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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자

복음뉴스 0 2022.04.15 05:24

요한복음 살펴보기 ⑨   율법과 우리의 관계를 정확하게 알자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요한복음 1장 17절은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것이요”라고 말씀한다. 이 말이 암시하는 것이 무엇일까? 모세를 통하여 주어진 율법은 제 역할을 다했지만, 그 이상의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런 후에 17절 하반절에 감사하게도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왔다는 것을 천명한다. 하나님의 아들이 오신 일과 그 아들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와 진리에 비춰볼 때, 율법과 우리 그리스도인과는 어떤 관계에 있는가?

 

# 율법의 문제는 우리 삶의 모든 측면과 모든 단계에서 우리의 위치에 영향을 끼친다. 어떤 영향일까?

 

첫째로 사람들이 율법의 정확한 위치와 본질을 모르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자신의 구주로 믿지 못한다.

믿음으로 의롭다하심을 받는다는 교리의 가장 큰 대적은 무엇일까? 그것은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이것이 율법의 문제다. 율법을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더 이상 행위를 의지할 수 없다. 그래서 복음을 전하고 받는 입장과 삶에서 율법이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둘째로 그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이 된 후, 다시 혼란에 빠져 율법 아래로 돌아가는 바람에 곤란에 빠지는 경우들이 있다. 그래서 어떤 그리스도인은 죄를 짓고 나서 자신이 정말 그리스도인일까 의심하며 괴로워한다. 또한 마귀가 공격하고 도전해 오는 것도 문제다. 마귀는 우리가 죄 짓기를 기다렸다가 다시 얽어매려 든다. 또한 거짓 가르침도 혼란을 일으킨다. 로마서는 이와 같은 문제를 다루고 있다. 그렇기에 지금도 구원의 확신과 관련하여 이 가르침은 매우 중요하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은 바로 자신과 율법의 관계를 명확히 모르기 때문에 확신이 없는 것이다. 또한 거룩해짐과 관련해서도 율법과 자신의 관계를 알아야 한다. 이것을 모르는 사람들은 반율법주의의 죄에 빠질 수 있다.

 

# 여기서 율법을 이해한다고 할 때 두 가지 위험이 따른다.


그것은 율법을 미진하게 이해할 위험이며, 반대로 과도하게 이해할 위험이 있다. 어떤 사람은 율법을 이해함에 있어서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어떤 사람은 과도하게 이해할 위험이 있다. 마귀는 우리를 붙잡아 주저앉히거나 부추겨 이런 선을 넘어 극단으로 가게 만든다. 마귀는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교리 자체를 확신하지 못하게 만들거나 반대로 지나치게 강조해서, 장애물로 변질시키고 있다. 우리는 늘 한쪽으로 치우치기 쉬운 사람들이다. 여기에 우리의 어려움이 있다.

 

# 그러므로 우리는 율법과 우리 그리스도인의 관계를 확실하게 밝혀주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1. 그리스도는 우리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사실이다(롬 10:4).


1) 로마서의 목적 중의 하나가 바로 이런 사실을 알려주는 것이다. 율법의 행위로 하나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다(롬 3:20 상) 왜 그런가?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기 때문이다(3:20하). 그러나 참으로 감격스러운 진리는 그 다음의 말씀이다: “(그러나: 개역성경에는 없지만 반드시 삽입해야 할 접속사) 이제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는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21-24).

 

# 사도 바울은 1장 16, 17절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고 말하는 것은 지극히 자랑한다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그 복음이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되기 때문이다. 이것이 기독교의 기초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하나님의 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설명하는 책이다.

 

2) 그러면 그리스도인이 당면하는 문제는 어떻게 그 의를 얻을 것인가 하는 것이다.

로워지지 않으면 하나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떻게 해야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는가? 하나님께서는 율법을 통해 자신이 어떤 의를 요구하시는지 알려주셨다. 그런 의를 행하면 받아주겠다 하셨다: “모세가 기록하되 율법으로 말미암는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 의로 살리라 하였거니와”(롬 10:5). 그러나 우리는 그런 의를 행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의 정죄를 받는다. 이에 대한 바울의 해결책이 무엇인가?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었다고 선포한다(10:4).

 

3) 여기서 [마침]이라는 의미가 무엇일까? 

하나님의 아들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여기 오신 이유는 모든 믿는 자들에게 의를 이루시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고자 오신 것이다. 율법을 분명히 모르는 사람은 주님께서 오심과 사복음서의 메시지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및 율법이 가져오는 문제와 짐을 해결하려고 오셨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 밖에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족시킬 만한 의를 얻어야 하는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려고 오셨다는 말이다.

 

4) 그렇다면 어떻게 마침이 되셨는가? 

여기에 복음의 영광이 있다. 이것이 복음이 가르치는 우선적 원리이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서 있는 발판이다. 먼저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야고보 사도는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된다고 말씀한다(2:20).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표자로서 오셨다. 새 사람, 둘째 아담, 마지막 아담, 마지막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율법에 온전히 순종하셨다. 또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우리 자신은 율법을 지키는데 실패한 자들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율법을 깨뜨린 자라는 사실이다. 그 율법은 우리의 죄와 허물에 대해 벽력같이 형벌을 선고한다. 우리 앞에 있는 율법의 형벌은 하나하나 정확하게 시행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지점에서 은혜의 영광스러운 메시지가 등장한다. 그것이 요한복음 본문의 말씀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이것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명령을 완벽하게 이행하셨을 뿐 아니라, 율법이 사람에게 선고한 형벌도 모두 담당하셨다는 말씀이다. 그래서 다른 자들이 아니라, 우리 믿는 자들을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은혜의 메시지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 대표자로서 형벌을 다 담당하셨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의를 주신다는 것이다! 이것은 정말 기뻐할 복음의 말씀이다. 그래서 바울이 그토록 자랑스러워했고 줄기차게 말했다. 다메섹의 경험을 따라 이 가슴 벅찬 사실을 갖게 되었고, 이것이 그의 삶을 바꿨다. 그는 그때까지 땀 흘리고 애쓰며 삶았던 모든 삶이 잘못된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큰 의를 선물로 받았다. 그런 은혜 받은 그가 고백한 감탄의 내용을 들어보자: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라”(빌 3:8, 9).

 

5) 그러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말의 실제적 의미는 무엇일까?

 

첫째로 구원을 생각할 때 항상 율법을 기준 하여 율법과 우리 관계에 비춰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분들은 복음을 전하되 율법은 개의치 않고, 그리스도만 제시하는 분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합당하지 않고 또한 그럴 수도 없다. 왜냐하면 율법을 모르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결코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왜 그럴까? 구 원을 생각하려면 오직 율법을 기준으로 생각 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구원받은 사실에 대하여 느낌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그런 것은 참 골치 아픈 일이다. “지금 나는 구원 받았다는 느낌이 들지 않고, 신자라는 느낌이 들지 않습니다” 라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구원받은 확신을 자기의 기분이나 느낌이나 상태에 의지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구원의 확신과 구원 그 자체를 혼동함으로 혼란에 빠진다. 우리는 무엇을 느끼느냐가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 아래 어떤 형편에 있느냐가 중요함을 알아야 한다. 나는 지금 행복한가? 나는 지금 비참한가? 는 중요하지 않다. 예를 들어, 교통사고가 나서 기분이 아주 나쁘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법을 어겼는지, 그렇지 않은건지가 중요하다. 감정은 그 사고의 상황 정리에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법적인 책임이 중요하다. 법은 객관적인 것이다. 구원도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우리는 느낌에 따라 지옥에 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이 친히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에서 바리새인이 얼마나 만족하게 느끼는가? 신앙 생활을 스스로 그렇게 느끼고 대견해하는 사 람은 오히려 소망이 없는 사람이다. 그러므로 구원을 생각할 때 항상 법을 기준으로, 곧 율법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왜 그런가? 구원은 객관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두 번째, 어떤 방식으로든지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왜 우리가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는다 생각해서는 안 되는가? 그것은 그리스도가 지키셨기 때문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은혜가 등장하여 그리스도가 적극적으로 우리를 대신해주셨음을 알려준다. 이제 의는 전적으로 행위가 아니라, 믿음에 달린 것이다. 유대인들의 문제는 믿음이 아닌, 율법의 행위로 의를 얻으려는 데 있었다. 그 결과 그들은 선민이면서 밖으로 쫓겨나고 이방인들이 안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자기의 모습과 행위를 바라보고, 의지하면 절대 안 된다. 우리 가운데 어떤 분들은 50년 이상 신앙생활을 한 분들이 있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자기 속에 있는 것이나, 이제까지 해 온 일을 의지한다면, 그는 은혜의 자리를 떠나 율법 아래로 되돌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강조한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갈 2:21) 우리는 모든 측면, 모든 단계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의를 통해 의로워진다. 이 하나님께서 그 한없는 은혜와 선하심으로 우리를 원래 모습이 아닌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습으로 우리를 바라보신다는 것이 은혜의 메시지다. 우리가 아닌 그리스도,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를 보신다!

 

2. 그리스도는 우리를 율법 아래서 구원하셨다.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율법의 정죄에서 구원하셨다.

이것은 첫 번째 원리에 대한 더 자세한 설명 이다: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

음이라”(롬 6:14). 그래서 하나님 앞에 우리의 위치, 우리의 관계를 결정짓는 것은 율법이 아니라, 우리 대신 율법을 이루신 그리스도시다! 이 큰 구원을 충분히 기뻐하려면 이 점을 아주 분명히 알아야 한다. 로마서 7장에 사도 바울은 남편에게 벗어난 아내의 이야기로 이 부분을 설명한다. 남편 있는 여인이 그 남편이 살아 있을 동안 법으로 그에게 매인바 된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남편의 법에서 벗어난다. 남편이 살아있는데 다른 남자에게 가면 음녀이다. 그러나 남편이 죽으면 그 법에서 자유롭게 되어 다른 남자에게 가도 음녀가 되지 아니한다. 이런 일을 행하신 목적에 대해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한다: “그러므로 내 형제들아 너희도 그리스도의 몸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임을 당하였으니 이는 다른 이 곧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이에게 가서 우리가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라”(7:4).

 

2) 그래서 우리는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결코 정죄함이 없다!

이것은 엄청난 말씀이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우리를 해방하였기 때문이다(8:2) 우리에게 사형을 선고하는 법, 죽이려는 법인 율법에서 해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 사도는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갈 2:19)”라고 말한다. 정확하게 보자. ‘내가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남편이 죽었으니 남편의 법 아래에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이제 새 남편인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한, 결코 율법은 아무 말도 못한다.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셔서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율법 아래에 나셨고 사셨다. 그러나 죽으시고 부활하시고 승천하시면서, 율법과의 관계를 완전히 청산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것은 율법을 지키느냐? 못 지키느냐? 에 따라 하나님과의 관계나 신분이 좌우되던 상황에 대해 죽었다는 말씀이다.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이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이 우리한테 아무 말도 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이 아무리 우리를 정죄해도 두렵지 않다. 왜 그런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결코 정죄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기 위해, 스스로 율법을 통과하고 율법을 넘어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율법 위로 불쑥 올려주셨기 때문이다.

 

3) 여기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의 실제적인 면을 생각해보자!

 

(1)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마귀의 고소와 이의를 귀담아들으면 안 된다.

마귀는 우리가 어떠하든지 우리를 시험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반드시 마귀가 찾아오게 되어 있다. 왜 그럴까? 그는 그리스도인들을 참소하던 자요, 대적이기 때문이다(계 12:10). 그리스도인들이 죄를 지을 때, 구원의 확신을 흔들려고 반드시 찾아온다. 그때 우리가 마귀에게 넘어가면 안 된다. 우리가 분명하게 대답할 말이 바로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말이다. 이것이 우리의 그리스도인 됨의 위치이다.

 

(2)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정죄감을 느끼면 안 된다.

정죄감 때문에 결코 낙담하지 말자! 우리가 죄를 짓는 자신을 점검해보면, 아주 비참해진다. 그런 심정에 계속 머무르면 안 된다.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지만, 자기 행위를 의지하는 사람은 마귀의 속삭이는 말에 심히 낙담한다. 그러나 참된 그리스도인은 말한다: “ 괜찮아! 내가 실패했어, 그러나 나의 의는 나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 예수께 있단다“.

 

(3)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자신의 구원을 의심해서는 안 된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부분에서 넘어진다. “죄를 짓고 나서 나는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어! 나는 정죄 받아야 할 죄인이야...” 그래서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두려워한다. 그는 율법과 자신의 관계를 모르는 사람이다. 우리가 반드시 확신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다 책임지셨고, 모든 죄를 위해서도 죽으셨다는 것이며, 그러므로 우리는 자유하다는 것이다.

 

(4) 우리가 율법에 대해 죽었기 때문에 자신이 어떤 위치에 있는지 확실히 아는 것이 우 리의 의무이다.

구원을 기뻐하고, 그리스도 예수를 즐거워 하는 것이 우리 그리스도인의 의무이다. 오늘도 우리에게 주시는 은혜의 메시지는 내가 율법 아래 있지 않고 은혜 아래 있으며, 율법에 대해 죽었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여전히 자기 마음 상태에 집착하는 사람은 율법과 자신의 관계를 모르기 때문에 그런 상태 속에서 혼란에 빠진다. 우리가 과거에 무슨 짓을 했든지, 모든 것은 이미 그리스도 안에 있다! 이것이 우리의 확신의 토대다! 이 확신에 대해 배우고 알고 기뻐하자! 그리스도의 피와 의를 주심에 기뻐하고 감사하며 확신하자! 우리를 위해 모든 율법을 이루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오직 그 안에서 기뻐하자!

 

3.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능히 율법을 이루게 해주신다


여기서 우리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아니 그리스도가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면, 이제 나는 율법과 상관이 없지 않나요?” 아니다. 이제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능히 율법을 지키고 이행하게 해주신다. 그래서 은혜가 하는 일은 우리에게 율법을 이루는 능력을 주는 것이다. 이것이 또한 우리의 기쁨이 된다.

 

1) 우리가 은혜를 생각할 때, 반드시 율법의 관점에서 생각해야 한다.

 

(1) 하나님의 은혜를 단순한 탈출구나 죄사함의 방법이나 해방의 도구로 생각하지 않아야 한다.

“너 하고 싶은 대로 해도 괜찮아. 회개하고 또 은혜 받으면 되지! 우리는 율법이 아닌 은혜 아래 있기 때문이야”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은 저주에 가깝다. 그는 은혜교리를 우습게 만드는 반 율법주의자일 뿐이다.

 

2) 은혜를 받았는데 하나님의 율법을 지킬 능력을 얻지 못했다면 잘못된 것이다.

마귀는 인간을 타락시켜 불순종하게 만들었을 뿐 아니라, 자기 종으로 삼았다. 하나님께 순종할 능력까지 빼앗아 버렸다. 구원은 이처럼 마귀가 했던 일을 완전히 무력화시키고 되돌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연히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며 그 율법대로 살 수 있는 능력으로 회복시켜주는 일이 포함된다. 만일 구원이 죄 사함은 받되, 계속 실패하면서 사는 것을 의미한다면, 마귀가 하나님을 이긴 셈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결코 아니다. 마귀는 하나님의 은혜로 완전히 패배했다.

 

2)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께서 오신 이유 가 무엇인가?

 

(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고 하신 이유가 무엇인가?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죄와 죄의 책임과 죄의 형벌, 죄 자체에서 구원해주시려고 오셨다. 여기에 더하여 율법을 행하고 지킬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켜주려고 오셨다.

 

(2) 그러므로 죄가 우리를 주장하지 못한다. 사도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선포한다: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롬 6:14).

그리스도께서 말씀이 육신 되어 오신 목적을 다시 강조할 필요가 있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뤄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3,4).”

 

(3) 십계명은 지금도 유효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도 율법인 십계명을 지켜야 한다. 이것은 이스라엘 사람이나 구약의 사람만 지켜야 하는 것이 아니다. 십계명 전체가 말하는 것은 사랑하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들을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왜 그런가?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기 때문이다(롬 13:10). 그런데 은혜가 바로 그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준다!

바울 사도는 “모든 사람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나타나 우리를 양육하시되”(딛 2:11) 라고 말씀한다. 무엇을 양육하며 가르치는가? “경건하지 않은 것과 이 세상 정욕을 다 버리고 신중함과 의로움과 경건함으 로 이 세상에 살고 복스러운 소망과 우리의 크신 하나님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심을 기다리게 하셨으니 그가 우리를 대신하여 자신을 주심은 (2:11-13)” 이라고 말씀한다. 왜 자신을 주셨을까? “모든 불법에서 우리를 속량하시고 우리를 깨끗하게 하사 선한 일을 열심히 하는 자기 백성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14절)고 말씀한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심으로 율법을 이루게 하신다. 이것이 신앙생활의 핵심적인 내용 이다

 

3) 은혜는 우리에게 율법을 지킬 능력을 준다.

오직 은혜만 이 능력을 준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으로 율법에 대해 죽임을 당한 이유는 부활하신 분에게 가서 하나님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려 함이다(롬 7:4). 우리가 그리스도와 결혼한 결과는 하나님이 태초에 뜻한 바를 행하며 율법을 지키는 선한 행실의 아름다운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그 렇게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을 섬기는 방식은 무엇인가? “이제는 우리가 얽매였던 것에 대하여 죽었으므로 율법에서 벗어났으니 이러므로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으로 섬길 것이요 율법 조문의 묵은 것으로 아니할지라”(롬 7:6). 우리가 이제 율법을 지키되 새로운 방법으로 지킨다. 전에는 조문 곧 글로 쓴 조항을 지키려 했지만, 이제는 성령으로 지키는 것이다.

 

[결어]


바울이 율법을 다루면서 우리에게 하고자 하는 말은 우리에게 자유가 있다는 것이다: “ 주는 영이시니 주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느니라”(고후 3:17). 우리는 율법을 문자적으로 지키고자 헛되이 애쓰지 않고, 이제 자유롭고 기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킨다! 오늘도 우 리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계명을 지킬 수밖에 없다. 그래서 요한 사도는 말씀한다: “하나님 을 사랑하는 것은 이것이니 우리가 그의 계명 들을 지키는 것이라.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 이 아니로다”(요일 5:3).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고 싶어하며, 지킬 능력도 있다.

 

이것이 바로 율법과 우리 그리스도인과의 관계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성령을 주셨다. 성령께서 지금도 우리 안에 계신다. 우리는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죽은 자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있는 자로 여기며 오늘을 살아야 한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난 자답게, 새 생명 가운데서 걸어가며 행동해야 한다. 우리는 은혜의 능력으로 하나님의 율법을 실천하며 그 율법대로 살 수 있는 위 치에 있으며, 태초에 하나님 아버지께서 뜻하신 모습대로 살 수 있는 위치에 이르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세 가지 원리를 잊지 말고 기억하자!

 

첫째,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 둘째, 그는 우리를 율법 아래서 구원하시고 율법을 지키지 않아도 의를 얻도록 하셨다. 셋째, 새로운 출생과 내주하시는 성령을 통해 스스로 율법을 지키고 따를 능력을 주셨다. 그래서 “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성)령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셨다( 롬 8:4). 이제 우리는 성령으로 살자! 모세로 주신 율법 후에, 은혜와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자! 말할 수 없는 그 은혜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자!(고후 9:15). 아멘!

 

[편집자 주 : 2022년 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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