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이 신문

[문갈렙] 죽음예지훈련

복음뉴스 0 2022.04.14 11:39

Mission Field 단상(斷想) ⑨  죽음예지훈련

글 : 문갈렙 선교사 (GMP/한국개척선교회 소속)


45년 전 전방에서 소대장으로 2년여의 군 복무를 마치고 직장인으로서의 새 출발을 하였을 때를 회상한다. 서울 도심에 회사 빌딩이 있는 대기업에 들어가 사무원으로서 배치 받은 첫 부서는 인사관리부였다. 부서의 이름으로 보면 제법 빛나 보여도 내가 처음으로 맡은 업무는 모두가 꺼리는 업무였다. 선배 사원들이 후배 사원이 오면 바로 넘겨버리는 귀찮은 업무인 산재 사고 처리업무와 의료보험 업무였다. 모두 폼 나는 업무나 힘깨나 쓰는 업무를 원하는 통에 신입사원은 불평 없이 이 업무를 맡아야 하는 입장이었다. 빈번한 중대 재해 사고의 뒤처리로 피해자 측 가족들에게 시달리는 업무를 누가 즐겁게 여기겠는가? 믿음의 청년이었던 나는 어떤 업무라도 기왕에 해야 할 일이라면 긍정적이고 기꺼운 자세로 임하겠다는 마음으로 이 두 업무를 맡아 일하는 동안 보람있게 수행하였다. 말씀대로 작은 일에 충성하는 자에게는 더 중요한 일을 맡기신다는 마태복음 25장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맡아 일하는 동안 이 업무에 관한 한 앞서 맡았던 누구보다 훌륭하게 감당하리라 결심하고 일하였다. 말씀 그대로 나중에 회사에서 몇몇 부서를 거치면서 점점 중요한 업무를 맡게 되었고 그 모두를 훌륭하게 해냈던 뿌듯한 경력을 갖게 되었다. 

 

당시 내가 다닌 회사는 단일제품 생산공장으로는 세계 최대의 공장을 갖고 있었고, 중장비와 복잡한 기계설비 속에서 일하는 관계로 작업 현장에서는 자주 재해 사고가 일어났다. 대개는 중상을 입는 사고였고 안타깝게도 1년에 여러 차례 사망사고도 일어나는 바람에 본사의 업무 담당자로서 사고 현장을 조사하고 환자 후송과 보상처리의 업무를 하는 것은 만만치가 않았다. 늘 엄청난 스트레스와 긴장 속에서 근무하였다. 당시에 나는 재해보상이나 병원치료 등의 사후 조치를 잘하는 것도 중요 하지만 그보다는 근본적으로 사고가 날 원인을 개선하여 더 희생자가 생기지 않게 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신입사원의 입장에도 불구하고 당돌하게 회사에다 사고 예방대책 수립을 위해 필요한 예산을 신청하였다. 회사는 나의 제안을 기특하게 보았던지 그 당시의 규모로도 큰 예산을 승인해 주었다. 그래서 수립한 계획대로 전국적으로 무재해 모범 사업 현장들을 방문하여 배우면서 동시에 안전관리 전문가들을 찾아가서 도움을 요청하는 일을 벌였다. 열정적으로 재해 예방에 대하여 배우고 연구하였다. 시작한 지 1년 만에 “무재해를 위한 전사적 종합대책”이라는 제목으로 보고서를 제출 하였더니 CEO 특명으로 즉각 현장 적용 및 중점 시행하라는 결정이 내렸다. 이후 1년간의 평가에서 1/3로 현저한 재해 사고의 감소 효과가 나타났다. 이때 보고서에 포함된 사고 예방 대책의 근간이 ‘위험예지훈련’이었다. 

 

‘위험예지훈련’이란, 작업 중 발생할 수 있는 각종 위험요인을 사전에 예견하여 작업을 시작하기 전에 이를 제거하거나 혹은 그 예상 되는 위험에 특히 주의를 기울임으로써 안전을 확보하자는 일종의 현장 적용형 사고예방책이다. 현장 근로자들이 위험에 대한 감수성을 가지는 것은 물론 참혹한 사고 발생으로 침체된 현장 분위기를 생동감 있게 바꾸는 효과도 얻게 되는 것이다. 각자가 안전의식을 갖고 위험요소와 문제점들을 미리 찾아내 이를 해결하는 능동적 직장 풍토를 이루는 목표 달성에도 적중하였다. 이를 통하여 나는 일 계급 특진의 포상까지 받았다.

 

문득, 과거 내가 접한 안전관리에 비견하여 ‘죽음예지훈련’이라고 제목을 정하고 생각을 해보았는데 이를 문장으로 쓰면서 주저되는 바가 많다. 제목에서부터 이글을 대하는 분들이 얼마나 꺼리고 부정적으로 생각하겠나 예상이 되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많은 제목 중에서 죽음에 대하여, 거기다 더해 무슨 죽음훈련이 필요하단 말인가 하는 혐오감으로 제목만 보고서 읽지 않을 것이라 우려된다. 하지만 선교사로서 사역의 현장에서 가끔은 죽음에 대하여 깊은 고민과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질병과 사고와 테러 등으로 가끔 선교사들이 젊은 나이에 사역 지에서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할 때마다 누구에게나 죽음은 피할 수 없고 죽음을 재촉하는 위험은 언제 어디서나 기다리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나는 20년 전 사역지로 출국 직전에 같은 교회 권사님이 방언으로 기도를 해 주시다가 즉석에서 통역하여 전해주시기를 ‘사역지 에서 순교하신다고 하시네요!’라고 말씀하신 적이 있었다. 그리고 몇 번의 교통사고를 당하여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죽음 직전의 위험 속에 빠져든 적도 있다. 이러한 현장 상황 속에서 죽음에 대하여 생각을 할 때 ‘나는 과연 죽음 앞에서 믿음이 흔들리지 않고 의연할 수 있 을까?’ 하는 것이다. 예를 들어 테러 집단에 끌려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로 참수를 당할 직전의 상황에 부닥쳤다면 죽음을 모면하려고 구차하게 믿음을 포기하겠다고 말하며 목숨을 구걸하는 행동을 하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다. 동영상으로 시청한 바 IS에 의해 참수 당하는 중동의 성도들처럼, 카메라가 돌아가는 중에 곧 집행될 참수의 예리한 칼날 앞에서도 주님을 찬양할 수 있겠나 하는 것이다. 성경에서 만나는 스데반 집사님처럼 오히려 돌을 던지는 군중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늘 향하여 기도하면서 빛나는 얼굴로 의연히 죽음을 맞

을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사실 죽음은 주 예수님을 따라 좁은 길을 걸어가는 성도로서 뗄 수 없는 것이고 당연한 길이다. 예수님이 죄인을 구원하시고자 대신 십자가에 못 박히시어 피 흘리시며 돌아가실 때 죄인 된 나도 죽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는 ‘ 나는 날마다 죽노라!’고 고백했다. 물론 이 둘의 예시는 영적으로 죽음을 해석한 것이지만 육신적으로도 죽음이라는 관문을 거치는 것은 영생에 들어가는 필수적 과정인 것이다.

이런 견지에서 생각한다면 ‘죽음예지훈련’은 무엇을 위한 훈련인가? ‘위험예지훈련’은 재해 사고를 당하지 않고자 미리 예지하고 위험요소들을 제거하여 사고를 피해 보고자 하는 것이지만, ‘죽음예지훈련’은 어찌하면 죽음을 안 당하고 피할 수 있나 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하면 죽음을 잘 맞아들이고 하나님의 뜻 안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으로 천국 문에 들어설 것인가를 위한 훈련이라고 말하고 싶다. 오히려 어떻게 하면 누구도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을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계신 가운데서’ 의연하고 담대하게 그리고 감사하고 찬양하며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하는 명제에 관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언젠가는 닥칠 나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는 어떻게 하고, 막상 닥치면 어떤 자세와 마음가짐으로 맞을 것인가에 관한 묵상이라고 말하고 싶다.

 

인간에게는 죽음을 회피하거나 앞당기거나 또는 늦출 수 있는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위해 미리 준비하고 스스로 훈련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하여 평소에 깨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의 패턴을 꾸준히 유지해 가기 위해서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죽음예지훈련’의 일환으로 생각해 본 것으로 몇 가지가 있다. 인생 스토리의 아름다운 결말을 위한다면, 멋진 연착륙을 원한다면, 그리고 그 다음에 이어질 하나님 영광 중 천국에서의 영원한 삶 을 소망한다면, 이 땅에서 무엇을 꾸준히 실천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가는 자명하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류를 계속 유지해 나가는 것이다. 말씀 묵상과 기도, 그리고 찬양과 감사가 이어지도록 묵상 노트와 감사일기를 쓰는 것도 영성을 견지하는 훈련의 중요한 한 방법이라 생각한다. 올해 나는 이를 위하여 묵상하며 또박또박 말씀 필사를 시작하였다. 시간을 구별하여 매일 예배를 드리는 것은 일회성이 아니라 이어오던 대로 계속 이어 가고 있다. 그리고 주님보다 더 사랑하고 의지하는 세상의 것들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내려 놓는 훈련이다. 또한 어떤 환난과 역경, 설사 죽음 앞에서도 ‘항상 앞서 행하시는 하나님’께 대한 신뢰를 잊지 말자는 것이다. 주님 앞 계산대에서 내 삶의 열매를 결산 받을 때, 주님께서 그 인자하신 품으로 안아 주시는 장면으로 이 세상에서의 마지막 장과 천국 입성의 첫 장으로 삼겠다는 소망을 품고 죽음에 대한 예지훈련을 계속 이어가겠다는 결심이다.

 

[편집자 주 : 2022년 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9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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