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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석] 율법은 초등교사로서 우리를 인도한다

복음뉴스 0 2022.04.12 14:52

이윤석 목사의 요한복음 살펴보기 ⑦  율법은 초등교사로서 우리를 인도한다

글 :  이윤석 목사 (NY 부르클린제일교회)


[들어가며] 

 

구약 시대와 주님이 오신 당시에 유대인의 문제가 무엇일까? 지금도 문제가 되는 것은 무엇인가? 이것은 전부 하나님의 율법을 오해하 고 잘못 적용했다는데서 나온 것이다. 그래서 신약에서 주님께서 친히 이 문제를 다루셨다. 주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마5:17) 하셨으며, 사도들도 율법의 문제에 대해 큰 관심을 쏟아 언급하고 있다.

 

*사도행전 교회에서 율법을 주요한 주제로 삼는 이유와 또 서신서에 율법을 필히 다루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그들이 율법의 의미와 역할을 오해하고 오용하는데서 모든 문제가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것은 지금의 정치, 경제, 교육에 있어, 모든 비극과 곤경의 주된 원인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신자들의 영적생활의 곤란도 율법에 대한 오해 때문에 생겨난다. 이런 점에서 유대인들은 가장 기본적인 오류에 빠졌다. 왜냐하면 율법의 역할과 목적을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율법을 지키고 실천함으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의를 이룰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도 율법이란 말을 쓰지는 않지만, 그런 생각에 빠져 있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이 누구인가? 자기 힘으로, 선하게 살고 자기를 희생하면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자기의 결단과 의지와 노력으로 하나님께 인정받고 천국에 갈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또한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다.

 

* 이런 잘못은 여러 가지 형태로 나타난다. 

 

첫째로 많은 교인들의 믿음이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있는데도, 왜 그리스도인으로 인정받는 것일까? 그들은 선행을 하고 있고, 희생하고 다른 사람 섬기고 있으며, 그리스도의 윤리를 실천하고 있다는 것 때문이다. 그 런데 그들의 진정한 마음은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그 피를 의지하고, 말음 속에 깊이 생각하며 귀중이 여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런 지식은 가지고 있으나, 무관심하는 상태에 있다.

 

둘째, 세대주의(Dispensationalism)라는 신앙이 아주 많이 퍼져있다. 그들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은혜의 복음이 나타났다 말한다. 예수님 공생애 기간은 은혜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복음(교리)이고, 그 때는 사람들이 그것을 통해 구원받았다고 한다. 사람들이 메시아로 받아들이길 거부하자, 그때에야 비로서 은혜의 복음이 나타났다고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은혜의 복음은 복음서가 아니라, 서신서들이 은혜의 복음을 가르친다고 한다. 주님이 다시 오셔서 세상을 다스리면, 그때는 다시 하나님 나라의 복음, 곧 은혜가 아닌 행위와 순종을 통해서 구원받으며 은혜의 복음은 과도기의 것이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그들은 근본적으로 율법을 오해하고 있다. 그들의 말대로, 율법에 순종함으로 구원받는 시대가 있었고, 앞으로 그런 시대가 다시 돌아올까? 이런 오해들이 교회에 있어 왔고, 우리도 잘못하면 이런 오해에 빠진다. 그래서 이렇게 배운 사람들은 때로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은혜로 구원받는 것 같고, 어떤 때는 순종으로 구원받는 것 같 다고 느낀다.

 

위와 같은 오해를 가진 사람들에게 우리는 어떻게 대답해야 할까? 우리에게는 율법의 역할에 대한 성경적으로 바른 대답이 필요하다.

 

1. 율법은 구원의 방편으로 주신 것이 아니다.

 

1) 율법이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는 것에 대해 성경 자체는 많은 근거를 가지고 있으며 로마서 1장부터 3장까지 이것들을 말씀하고 있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 (롬3:20). 이에 바울사도는 나중에 이것을 요약해서 말씀한다: 그런즉 우리 가 무슨 말을 하리요? 의를 따르지 아니한 이방인들이 의를 얻었으니 곧 믿음에서 난 의요, 의의 법을 따라간 이스라엘은 율법에 이르지 못하였으니 어찌 그러하냐? 이는 그들이 믿음을 의지하지 않고, 행위를 의지함이라. 부딪힐 돌에 부딪쳤느니라.(9:30,31)

 

2)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다. 그를 기쁘시게 하려는 마음이 있었다.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었고, 하나님께 복을 받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었다. 이에 대해 바울 사도는 말한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히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니라(롬 10:2). 바울 사도는 그리스도를 거부한 유대인들의 모든 문제가 율법에 대한 오해에 있었다 고 말한다. 그들은 율법을 지킴으로 의로워지고 구원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그들은 오히려,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게 되었다.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만 있는 것이다.

 

3) 그것이 언제부터 하신 말씀인가? 바울은 말한다: 또 하나님이 이방인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정하실 것을 성경이 미리 알고 먼저 아브라함에게 복음을 전하되 모든 이방인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받으리라 하였느니라.(갈 3:8). 복음이 예수님 때 온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누구에게 복음을 주셨는가? 많은 사람들이 복음이 예수님 때만 온 것이라고 말하고, 세대주의자들은 심지어 부활 이후에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성경의 대답은 그것이 아니라, 복음이 이미 아브라함을 통해서 왔다고 말씀한다. 사실은 그 전에도 말씀했다. 원복음 (Proto-gospel)이 처음부터 창세기 3장 15절에 벌써 주어졌다. 물론 구원의 수단으로 은혜의 약속을 분명하게 주신 것은 아브라함 때였다. 그래서 바울은 선포했다: 그러므로 믿음으로 말미암은 자는 믿음이 있는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느니라(갈3:9).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이 오해에 대해서 바로 잡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로 구원해 주실 것을 아브라함에게 이미 약속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자손들’이라고 하지 않고 [자손]이라고 하신 것은 아브라함을 통해서 나올 단 한 사람, 그를 통해 모은 민족에게 큰 구원을 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 자손이 누구인가? 바울은 말한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과 그 자손에게 말씀하신 것인데 여럿을 가리켜 그 자손들이라 하지 아니하시고, 오직 한 사람을 가리켜 네 자손이라 하셨으니 곧 그리스도라!(갈3:16)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이미 언약을 맺어, 오직 은혜로만 구원할 것을 약속하셨다: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하나님께서 미리 정하신 언약을 430년 후에 생긴 율법이 폐기하지 못하고 그 약속을 헛되게 하지 못하리라 (갈 3:17). 아브라함에게 언약을 주어 약속하셨고, 그로부터 430년 후에 율법을 주셨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신 것을 무효로 하고 율법을 준 것이 아니다. 언약은 세상 사람들도 함부로 폐기하지 않는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께서 맺으신 언약이니,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430년 후에 나온 율법이 결코 언약을 밀어내거나 무효화할 수 없다! 만일 하나님께서 ‘은혜, 오직 은혜로 구원하겠다고 하신 하나님께서 나중에 가서 ’내가 주는 율법을 지키면 구원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신다면, 스스로 자신의 약속을 번복하시고 폐기하시는 셈이 되어버린다. 그것은 말도 안되는 생각이다!’ 그분은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조차도 없으신 분이시기 때문이다(약1:17).

 

4) 그러면 유대인들이 이렇게 질문할 것이다: 그러면 왜 율법을 주셨는가?

바울은 이에 대해 분명하게 말한다: 그런즉 율법이 무엇이냐? 범법하므로 더하여진 것이라. 천사들을 통하여 한 중보자의 손으로 베푸신 것인데, 약속하신 자손이 오시기까지 있을 것이라(갈3:19). 그렇기 때문에 [율법으로 구원 받아야 한다]는 걱정을 할 필요가 없다.

 

5) 그렇다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과 반대 되는 것인가?

바울은 갈라디아 교회에 말한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과 반대되는 것이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갈 3;21) 그런 생각은 아예 하지 말라! 입 밖에 꺼내기도 무섭다는 것이다. 한 하나님께서 약속도 주시고 율법도 주셨기 때문에 율법은 약속과 반대될 수 없다! 율법으로 의를 이룰 수 있었다면 당연히 구원의 수단이 되었을 것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모든 것을 죄 아래에 가두었으니 이는 에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약속을 믿는 자들에게 주려함이라.(갈3:22). 만약 하나님께서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주셨다면, 자신의 언약과 자신의 맹세와 자신의 말씀을 번복하시는 셈이 되버린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이미 복음을 주셨기 때문에, 번복 하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율법이 하나님과 의로운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수단이 된다는 생각을 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율법의 역할과 목적을 오해했다. 그 때문에 율법의 요구도 오해했다. 그래서 주님께서 산상설교에서 율법을 자세히 설명해주셨다: 옛사람에게 말한 바 ~~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마5:21,22).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 앞에 바르고 의로워질 수 있다고 착각했다. 왜 그럴까? 그것은? 율법의 정신을 무시하고 문자에만 집중한 것 때문이다. 그들은 말꼬리만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예수님은 마가복음 7장에서 이 문제를 다루셨다: 너희는 율법보다 전통을 앞세우면서 특정한 말과 행동만 하지 않으면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는데, 그것은 너희 말이지, 하나님의 말씀은 아니다. 그러니 유대인 지도자들은 진정한 율법의 요구 대신에 자신들의 해석을 따랐다. 그 런데 어떤 복음주의자들은 말한다: “오직 의롭다 하심을 지키기 위해, 율법은 우리와 아무 상관이 없다. 우리는 오직 예수를 전할 뿐이다!“ 맞는 말인가? 잘못된 태도다. 이것도 율법을 주신 목표와 목적을 오해한 것이다.

 

2. 그렇다면 율법을 주신 목적이 무엇인가? 

 

죄 때문에 주셨다! 둘째 원리는, 율법은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죄의 심히 죄됨을 보여 주기 위해 주셨다. 그래서 율법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수 없음을 알려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하나님은 구원의 수단으로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 율법을 지킴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 바울은 말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 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롬8:3). 율법은 사람을 구원할 수 없다. 하나님은 율법을 주시기 전에 이미 그것을 아셨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시되, 처음부터 끝까지 다 알고 계신다. 율법은 구원하지 못한다

 

* 그렇다면 율법은 왜 아무도 구원하지 못할까? 그것은 우리가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기 때문이다.

 

여기 이 말에 대한 세 가지 중요한 의미가 있다.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한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1) 율법이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기 때문에 사람을 구원하지 못한다.

바울도 자신이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였다고 말한다. 그 자신도 바리새인 시절에는 실제로 하나님의 율법을 온전히 키기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문제가 무엇인가? 율법의 요구사항을 마음대로 축소해버렸다. 율법을 인간이 지킬 수 있는 수준으로 끌어내렸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지만 세상에 훌륭하게 사는 자들, 스스로 올바르다고 하는 사람들이 지금도 하는 일이다. 사람들은 낮은 기준을 정해놓고 스스로 그 기준을 지키고 있다고 생 각한다. 그리고 아무 문제가 없다고 생각한다. 과연 문제가 없는가? 바울사도의 말처럼 그것은 하나님의 의가 아닌, 인간의 의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그들이 특정한 행동을 안하고, 선을 행하면 하나님은 만족하시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뭐라고 말씀하시는가? “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라! 또한 이웃을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이 바로 율법의 요구이다. 그러면 우리가 전 존재를 다해 하나님을 사랑하고 있는가? 그렇지 못하다. 훌륭한 사람들이 자신의 모습에 만족하며 자신의 행동에 자부심을 느끼는데, 그래서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면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필요성을 보지 못하는 사람이 바로 무서운 죄인이다. 자신이 훌륭하게 행하고 있으며, 죄를 별로 짓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의 필요성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이 가장 큰 영적 교만과 자기만족의 큰 죄이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말하며 행동하는 것일 까? 자기들 나름대로 죄를 정해버리기 때문이다. ‘아! 나는 살인한 적도 없고 간음한 적도 없고 술취한 적도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들이 그들의 내면에 가지고 있는 교만과 질투와 시기하는 근성에 대해서도 무죄할까?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대부분 그런 것을 죄로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무엇인가? 율법이 얼마나 높은 수준을 요구하는가? 율법의 관심은 동기와 욕망, 그 마 음에 있다.

 

# 바울은 탐내지 말는 말씀 앞에 엎어졌다. 탐내는 생각만 해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 이니라(롬13:10). 사랑이 넘치지 않는다면, 율법을 이루지 못한 것이다. 왜 그런가? 율법의 완성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는 율법에 대해 어디까지 행해야 하는가? 바울은 “내가 할례를 받는 각 사람에게 다시 증언하노니 그는 율법 전체를 행할 의무를 가진 자라”고 말씀한다(갈5:3). 어떤 의무인가? 율법 전체를 행해야 한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읽어야 할 성경이 야고보서다. 누가 과연 죄를 범한 자인가? “누구든지 온 율법을 지키다가 그 하나를 범하면 모두 범한 자가 되나니”(약2:10). 율법은 99.99%를 지키면 구원받을까? 못 받는다. 아무리 작은 것을 놓쳐도 실패이다. 이것이 바로 율법이 원하는 수준이다. 절대적이고 완벽한 순종을 요구한다. 결코 여기서 빠져나 갈 수 없다. 전적으로 순종하지 않으면 아예 순종하지 않은 것으로 여긴다. 그러면 누가 지킬 수 있을까? 그러므로 이것은 사람을 의롭게 하려고 주신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2)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이란 말씀의 두 번째 의미는 무엇인가?

율법이 구원하지 못하는 두 번째 이유는? 우리에게 전적인 책임을 맡긴다는 데 있다. 율법은 우리를 찾아와 말한다: “그래! 네가 할 일이다. 네가 이 일을 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연약한 존재이다. 육신으로 인해서 연약한 존재요 항상 죄인이다. 그뿐 아니라, 계속 내 속에는 모순이 있다. 우리가 어떤 사람들인가? 

 

우리가 이런 사람이다: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행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하지 아니하는 바 악을 행하는도다.(롬7:19). 우리의 모습을 잘 보 자! 바울의 탄식을 들어보라: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으로 나를 사로잡는 것을 보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롬7:21-24)

 

율법은 우리에게 전적인 책임을 맡긴다. “나는 하나님의 율법이 선하고 훌륭함을 알기에, 그것을 지킬 것이며 지키고 싶다”며 간절히 사모한다. 그래서 율법을 지켜보려 한다. 그러나 실패한다. 반드시 지켜야 한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내 속에 선한 것이 거하지 않기 때문에 그럴 수 밖에 없다. 심지어 죄인인 우리는 율법을 들으면 들을수록 더 정욕에 사로잡혀 죄를 짓게 된다. 이것은 율법이 잘못 되었기 때문이 아니다. 우리가 심히 잘못되었기 때문이다. 바울 사도의 말을 들어보라: 그런즉 선한 것이 내게 사망이 되었느냐? 그럴 수 없느니 라. 오직 죄가 죄로 드러나기 위하여 선한 그것으로 말미암아 나를 죽게 만들었으니 이는 계명으로 말미암아 죄로 심히 죄되게 하려 함이라.(롬7:13)

 

3) 율법을 구원의 수단으로 주시지 않았다는 말에 담긴 세 번째 의미는 무엇일까?

율법은 우리를 전혀 돕지 못한다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알려주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해야 할 일은 누구나 다 잘 안다. 여기에 인생의 비극이 있다. 알면서도 못한다는 것이다. 율법은 ‘자! 이렇게 해라!’ 말씀하는데, 그런데 나는 할 수가 없다. 사도행전에 보면. 복음이 이방인들에게 전해지자, 이방인들도 율법을 지켜야하고 할례를 행해야하며, 율법의 의무를 행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사도들의 회의가 열렸다. 사도 베드로는 이런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예루살렘 초대교회 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말했다: 지금 너희가 어찌하여 하나님을 시험하여 우리 조상과 우리도 능히 메지 못하던 멍에를 제자들의 목에 두려느냐 (행15:10). “율법을 고집하지 말라! 그것은 우리도 메지 못할 멍에이다. 제대로 알자. 그래서 용납하자!”

 

이와 같이 율법을 주신 이유는 첫째로 율법은 구원의 수단으로 주신 것이 아니라, 죄 때문에 주셨고 둘째는 죄의 죄됨을 알리고자 주셨다.

 

3. 마지막으로 율법을 주신 이유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 인도하기 위해 주셨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요1:17) 지금까지 말씀드린 의도는 무엇인가? 율법을 무시해서는 안 되며, 율법을 중요하지 않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은혜를 믿는 우리가 율법에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 사람들의 문제는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데서 발생한다. 세워지기 위해서는 먼저 무너져야 한다. 사람들은 무너지지 않으려고 애를 쓴다. 시므온이 주의 모친 마리아에게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거나 흥하게 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되기 위하여 세움을 받았고.(눅2:34). 은혜를 받으려면 먼저 비참한 걸인으로서 자신의 궁극적인 무력함을 절감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절감하게 하는 방법과 수단이 무엇인가? 오직 하나님의 율법 밖에 없다. 오직 율법만이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하며, 우리를 굴복시킨다. 우리가 율법의 참된 본질을 아는 순간, 우리는 자신이 아무 가망없는 존재임을 발견한다. 왜 그런가? 율법이 원하는 100% 순종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내 몸 속에 한 다른 법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니 절망적인 부르짖음이 터져 나오게 되어 있다.

 

바울은 하나님이 복음을 퉁해 아브라함에게 주신 은혜의 교리를 밀쳐 내려고, 율법을 주신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 때문에 율법을 주셨는가? 약속이 이뤄질 때까지 우리를 가두어 두고자 주셨다:  믿음이 오기 전에 우리는 율법 아래에 매인 바 되고 계시될 믿음의 때까지 갇혔느니라.(갈5:23) 무슨 짓을 해도 자기 힘으로 구원받을 수 없음을 보여주고자 했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질 때 까지 갇혀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아브라함에게 처음 이 약속을 주셨고, 사랑하는 아들을 보 내시어, 우리 대신 온전히 행하게 하심으로 이 약속을 이루셨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갇혀 있었다. 율법이 우리에게 무엇이라 고 하는가? “함구하라! 자기 의에 대해, 자기 선 함에 대해, 큰 희생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말 고 입을 다물고 있으라!”고 한다.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도덕인도 굵은 베옷을 입고, 티끌을 무릎 쓰며 엎드려 할 것을 요청한다.

 

 

더 나아가 바울은 덧붙인다: 이같이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 교사가 되어(갈3:24). 지금도 그렇다. 이 초등교사의 인도 없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자는 아무도 없다. 자기가 회심하고 중생했다고 하면서도, “회개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가 능할까? 자신이 절망적인 죄인인 줄 모르고 나 오는 사람은 진정 그리스도께 나온 것이 아니 다. 율법을 통해서 가장 깊은 절망을 체험한 사 람만이 제대로 그리스도께 나올 수 있다. 이렇게 우리를 우리 주 예수께 인도하는 초등교사로서 율법을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율법을 무시하지 말자! 곡해하지 말고 평가 절하하지 말자! 사도 요한은 우리를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주신 영광으로 인도하기 위해 율법을 주셨다는 점을 밝힌다(요 1장 17절)

 

율법의 목적은 우리 주 그리스도의 탁월성을 강조하는데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유대인과 세대주의의 오류에 대처하는 방법은 무엇일까? 율법을 제대로 사용하는 것이다! 어떻게 사용해야 할까? 바울은 율법을 바르게 바라보고 바르게 사용 하는 태도에 대해서 이렇게 말씀한다: 알 것은 이것이니 율법은 옳은 사람을 위하여 세운 것이 아니요 오직 불법한 자와 복종하지 아니한 자와 경건하지 아니한 자와 죄인과 거룩하지 아니한 자와 망령된 자와 아버지를 죽이는 자 와 어머니를 죽이는 자와 살인하는 자며 음행 하는 자와 남색하는 자와 인신매매를 하는 자와 거짓말하는 자와 거짓 맹세 하는 자와 기타 바른 교훈을 거스르는 자를 위함이니 이 교훈은 내게 맡기신 바 복되신 하나님의 영광의 복음을 따름이니라 (딤전 1:9-11). 이것이 바로 율법을 바르게 바라보고 바르게 사용하는 태도다. 자신이 과연 용서받을 수 있을까? 의심하며 확신을 갖지 못하는 사람을 보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면 무엇일까? ‘내가 좀 더 똑바로 살 면 될텐데’라는 생각이 여전히 그들을 사로잡고 있다는 것이다. 그 죄만 제거하고, 그 죄만 끊으면 아무 문제가 없으리라고 생각한다. 이것이 그들이 여전히 율법 아래 머물고 있다는 뜻이다. 여전히 율법을 구원과 해방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애초의 잘못에 빠진 것이다..

 

[나아가며]


성도여! 율법과 도덕적인 노력과 행동으로 절대 의롭다 함을 얻을 사람이 없다. 율법으로는 죄를 깨닫는 것이다. 율법이 우리에게 유죄를 선고함으로, 우리를 무너뜨리고 입을 다물게 하고, 완전히 무력한 상태로 만듦으로, 마침내 우리를 우리 주 예수께로만 인도해 주는 초등교사이자, 선생님의 역할을 하는 것이다!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주어졌지만, 은혜와 진리는 우리에게 예수로 온 것이다(요 1 장 17절). 우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만 의롭다 할 권리를 가졌다! 우리가 살 길은 오직 하나님을 향한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이 우리 살 길이다.

 

[편집자 주 : 2021년 12월 1일 자로 발행된 <복음뉴스> 제7호에 실린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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