어나게 만든 것이다. 이렇게 은혜는 우리를 살려내고 거듭나게 하고 거룩하게 한다. 하나님의 거룩한 율법대로 살 수 있게 한다. 그래서 우리로 하여금 율법을 행하는데 더 이상 무겁지 않게 만들어 주신다.

 

3. 은혜가 율법보다 뛰어나다는 말에 대해 성경은 그것을 더 좋은 언약이라고 표현한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러나 이제 그는 더 아름다운 직분을 얻으셨으니 그는 더 좋은 약속으로 세우신 더 좋은 언약의 중보자시라(8:6)” 라고 말한다. 어떤 점에서 은혜가 율법보다 뛰어나다는 것인가? 새 언약이라는 점에서 그렇 다. 새 언약이 옛 언약과는 다르다는 면에서 그 렇다. 그러면 그것은 어떤 차이가 있는 것인가? 히브리서 기자는 “이 언약은 내가 그들의 열조의 손을 잡고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던 날에 그들과 맺은 언약-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 주신 언약, 율법-과 같지 아니하도다. 그들은 내 언약 안에 머물러 있지 아니하므로 내가 그들을 돌보지 아니 하였노라. 또 주께서 이르시되 그날 후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내 법을 그들의 생각에 두고 그들의 마음에 이것을 기록하리라. 나는 그들에게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게 백성이 되리라(8:9)” 라고 말한다.

 

1) 이것이 기독교다! 기독교는 율법을 폐하지 않는다.

 

가) 그러므로 우리는 “나는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 율법과 아무 관계없다”라고 말할 수 없다.

기독교가 하는 일, 곧 하나님의 은혜가 하는 일은 바로 율법을 우리의 정신과 마음에 기록하는 것이다. 이것이 율법과 은혜의 차이이다. 이제 율법은 우리 밖에 있지 않고 안에 있다. 모세를 통해 주신 율법은 돌판이지만, 그러나 이제는 돌판에 있지 않고, 우리 안에 있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너희는 우리의 편지라. 우리 마음에 썼고 뭇 사람이 알고 읽는 바라. 너희는 우리로 말미암아 나타난 그리스도의 편지니 이는 먹으로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판에 쓴 것이 아니요 오직 육의 마음판에 쓴 것이라(고후 3:2,3)라고 말씀한다. 그러므로 이제 사도는 ”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눅 10:28)라고 벽력같이 외쳤다. 왜냐하면 그것을 행할 능력이 성령으로 우리 안에 쓰여 있기 때문이다.

 

나) 이런 차이점 때문에 그리스도인이 죄 가운데 계속 살 수 없다!

사도 요한은 ”죄를 짓는 자(죄 중에 살아가 는 자, 그 가운데 드러누워 그 지배를 받는 자) 는 마귀에게 속하나니 마귀는 처음부터 범죄 함이라.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것은 마귀의 일을 멸하려(무로 돌리려) 하심이라(요일 3:8)“라고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3::9)”라고 말할 때, 그것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왜 그럴까? 그것은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함이요 그도 범죄하지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부터 났음이라”라는 말씀의 약속 때문이다. 요한은 지금 죄 없는 완전한 상태를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 하나님의 씨가 있다는 것은 죄의 노예로 계속 살아 갈 수 없다는 뜻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로서, 그들 안에 씨가 죄의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지켜주신다. 이제는 율법이 우리 밖이 아닌 우리 안에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 대해 바울은 말한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왜 그런가?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 그의 계명과 율법을 행하게 - 하시나니(빌 2:12,13). 그렇다 하나님이 우리 안에서 행하심으로 우리로 그의 율법을 행하게 하신다. 왜 그런가? 하나님께서 법을 우리의 생각 속에 두셨기 때문이다(히 8:10). 이제는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이해할 수 있다.

 

다) 아직도 율법아래 있는 자들의 문제는 어린 아이 같다는데 있다.

부모는 어린이에게 하지 말라고 금한다. 그래서 하고 싶은 것을 못하게 될 때 아이는 억울해 한다. 부모가 제지하는 이유를 이해하지 못하며, 하지 말라고 금하는 목적을 모른다. ‘안 돼’! 하고 거절하면 마지못해 따르면서 가혹하고 부당한 처사로 여겨 불평한다. 이것이 바로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의 모습이다. 그러나 율법이 마음에 새겨진 사람은 그 이유를 이해한다. 철이 들면, 그때는 부모에게 감사하며 할 일, 안 할 일 등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쳐준 것을 오히려 감사한다. 바울 사도가 말한 것처럼 “내가 어렸을 때에는 생각하는 것이 어린 아이와 같다가 이제는 장성한 사람”(어른, 고전 13:11) 이 되었다. 율법이 마음에 새겨지면, 지각이 생겨나고 율법 조문이 아니라, 그 정신의 중요성을 깨닫게 된다. 이것이 놀라운 일이다. 그래서 율법의 목표와 목적을 알게 되면서, 드디어 율법이 즐거워지기 시작한다!

 

2) 그 법을 생각에 두면 어떻게 될까?

 

가) 율법이 마음에 쓰이면, 하나님의 성품 그 자체 때문에 율법이 필연적으로 존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십계명을 주셔야만 했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문자화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자들이 십계명을 알면, 본질적으로 옳다는 것을 알고 지킨다. 오늘날 온 세상이 십계명을 지킨다면 즉시 낙원이 될 것이다. 마음에 율법이 쓰여 있는 사람은 이것을 안다.

 

나) 율법이 마음에 쓰이면, 하나님의 계명을 마땅히 기뻐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만들어 주신 목적이 바로 이것이다: “우리는 그가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니라(엡 2:10). 우리가 거듭난 것은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다. 율법이 마음에 쓰여 있는 사람은 이런 놀라운 삶을 살 수 있게 된 것을 감사한다. 불평하지 않는다. ”내가 이런 삶을 살 수 있다니. 정말 놀랍구나!“ 하면서 감격한다. 억울해 하지 않는다. 기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지어다(벧전 1:16)라고 말씀하신 거룩해짐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이것을 깨달은 사람은 더 이상 율법에 대해 억울한 감정을 느끼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 이것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삶이고, 나는 그 삶을 살아야 하는구나!”라고 느끼기 때문이다.

 

다) 율법이 마음에 쓰이면 소망이 놀라운 동기로 작용하게 된다.

어떤 동기인가? 사도 요한은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 3:3)”고 확언한다. 참으로 천국에 갈 것을 믿는 사람, 천국 가기 원하는 사람은 그에 합당한 자가 되기 위해 준비한다. 이 세상에서 삶의 최대한을 누리려 하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사고할 줄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이다. 계명을 지키고 헌신하는 것이 억울하게 느껴지는 사람은 하나님을 뵈오며 천국에서 지낼 것에 대해 한마디도 말하지 말아야 한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사람은 늘 깨끗하게 해간다.

 

<나오며>


이 모든 것 때문에 은혜는 놀랍게 뛰어난 것이다.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내 법을 그들의 생각과 마음에 써 주겠다! 새로운 기질을 주겠다! 돌 같은 마음 대신 살 같은 마음을 주겠다! 내 법을 지키고 싶어 하게 만들겠다! 내 법을 사랑하게 만들겠다! 이제 그들은 정죄 받아도 율법을 미워하지 않으리라!”라는 것이다. 그래서 “아! 나는 죄를 짓고 정죄 받아도 이 정죄는 지당한 것이구나! 내가 어리석었 다! 해서는 안될 짓을 했다. 나는 무가치한 자다. 오! 어떻게 이런 날 용서해 주실 수 있을까!” 라고 감격해 하면서 승복하게 되는 것이다. 은혜는 후히 주되 풍성하게 해주고 능력을 주며 우리로 왕노릇하게 만든다. 하나님의 모든 백성이 점도 없고 흠도 없고 주름 잡힌 것도 없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아름답고 온전하며 영광스러워질 때까지 계속 왕노릇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자기 백성이라 부끄러워 하시지 않게 해주며, 그리스도께서도 우리를 자기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시지 않게 해 준다. 성도여! 이 은혜를 기뻐하고 있는가? 우리를 붙잡아 주시는 은혜의 소나기에 흠뻑 젖어보았노라 말할 수 있는가? 우리는 그런 위치에 있는가? 마땅히 그런 위치에 있어야 한다! 성령으로 우리의 이해를 밝히자! 은혜의 승리와 영광을 맛보며 사는 성도들이 되자!

 

[편집자 주 : 2022년 3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10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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